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스포츠 교류전 (6)
칠판 크기로 확장된 홀로그램 위로 은광고등학교의 본관, 은휘관이 비춰지고 있었다.
은휘관을 지탱하는 황금의 기둥과 벽을 덮은 유리창에 반사된 햇빛 덕에 건물이 빛을 뿜는 것 같았다.
은광고의 중심을 지키고 있는 이 은휘관은 현재 테러가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왕찬아, 이사장 있는 거 맞지?”
“어. 아까 교무실에서 학생부장 쌤이 서류 올려서 비서가 옮기는 거 봄.”
“봉투에 찍힌 직인 확인했어?”
“두 번 확인함. 그거 이사장한테 직통으로 가는 거 맞다.”
2학년 0반 교실.
2학년 0반 일당들은 전자 칠판 위에 떠 있는 은휘관을 원수 보듯이 바라봤다.
그들의 손에는 각종 음향 장비와 케이블, 공구, 알람 시계들이 들려 있었다.
“우퍼 팀 최대 기록이 몇 초였지?”
“90초 정도였나? 비서가 자리 비운 사이에 세팅 끝낼 수 있어.”
“알람 시계 팀은?”
“은휘관 지도 다 확인했어. 찾기 힘들고 소리가 잘 울리는 장소에 숨겨 둘 거야.”
연극부 에이스 연가람이 금찬솔의 질문에 생긋 웃으며 답했다.
곱게 웃고 있었으나 손에 든 가방 안에 알람 시계가 수십 개가 들어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이사장실 주변에 우퍼와 시계를 심어 고통스럽고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이었다.
“제갈 쌤을 혹사시키는 이사장에게 지옥을 들려주자!”
“들려주자!”
결연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며 결속을 다진 금찬솔이 왕찬솔에게 지시했다.
“은신 아이템은 챙겨 왔지? 얼른 나눠 줘.”
“어! 봐, 다 가져왔어!”
“……애들 수에 맞춰서 가져 왔어? 좀 부족해 보이는데.”
“세 봐! 자, 딱 맞지!”
왕찬솔이 펼쳐 든 아이템 카드의 수를 세던 금찬솔이 버럭 소리 질렀다.
“하나 모자라잖아, 등신아!”
“뭔 소리야?”
“저 등신은 제 몫은 안 센 듯.”
“어? ……아!”
반 아이가 한 지적에 왕찬솔이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지만 이미 늦었다.
반 아이들은 왕찬솔의 손에서 아이템 카드를 한 장씩 빼 갔고 결국 그의 손은 텅텅 비게 되었다.
“……나 은신 아이템도 없이 이사장한테 쳐들어가야 해?”
“응, 파이팅.”
연가람의 영혼 없는 응원 뒤로 금찬솔의 지시가 이어졌다.
“지금부터 이사장을 공격한다. 이제 조용히 이동해야 해. 은휘관으로 출…….”
“안 돼요.”
그러나 예고 없이 2학년 0반 교실 문이 열리고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교실 문 사이로 등장한 건 한없이 무해한 인상의 교사였다.
그 교사를 본 금찬솔이 경악했다.
“억!”
이 학교에는 무력으로 절대 개길 수 없는 교사가 몇몇 존재했다.
대표적인 교사들이 각 학년의 0반 담임을 맡는 중인 함근형, 제갈재걸, 임연화 그리고 현재 1학년 0반 부담임인 용족 용제건이었다.
그래도 0반 담임들은 부장직을 맡고 있어 몹시 바빴고, 용제건은 은광고 안이라면 힘의 제약이 있는 데다 웬만하면 같이 장난질에 어울려 줬기 때문에 위험도가 낮았다.
그러나 친절하며 성정도 부드러우나, 무력도 통하지 않고 선을 넘은 장난질은 칼 같이 잘라 내는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가 바로 지금 등장한 언령 스킬 사용자, 정음(正音) 공청훤이었다.
“야, 귀 막고 튀어!”
“늦었어요.”
