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75화 (275/925)

49. 스포츠 교류전 (5)

군사관학교 정복을 입고 정모까지 착용하니 인상이 상당히 달라 보였지만,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기에 곧바로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장남욱이랑 도시후 잡으러 왔던 놈들이잖아.’

홍경복 화백의 거처가 있던 홍천 가리산.

이들은 그곳에 대형 틸트로터를 타고 등장해 줄 서서 도시후를 패던 빡빡이들이었다.

그날 가리산에 있던 사관학교 생도 중, 장남욱과 도시후를 제외한 전원이 있는 듯했다.

‘인사라도 해야지.’

경황이 없어 많은 대화는 하지 못했지만 그날 통성명은 한 사이다.

인사를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

사관학교 생도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무섭게 군화가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그들은 우르르 이쪽을 향해 달려와 우리 앞에 섰다.

줄을 맞춰 선 사관생도들이 각을 잡고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거수경례를 했다.

거수경례의 대상은 홍경복 화백이었다.

“파(破)! 적(敵)!”

사관생도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플레이어 소속 부대가 사용하는 경례 구호, ‘적을 부수고 무찌른다’는 의미의 ‘파적(破敵)’을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은 보통 경례 구호로 ‘충성’, ‘필승’을 사용하지만 지휘관 재량, 혹은 전통에 의거해 부대에 따라 ‘단결’, ‘백골’, ‘돌격’, ‘극기’ 등의 다양한 경례 구호를 사용했다.

군에 소속한 플레이어의 최대 목표는 ‘적’, 에너미를 격퇴해 국토를 수호하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구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 경례 구호가 파적으로 굳어졌을 시점엔 ‘에너미’라는 명칭이 일반화됐을 시점인가?’

이계의 틈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존재가 등장했을 때, 명칭이 통일될 때까지는 오래 걸렸다.

에너미, 몬스터, 어나더, 변형체 등등 제각기 다양한 명칭으로 에너미를 칭했다.

처음에는 괴물, 몬스터를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으나 결국 전세계적으로 ‘에너미(ENEMY)’라는 단어를 채택하게 되었다.

에너미 중에서는 인간에 가까운 모습을 하거나 예술품보다 아름다운 형태를 한 존재도 있었다.

저 이계의 존재를 ‘기이하고 괴상하게 생긴 물체’라는 뜻의 ‘괴물’이라는 단어로 인식하게 되면 편견을 갖게 되어 아름답거나 인간형을 한 적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리라는 것이 정부와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국립국어원이 한때 언어 순화 운동의 일환으로 ‘에너미’라는 외래어 대신 ‘외적(外敵)’이라는 단어로 순화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했지.’

‘리메이크’를 ‘원작재구성’으로, 해피엔딩을 ‘행복결말’로 순화하려다 실패한 것처럼 ‘에너미’라는 단어의 순화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개천신화 속, 신성한 범들과 싸운 한반도를 침략한 인간도 짐승도 아닌 존재들을 가리키는 단어인 ‘외적’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이미 사람들이 에너미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개천신화 속에 등장한 외적과 이계의 틈에서 나타난 에너미는 별개의 존재였으니, 순화에 실패한 게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파적.”

홍경복 화백과 임연화가 사관생도보다 더 날렵한 자세로 거수경례에 응했다.

홍경복 화백은 군에 자원입대한 경험이 있었고 임연화는 사관학교 고등부를 졸업한 선배였으니 그 경력이 어디 가지 않은 모양이다.

홍경복 화백이 손을 내리자 뒤를 이어 사관생도들도 차렷 자세를 했다.

가리산에서 도시후를 패던 생도들을 기억하고 있던 건지 홍경복 화백이 생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다 물었다.

“그래, 그때 그 아이들이구나. 그런데 시후랑 남욱이는 어디 있나?”

“남욱이는 저희 기수 응원단장으로 차출되어 군악대와 함께 입장할 예정입니다. 시후는 선수단 소속입니다. 선수들은 따로 입장한다고 들었습니다.”

