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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73화 (273/925)

49. 스포츠 교류전 (3)

해가 짧아진 탓에 저녁을 먹고 나니 곧장 일몰 시각이 되었다.

장남욱과 만나기로 한 시각에 가까워지자 주변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조도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반응해 자동으로 점등하는 인공조명 덕에 시야 확보는 어렵지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호랑이꽃이 아직 안 졌네.’

미로 정원의 입구 앞에는 여전히 호랑이꽃이 피어 있었다.

한반도의 기후 기준으로 호랑이꽃이 피는 시기, 결실기는 7, 8월인데 왜 아직도 꽃이 한창인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이렇게 해 놓은 걸까.’

예전과 달리 황지호의 의욕이 충만해 5천 년 산 호랑이 티를 내고자 호랑이꽃도 계속 피워 두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올해 봄, 올무도 천익산을 중심으로 은광고의 학교 부지 전역과 황명호 대저택 안에 벚꽃을 오래도록 피게 한 적이 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한옥 별채에서 헤어진 후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올무가 생각나 슬픔이 차올랐다.

“왔군. 그 멍청한 얼굴을 다잡아라.”

황지호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보니 멀리서 조명이 하나씩 켜지는 게 보였다.

조명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별채 양식에 맞춘 건지 디자인과 밝기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호족의 안내를 받으며 장남욱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는데, 켜지는 조명이 변할 때마다 다른 공간을 통과하여 오는 것처럼 보였다.

“안녕, 의신아, 지호야. 오늘도 늦은 시각에 방문해서 미안하다.”

“상관없다. ……저 캐리어의 내용물이 전부 벽사의 대상인가?”

저번에 장남욱이 가져온 캐리어는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에 가져온 캐리어는 총 세 개였고, 저번보다 사이즈도 커지고 소재도 견고해 보였다.

‘이계 금속과 드랄루민 소재를 섞은 합금 케이스같은데. 그 정도로 주의를 기울여야 했나?’

장남욱은 캐리어를 대신 들고 온 호족과 황지호를 향해 성실하게 사과했다.

“어, 아, 감사합니다! 미안해. 내가 들고 왔어야 했는데…….”

호족은 황지호가 턱짓하자 말없이 물러났는데, 딱히 인간의 짐꾼을 했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한 기색은 없었다.

그저 명령을 수행하고 예의를 다하는 충직한 모습을 보였을 뿐이었다.

“이 저택의 손님에게 예의를 갖춘 것뿐이다. 하나라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짐을 손님이 전부 들게 할 수는 없지.”

“그래……?”

평범한 인류의 집에서 자란 장남욱은 노친네의 사고를 이해하기 어려운 듯했지만, 곧 ‘의신이네 0반 친구는 특이하구나!’ 하고 납득한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장남욱이 저렇게 쉽게 수긍한 건 룸메이트인 도시후가 TC 그룹 자제인데다 상당한 괴짜인 탓이 클 거다.

“그럼 시작하자.”

“이번에도 결계를 칠 필요가 없나?”

“그래, 안 도와줘도 돼.”

바닥에 둔 캐리어를 전부 열고 광림을 발동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무녀 후보생의 성장 단계에 따른 카드를 여러 장 전개했다.

오늘 플레이어의 궤적을 무리하여 사용한 탓인지, 카드 아래에 표기된 ‘사용 가능 시간’으로 적힌 숫자가 평소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0분 이상 활용 가능한 카드를 고르자 빛의 카드가 모두 사라졌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제의(祭儀) 기구 소환’을 사용합니다.〉

파아아아……!

광림 발동에 반응해 제의 기구가 소환되었다.

오색기, 작두, 신칼, 횡적(橫笛), 무악기(巫樂器), 점상, 산통이 빛을 머금고 하나하나 떠올랐다.

이번에 손에 쥔 건 저번에도 사용한 무선(巫扇), 일월청룡선(日月靑龍扇)이었다.

파앙!

나는 단숨에 거대한 부채의 살을 모두 펴고 스킬을 발동했다.

이능파가 부채의 살을 타고 퍼져 나가 면을 덮고 태양과 달 사이에 있는 청룡을 휘감았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벽사(辟邪)’를 사용합니다.〉

팡! 파앙! 팡!

열린 캐리어를 향해 각각 한 번씩 일월청룡선을 휘두르자 세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

청룡이 캐리어를 통과해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삿된 것’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아무것도 없다고?’

무사히 성인이 되었다면 역대 가장 강력한 용왕신의 무녀가 되었을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벽사 행위가 소용이 없다니.

뭔가 이상했다.

‘벽사 스킬은 무사히 발동했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도시후의 물품에는 삿된 기운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러면 시후는 대체, 왜……!”

