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74화 (274/925)

49. 스포츠 교류전 (4)

황명호 대저택의 아침.

늘 이 시간에는 은호의 후예들로 인해 떠들썩했지만, 그들은 오늘 일찍 방으로 돌아갔기에 매우 조용했다.

10개월 터울 동갑인 첫째 은서호와 둘째 은이호는 최근 입시 공부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올해 은광고 입학식 영상 속에서 나란히 단상 위에 서서 신입생 선서를 한 주수혁과 안다인의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자신들도 만점을 받아 같이 단상에 서겠다며 게임도 끊은 상태였다.

막내 은재호는 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산령이나 신수와 놀려 했으나 산령은 묘하게 기가 죽어 있었고 신수는 끙끙거리며 백호를 따라다니기 바빴다.

은재호가 섭섭해하다가 혼자 게임을 하러 간 사이에도 신수는 백호의 바짓자락을 물거나 팔로 툭툭 치면서 뭔가를 호소했다.

왕, 왕!

“안 된다. 너를 데려갈 생각은 없다.”

왕왕!

“네 전력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네 힘을 많이 되찾은 걸 안다.”

신수의 훈련을 담당했던 백호가 담담하게 말하자 신수가 기대에 찬 눈을 하며 꼬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진 백호의 말이 신수의 기대를 산산이 부쉈다.

“조의신 앞에서 네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는 한 데려갈 수 없다. 지금 그 모습으로는 그의 집중력을 흩트릴 뿐이다.”

끄으응…….

조의신이 언급되자 한참을 조르던 신수가 포기하고 꼬리를 말았다.

신수는 여전히 본모습을 조의신에게 보이는 것을 꺼렸다.

“하하하! 어제까지 조의신에게 그리 매몰차게 굴더니, 지금에서야 후회하는 것이냐.”

이른 식사를 마치고 갓 수확한 홍로로 만든 시나몬 애플 티를 마시며 모닝 티타임을 갖던 황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크르르……!

“하하하하!”

신수가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지만 황호는 그저 처웃을 뿐이었다.

1학년 0반 소속의 황지호로서 첫 실습을 마치고 줄곧 기분이 나빠 보였던 황호는 주말 사이에 기분을 푼 듯 간혹 이렇게 처웃게 되었다.

신수가 막내 은재호의 방으로 가 버릴 때까지 신나게 웃던 황호가 웃음을 뚝 그쳤다.

그 대신 현관문 쪽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라, 적호. 조사는 마쳤나?”

황호의 시선 끝에서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다 잘게 흩어졌다.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자 적호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결과를 보고하도록.”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조의신이 가정 폭력이나 학교 폭력에 노출된 이력은 전무합니다. ‘고통에 익숙해질 만큼’ 장기간 폭력에 시달렸을 가능성은 0에 가깝습니다.”

“진족이나 에너미와 엮였을 가능성은 없나?”

“없습니다.”

황호가 들고 있던 다기를 다기 받침에 올리고 생각에 잠겼다.

“스포츠 계열의 동아리에 가입하거나 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고 했지.”

“네.”

“의료 기록도 깨끗하고 지금 몸에도 이상이 없다고 아케아의 사제와 향록이 단언했으니 질병과는 관계가 없을 거고…….”

“그냥 타고난 게 아닐까요?”

적호의 말에 황호가 고개를 저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에 둔감한 이들은 존재하지만, 고통에 익숙한 이들은 없어. 향록은 조의신의 통각 기능이 정상이라고 했다. 그는 팔이 잘릴 뻔하고도 상당히 안정되어 있었어. 고통에 익숙한 것처럼.”

“……팔이 잘릴 뻔했습니까?”

“그래. 상보심금파의 갈래로 몸이 꿰뚫리고 자루를 붙잡은 것부터 뭔가 마음에 걸렸다. 갈래에 꿰뚫려 본 너라면 알겠지.”

“그땐 그가 가진 광림의 효과 중 하나가 유효하게 발동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조의신은 첫 실습 날 재생 이능을 사용하지 않았다. 자상과 창상…… 아니, 절단상에 가깝나. 회복 아이템으로 거의 잘렸던 팔을 붙인 흔적이 있다.”

황호의 말에 적호가 저강렵의 갈래에 꿰뚫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상보심금파의 날이 곧게 펴져 몸을 관통한 순간, 몸의 모든 장기와 핏줄, 세포를 하나하나 파괴하는 듯한 고통이 몰아쳤었다.