사관생도의 대답에 홍경복 화백이 사람 좋게 웃다가 덕담을 건넸다.

덕담을 전부 들은 후, 사관생도들이 일제히 감사 인사를 했다.

“그때는 신세 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홍경복 화백이 차를 대접한 것만 갖고 저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사를 하는 건 가리산에서 차를 마신 생도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도시후 사건으로 장남욱이 징계실로 끌려갔던 건 때문이구나.’

그때 홍경복 화백께서 3스타를 소환해 장남욱을 구출했는데 그 사건 덕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건 임연화 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캐묻지 않고 적당히 못 들은 척하고 있었다.

화백과 대화를 마치자 사관생도 중 몇몇이 임연화에게도 직접 인사를 하고 말을 건넸는데, ‘강한 생도’라는 단어가 언뜻 들렸다.

현재 강한 담임으로 진화한 강한 생도 임연화 전설은 아직도 사관생도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임연화 정도의 실력자라면 군에서 놔주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사고라도 친 건가?’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 소속 생도는 준군인 취급을 받고 무사히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바로 임관하게 된다.

보통 성인이 되어 사관학교에 입학해 20대 초중반에 임관하는 다른 군과 차별된 점이었다.

이계와 에너미의 위협에 시달리던 정부가 내세운 파격적인 조치를 두고 당시에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임관한 플레이어들이 셀 수 없이 죽어 나간 데다가 살아남은 플레이어들이 보인 활약을 고려하면 트집을 잡기 어려웠다.

특히 군사관학교 초기 기수들, 1에서 9기까지의 졸업생들의 활약은 대하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였다.

학창 시절이 괴롭고 임무도 위험하다고는 하나 최상위의 성적으로 졸업한 사관학교 고등부 학생들에겐 출셋길이 열린다.

그러나 수석으로 입학하고 졸업한 임연화는 그 출셋길을 걷어찬 후, 사문화되었다고 취급받는 의무 복무 기간만을 채운 채 은광고의 교사가 되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나눈 후, 나는 먼저 자리를 떴다.

임연화의 비화도 신경 쓰였지만 지금 당장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주 경기장만 2만 제곱미터가 넘는 은광 스타디움에서 이능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늘을 골라 걷는 척, 눈에 띄지 않게 통로를 걷고 편의 시설과 홍보관을 지나가니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여기가 중앙 통제실이구나.’

은광 스타디움 시설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앙 통제실.

이곳은 스타디움의 주 전광판과 보조 전광판을 관리하고 영상 송출과 안내 방송을 담당했다.

유리창 너머로 스타디움 곳곳을 비추는 홀로그램들과 우리 학교 방송부원들과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공보정훈실 소속 군인인 듯한 인물이 한 명 보였다.

내가 문 근처로 다가가자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스타디움 관리 스태프가 말을 걸었다.

“여긴 일반 학생은 출입 금지예요.”

상대는 친절하게 말을 걸었지만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등골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스태프가 아니야……!’

지난 주말, 나는 이번 행사에 관여하는 모든 스태프의 명단을 입수해 이름과 얼굴을 외웠다.

현장 관리 요원, 경호원, 방송 스태프, 청소 용역 업체 직원 등등 하루만 일하는 계약직 직원까지 빠짐없이.

그리고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자는 어디에도 등록되지 않은 자였다.

그럼에도 중앙 통제실에서 스태프 명찰을 달고 뻔뻔하게 일하고 있었다.

‘관객으로 잠입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대담해. 정보 조작 능력에도 자신이 있나?’

아무리 보안에 신경 쓴다고 해도 학생들이 자주적으로 주최하는 첫 행사, 그것도 이 정도로 규모가 큰 이벤트에서 마족의 잠입을 막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 확증은 없었지만, 이자는 이번에 도시후를 조종해 일을 벌일 아바리티아의 사제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마족이라 짐작되는 존재를 향해 태연하게 스태프 목걸이를 고쳐서 착용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은광고 신문부 소속 조의신입니다.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전에 얘기가 안 됐으면 진행하기 어려워요. 얘기는 전해 두겠습니다. 개막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중에 다시 오시겠어요?”