도시후의 이상 행동은 몇 번이나 발견되었다.

장남욱은 도시후를 옭아매는 정체불명의 실과 실타래를 ‘별 처녀의 눈’으로 목격했었다.

“한 번 더 해 볼게.”

〈해당 캐릭터의 광림, ‘제의(祭儀) 기구 소환’을 사용합니다.〉

다시 떠오른 무구들 가운데, 무선을 하나 더 꺼냈다.

그 결과, 한 손에는 일월청룡선을, 다른 한 손에는 파랑황룡선(波浪黃龍扇)을 들게 되었다.

양손에 무선을 잡으니 플레이어의 궤적 제한 시간이 훅 떨어지는 게 보였다.

‘한 번 정도는 더 쓸 수 있을 거야……!’

두 개의 무선을 크게 부치며 스킬을 발동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벽사(辟邪)’를 사용합니다.〉

파앙!

삿된 것만을 날리는 무선에서는 바람 한 점 흐르지 않았다.

그 대신 왼손에서는 해와 달 사이에 떠 있던 청룡이, 오른손에서는 작고 큰 물결 사이를 가로지르는 황룡이 나타났다.

“조의신……!”

“굉장하다! 두 용이 동시에 등장하니 힘이 더 커졌어!”

저번에 벽사 의식을 치를 때처럼 황지호는 눈에 마력을 담아 안광을 발동하고, 장남욱은 별 처녀의 눈을 발동해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이능파가 맺힌 무선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선의 움직임에 따라 두 용이 함께 세 개의 캐리어를 꿰뚫으며 허공을 유영했다.

파아아아…….

그러나 이번에도 삿된 것의 흔적은 없었다.

저번처럼 저주의 씨앗이 나타나지 않았다.

“의신이의 힘으로도 벽사가 안 되다니…… 시후는 정말로 진단받은 대로 단순 스트레스성 발작을 일으킨 걸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장남욱이 혼란스러워하자 밤하늘과 별을 박아 넣은 듯한 ‘별 처녀의 눈’이 흐리게 변했다.

아스트라이아로부터 받은 그의 눈은 진실을 비춘다.

그러나 장남욱은 아직 능력이 발동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또 장남욱이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 편이긴 하지만 그는 아직 17세 고등학생이었다.

그 눈이 진실만을 보더라도 이면에 감춰진 악의나 음모를 모두 꿰뚫어 보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사태가 더 심각할지도 몰라.’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하자 용이 새겨진 무선이 사라졌다.

“도시후의 개인 물품에 삿된 것이 남지 않은 건 확실해.”

“그럼 시후는 괜찮은 거야?”

“아니.”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저주의 씨앗이 도시후의 개인 물품이 아닌 다른 곳에 심긴 거야.”

“시후가 이상 증상을 일으킨 뒤에 이 눈으로 시후를 살펴봤어! 시후를 조종하던 실은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고, 다른 흔적은 없었는데…… 분명 어딘가에 그 씨앗이 있을 거야.”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개인 물품이 아니라 몸 안에 직접 심긴 거야. 네가 발견하지 못하고, 개인 물품이나 외부에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깊숙하게.”

장남욱이 숨 쉬는 걸 잊은 것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장남욱은 도시후가 일으킨 이상 증상들을 되돌아보듯 흐린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왜, 왜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거지? 생각해 보면 이 눈은 아직 레벨도 낮은데…… 왜 그걸 과신해서 시후를…….”

장남욱의 말 한마디에 죄책감이 뚝뚝 묻어났다.

장남욱이 저렇게 걱정하고 있는데 도시후는 아직도 별생각 없이 해군 타령을 한다는 걸 생각하니 속이 터졌다.

도시후를 패기 위해 줄을 서는 사관학교 생도들 사이에 껴서 나도 한 대 패 주고 싶어졌다.

“도시후는 어떤 광림을 써?”

“……그건.”

장남욱이 머뭇거렸다.

동의 없이 광림을 제3자에게 밝히는 건 예의도 아니고, 플레이어 개인 정보 보호법에 위배되는 행위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 말해 줘.”

“아니야! 시후 건을 도와달라고 한 건 나야. 당연히 책임은 내가 져야 해.”

성실한 장남욱은 또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시후의 광림은 공격형이라고 하기에는 미묘하고 포획형에 가까운 형태인데…….”

도시후의 광림에 관한 설명을 듣자 지켜보기만 하던 황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돌변했다.

곧 은광고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가 스포츠 교류전을 치르는데 도시후도 그 이벤트에 참가할 예정이다.