최전선에서 전장을 누비고 최후에는 붉은 형틀에 묶인 적호조차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설마 그가 사용한 이능은 고통의 경감과는 관계가 없던 건가.’

적호가 아연실색하고 있자 황호가 무표정으로 말했다.

“‘성헌’이라는 단어에 이어 풀어야 할 비밀이 하나 더 늘었군.”

황호는 적호에게서 눈을 돌려 백호를 바라봤다.

백호는 평소와 다른 차림새를 했지만, 평소대로 서늘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백호, 너는 짐작 가는 바가 있나?”

“…….”

백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한 번 더 답을 독촉하기 위해 황호가 입을 열려 했으나 그 전에 적호가 대화를 끊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같은 반, 동아리 소속이라면 과거의 행적을 조사한 것보다 많은 걸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적호의 말에 일리가 있어 황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정리한 끝에 입을 열었다.

“어떻게 고통에 익숙해졌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그는 첫 실습이 끝나고 사관학교 생도를 불러 벽사 행위까지 마쳤다.

피곤할 텐데 내색하지도 않고 다음 날 스포츠 교류전에 사용될 시설 전체를 돌아보고 계획을 세웠다.

영약은 몸의 피로를 덜어 주나 정신적인 피로는 덜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피로를 무시하고 계속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래도 ‘왜’ 고통을 감내하는지는 짐작이 간다.”

황호가 말을 마치며 은광고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    *    *

오후, 수업이 끝나자 반 아이들과 함께 개막식이 열리는 은광 스타디움으로 걸어서 이동했다.

학교에서 스타디움까지는 도보로 약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셔틀도 운행하고 있었으나 아이들 다수의 의견에 따라 걸어서 가기로 했다.

송대석은 협회 일로 바쁘기도 하고 걸어서 이동하는 게 귀찮은지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러나 송대석은 저번 첫 실습 때 ‘김+밥’ 사건을 저지른 후 여전히 민그린과 화해하지 못한 상태라 결국 입을 다물고 민그린의 뒤에서 걷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과 어울려 이동할 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사월세음과 권레나 사이가 어색해 보이네. 권레나가 일방적으로 피하는 것 같은데.’

사월세음은 모난 구석이 없어서 아이들과 두루두루 친한 편이다.

요즘엔 권레나와 잘 어울렸는데, 비슷한 시기에 등교를 시작하고 힘을 합쳐 한이와 싸운 사건으로 더 친해졌다.

첫 실습에서도 둘이 같이 떨어지며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 그렇구나.’

첫 실습까지 생각이 미치니, 홍룡을 보고 탄식하던 권레나가 떠올랐다.

사월세음은 ‘그 단어’에 관심이 많으니 그 자리에서 홍룡을 발견하고 권레나가 취한 리액션을 놓치지 않았을 거다.

‘이 건은 잘못 개입하면 더 상황이 어색해지겠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사이가 벌어질지도 모르는데 해결 방법이 바로 떠오르지 않다니……!

무력감에 젖어 있는 사이에 스타디움에 도착했다.

“와……! 가판대가 엄청 많아요! 이거 다 응원 용품이죠?”

착한 사월세음은 권레나가 자신을 피한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들떠서 여기저기를 가리켰다.

가판대에는 응원 문구가 적힌 머리띠와 티셔츠, 응원 막대, 응원용 메가폰, 응원 수술 등이 놓여 있었다.

하나 같이 은광고와 사관학교의 인장이 찍혀 있었는데, 학생회 측에서 배부하거나 학생들이 직접 만든 것에 비해 퀄리티가 떨어졌다.

‘잡상인이 이렇게 많이 몰려들다니!’

재학생들은 학교나 학생회를 통해 응원 용품을 배부받지만, 외부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잡상인들은 오늘 개막식에 그런 이들이 몰려들 걸 예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가판대 근처에는 은광고 졸업생과 고등학교 입시를 앞둬 행운의 아이템 삼아 은광고 로고가 박힌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이들, 혹은 순수한 은광고 팬들이 넘쳐 났다.

“전부 멋지군요. 필히 오늘을 기념하여 소장하고 싶습니다.”

“어, 이거 괜찮네. 이능파 넣으면 빛나는 거 아니야?”

“아니요! 이거 건전지로 돌아가는 거예요. 구형 타입이긴 한데 갖고 싶어요.”