아무리 봐도 정중하고 일도 잘하는 평범한 스태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게임에서도 무슨 마족이 사람보다 사람 흉내를 잘 내냐면서 욕을 먹었다.

플마고에는 종족은 인간인데 대놓고 인간 같지도 않은 놈들이 많아 더 그런 얘기가 많이 나왔다.

‘이 마족이 뿌린 씨앗 때문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제갈재걸이 죽은 계기를 생각하니 이가 갈렸지만 지금 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저 마족이 평범한 인간을 흉내 낸 것처럼 나도 착한 학생 시늉을 내기로 했다.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개막식이 시작하기 전에 주요 시설을 다 돌아봐야 했다.

‘운 좋게 한방에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어디 있는지는 파악했어. 둘 이상의 마족이 개입할 가능성은 적지만 일단 다른 곳도 돌아봐야겠지. 그 전에 황지호에게 연락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을…….’

등을 돌려 선수용 출입구와 대기실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통로에서 황지호에게 디바이스로 메시지를 보내고 또 수신한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였다.

“의신아, 안녕. 취재 중이야?”

상대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였다.

“안녕하세요, 지금 사진 찍으러 가는 중이에요.”

“그래? ……많이 바빠?”

디바이스 화면을 끄고 내가 인사하자 상대가 주저하면서 물었다.

염준열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염준열 선배님……?”

염준열은 촬영이라도 있는지 전부 머리카락을 넘기고 교복이 아닌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기 위해 둘러보는 단순한 몸짓이 화보를 찍는 모델이 준비운동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염준열이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혼자 오다니. ‘기척 죽이기’가 많이 는 건가?’

스승으로서 조금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염준열은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깐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제자의 성장에 뿌듯해하고 있을 때, 마족의 등장 못지않게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적벽괴도라고 알아?”

왜 지금 ‘그 단어’가 나오는 것인가.

*    *    *

플레이어 군대는 원활한 임무 수행을 위해 전국 곳곳에 연수원을 두고 있었다.

국경처럼 정해진 곳을 방어하는 게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이계와 에너미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은광구에도 연수원을 두고 있어 이번 교류전에 대비해 주말 동안 사관학교 대표 선수단은 은광구의 연수원에 머물렀다.

개막식을 몇 시간 앞둔 시간, 도시후는 연수원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지? 아, 연수원이지…….’

도시후는 최근 기억이 끊기는 일이 잦았다.

검사 결과는 늘 정상이었지만, 도시후는 제 어딘가가 망가진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능파가 제어가 안 되거나, 이능을 잔뜩 사용한 것처럼 속이 텅 빈듯한 느낌이 들 때가 늘어 그런 의심을 부추겼다.

‘아빠한테 부탁해서라도 따로 검진을 받을걸.’

현재 도시후의 신분상 상급자의 허락 없이 일반 병원에서 진단을 받기 어려웠다.

사관학교 영역 밖에서 급환으로 쓰러져서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모를까.

도시후는 스포츠 교류전이 끝나면 바로 집에 연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시후야, 괜찮아?”

기수장이자 응원단 대표로 연수원에 함께 합숙하게 된 장남욱이 말을 걸었다.

이상한 잠버릇이 발동해 옥상에서 떨어질 뻔한 이후로 장남욱은 자주 이렇게 도시후를 걱정하곤 했다.

그 외에도 사고가 조금 잦아진 탓도 있을 것이다.

장남욱의 걱정을 덜기 위해 도시후는 허세를 부렸다.

“당연하지, 난 괜찮아!”

나름 혈색도 가다듬고 목소리 관리도 잘한 것 같은데, 장남욱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장남욱의 안경 너머로 별빛 같은 게 흔들리다 사라진 것 같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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