그 자리에서 도시후의 광림이 악용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조의신, 너는 그 선박왕의 아들이 교류전에서 이용당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커. 내가 악당이라면 지금 도시후를 이용할 거야.”

게임 속 도시후가 죽었던 때는 4대 그룹 암투 시나리오가 전개되던 시기였다.

도시후는 주수혁을 위해 정보를 흘리며 암약하다 발각되어 죽었다.

지금 4대 그룹은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지만, 암투를 벌이는 시기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도시후가 소속된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와 은광고가, 게임 속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벤트로 엮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적이 두는 수도 바뀌었을 것이다.

“TC 그룹 내에 도시후를 죽이고 싶어 하는 친척이 있잖아. 도시후를 죽여 줘서 4대 그룹의 중역이 빚을 지게 하고, 은광고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의 주요 인물을 처리하고, 두 학교의 평가를 최악으로 떨어뜨리고, 마지막으로 이제야 교류를 시작한 두 학교 사이를 갈라놓을 수도 있으니까.”

내 설명에 장남욱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고 황지호는 곱상한 눈을 휘며 웃었다.

장남욱은 이런 악의는 상상도 못 했고, 황지호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나 보다.

“이사장 권한으로 해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말해 보도록.”

나는 몇 가지 사항을 황지호에게 전했다.

장남욱은 어리둥절해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장남욱은 내 제안에는 납득한 것 같았지만 ‘왜 저걸 지호한테 말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중인 듯했다.

설명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걸 말했다.

“백호……를 그날 그 자리에 불렀으면 해. 학생이나 교직원의 모습으로.”

“알았다.”

실수로 ‘백호군’이라고 부를 뻔했지만, 다행히 황지호는 흘려 넘긴 듯했다.

*    *    *

주말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오늘은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자, 은광고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의 첫 스포츠 교류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학생회는 1학기 때 처음 교류전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계속 시간표 조정을 준비해 왔다.

그 덕에 오늘 전교생은 오전 수업만 하게 되었다.

스포츠 교류전 관람 여부는 개인 선택이었지만, 학생회 측에서는 학교 수업이 교류전을 보러 가는 학생들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사전에 시간표를 잘 정비해 두었다.

현재 학교는 개막식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였다.

“응원 용품 나눔 합니다! 티셔츠 못 받아 가신 분!”

“야, S 사이즈 다 떨어졌어!”

“일단 이름만 써 두고 점심시간 전에 교실로 보내 줘!”

은광고 교내에서 스포츠 교류전을 하는 건 아닌데도 아침 등굣길이 떠들썩했다.

학생회와 일부 동아리에서 티셔츠, 봉, 수건 등 각종 응원 용품을 준비했고, 디바이스에는 응원가와 구호, 율동 등의 영상이 보내졌다.

벌써 응원 티셔츠를 입고 등교하는 학생들도 있었고, 응원가를 흥얼거리는 이들도 많았다.

우리 1학년 0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거 그린이가 그린 거야?”

“와…… ‘은광’이라는 글씨가 이렇게 예쁘게 보일 수도 있구나.”

민그린은 익명으로 교류전 응원 로고 응모전에 참가했는데,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교표 그림과 ‘은광’이라는 글씨를 대담한 붓놀림으로 표현한 걸작이었다.

아직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이미 종합 게시판에선 이 로고를 그린 게 민그린이라고 짐작하는 이들이 많았다.

민그린은 반 아이들 몫의 응원 수건을 직접 받아 와 하나씩 나눠 줬다.

수건을 받아 든 아이들은 홀로그램을 전개하고 관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행되는 경기가 있어서 어느 쪽에 가야 할지 고민돼요…… 핸드볼이랑 배구 1차전이 겹쳐요!”

“음, 나중에 다시 보기로 보면 되지 않을까?”

“현장에서 보는 거랑 녹화본을 보는 거랑 달라! 봐, 종목별로 응원 구호도 조금씩 다르잖아.”

들뜬 반 아이들이 경기 일정표를 보며 어디부터 보러 갈지 상담하고 있을 때, 응원 용품을 한 박스 들고 온 목우람이 등장했다.

“그래도 개막식 첫날, 첫 경기는 다른 경기랑 안 겹칩니다! 레나 님과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우람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거 어디서 났어!”

또 목우람이 호구를 잡혀 빚을 내고 저 응원 도구를 개인적으로 사들인 게 아닌가, 처음에 다들 의심했다.

다행히 지익회의 박승현이 목우람이 호구를 잡히기 전에 미리 응원 도구를 챙겨 준 것으로 판명되었다.

평화로운 광경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예상외의 일이 생기더라도 침착하게 대응하자.’

오늘 오후.

개막식과 첫 경기가 열릴 예정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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