“우람아, 그거 다 네가 들고 있는 박스 안에 있어. 잘 보고 사…… 아니, 그냥 사지 마! 세음아, 효돈아! 응원 도구는 우람이가 가져온 상자에 다 있으니까 안 사도 돼!”

1학년 0반 공식 호구 목우람, 예비 호구 후보로 꼽히는 맹효돈과 사월세음 둘을 말리기 위해 김유리가 분주히 움직였다.

호구들은 김유리와 박스를 개봉해 각종 응원 도구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 무장한 후에야 구매 의욕이 조금 가신 듯했다.

“허가한 기억이 없는데. 겁도 없군.”

황지호는 가판대 위에 놓인 조악한 응원 물품들을 보고 이를 갈았다.

“축제 첫날이니 오늘은 봐주지. 내일부터는 가만두지 않겠다. 오늘 잡상인들이 얻은 금전적 이득도 내일부터 회수에 들어가야겠군.”

학교 이사장의 살벌한 선언을 들으며 은광 스타디움 안으로 입장했다.

스타디움 안에 늘어선 전체 줄은 길었지만, 재학생을 비롯한 학교 관계자는 전용 출입구로 빠른 입장이 가능해 금방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1학년 0반이 배정받은 좌석은 입구에서도 가깝고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도 없었다.

‘여기에서 같이 볼 수 없다는 게 아쉽네.’

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은광고 학생회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생도회에서 배부한 팸플릿을 보며 아이들과 한참을 대화하다 보니 개막 시간까지 앞으로 30분이 남았다.

나와 황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올게.”

내 목에는 ‘PRESS’라고 쓰인 신분증이 걸려 있었다.

신문부는 이번 스포츠 교류전 취재에 참가할 부원을 사전에 뽑아 놨지만 나와 황지호가 뒤늦게 지원하니 마침 일손이 부족했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나와 황지호는 스타디움을 돌며 사진을 찍고 관중들의 인터뷰를 둘 이상 따올 것을 명받았다.

“……아, 너랑 황지호는 신문부 취재가 있다고 했지. 스타디움의 사진을 찍는다고 했나?”

나의 말에 한이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녀오마. 일을 마치면 돌아올 테니 자리를 잘 지키고 있도록.”

“…….”

황지호의 말에 한이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워 버렸다.

*    *    *

황지호와 헤어져 이동하고 있을 때.

의외의 조합을 발견했다.

‘임연화랑 홍경복 화백이잖아.’

둘 다 교사긴 하지만 접점이 없어 보였는데, 두 사람은 꽤 친한 건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은신 스킬은 쓰지 않았지만 발소리를 죽이고 기둥 뒤로 걷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금방 나를 발견했다.

“취재 중이구나. 수고가 많구먼.”

“음! 우리 반 아이가 아니네.”

홍경복 화백은 사람 좋게 웃으며 격려했고 임연화는 뜻 모를 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3학년 선배들하고 무슨 일이 있나요?”

“내 귀여운 제자들이 스포츠 교류전을 기다리는 게 힘든지 나한테 놀아 달라고 하더라! 지금 숨바꼭질하는 중이야.”

이 인간들은 여기까지 와서 대체 뭘 하는 걸까.

“숨바꼭질이요?”

내 질문에 임연화가 밝은 얼굴로 룰을 설명해 줬다.

“개막식까지 내가 애들 다 찾으면 승리. 지는 쪽은 스타디움을 오리걸음으로 한 바퀴 돌기로 했어. 여기 돌고 나면 애들 단련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받아들였지!”

개막식까지 30분 좀 안 되게 남았는데 그 시간 안에 3학년 0반 선배놈들을 다 찾을 수 있을까?

여기에서 여유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임연화는 자애롭고도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남을 것 같아서 한 10분 남았을 때부터 찾으러 가려고. 그래야 애들도 더 오래 숨는 맛, 쪼는 맛을 느낄 거 아니야.”

오늘도 여지없이 척 보기에 임연화에게 불리한 룰이었지만, 그녀는 질 가능성은 생각도 안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강한 담임과 3학년 0반 선배놈들은 오늘도 매우 사이좋게 지내는 모양이다.

강한 담임이 일방적으로 친하고 귀엽게 여기는 거 같긴 하지만.

“저 아이들은…….”

홍경복 화백의 시선이 내 뒤쪽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니 군사관학교 정복을 갖춰 입은 학생들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몇 명 섞여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