그들이 회의에 열중한 사이에 공청훤의 이능파는 교실을 장악한 상태였다.
등장한 순간부터 임전 태세인 공청훤에게 허를 찔린 2학년 0반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능파를 타고 낭랑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쉬고 계세요.]
‘언령’의 발동에 방어가 늦었던 2학년 0반 아이 중 절반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귀를 막고 도망치던 금찬솔이 반 아이들이 전투 불능이 된 걸 보고 도주를 멈췄다.
반 아이들을 버리고 갈 생각이 없는 듯 지시를 바꿨다.
“……얘들아, 공격해!”
“공겨어억!”
금찬솔과 왕찬솔의 지시에 반 아이들이 공청훤에게 돌격했으나 차례차례 태호권에 쓰러졌다.
그뿐만 아니라 조금만 이능파가 흐트러지면 공청훤의 음성이 언령으로 변해 귀를 파고들어 학생을 무력화시켰다.
무력화된 척 연기하다가 공청훤을 기습하려던 연가람이 제압당하니 교실에 서 있는 건 금찬솔과 왕찬솔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금찬솔과 왕찬솔은 서로 곁눈질을 하다가 항복하겠다는 의미로 손을 들었다.
이대로 가면 전멸인데, 그들이 기절하기라도 하면 협상의 여지도 없어졌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럼 교무실에 계신 교무부장 선생님을 뵈러 가죠.”
공청훤의 가차 없는 선언에 금찬솔과 왕찬솔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우리 제갈 쌤한테 이르는 건 좀 봐줘욧!”
“공청훤 선생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공청훤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안 봐줄 거예요.”
공청훤은 황명호 이사장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금찬솔과 왕찬솔이 재력이나 인맥으로 봤을 때 어딜 봐도 꿀리지 않았지만, 상대는 강력한 진족일 가능성이 컸다.
다른 교사라면 모를까, 이사장 습격이라니.
제갈재걸에게 말해 따끔하게 혼낼 필요가 있었다.
“원래 저희랑 제갈 쌤 개회식 보러 가기로 했는데요, 갑자기 이사장이 일 떠넘겨서 좀 쓴맛을 보여 주려고 한 거예요!”
“왜 얌전히 살다가 갑자기 일을 시키는 건지.”
“안 그래도 일 많이 하시는데!”
2학년 0반 학생들이 변명을 늘어놨지만 공청훤을 고개를 저었다.
언령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제갈재걸 앞으로 데려간다는 말에 2학년 0반이 격렬하게 다시 저항하기 시작해 결국 힘으로 제압하고 제갈재걸을 부르게 되었다.
제갈재걸을 기다리는 사이, 눈물 연기로 낚으려다 실패한 연가람이 울컥한 얼굴로 물었다.
“……개회식 안 보러 가세요?”
“행정 업무를 봐야 해요.”
사실 공청훤도 갑자기 황명호 이사장이 던진 업무 탓에 개회식에 불참하게 되었다.
업무는 일찍 마친 김에 산책 겸 학교 순찰을 돌다가 2학년 0반의 작당질을 발견한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상해. 업무 중요도도 낮았지. 마치 학교에 붙잡아 두기 위해 준 업무 같아.’
황명호 이사장이 기분파라는 건 잘 알고 있었으나, 저번에 면담한 이후 묘하게 공청훤을 배려하던 것에 반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교무부장 선생님도 갑자기 이사장님께 업무 지시를 받았다고?’
공청훤과 제갈재걸 사이에 접점이 없었다.
그러나 공통점은 하나 있었다.
두 사람은 언령 스킬 사용자였다.
* * *
‘그 단어’가 나온 이상 철저하게 대비해야 했다.
어설프게 대답하면 의심을 살 가능성이 컸다.
“네, 알고 있어요. 신문부에서 기사 주제로도 다뤘으니까요.”
“……그랬지.”
염준열이 태연한 척 가장한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저번 플레이리스트 데스 매치에서 미로의 버스킹 영상을 찍을 때 은신 능력을 사용했다고 들었어. 네 능력을 너희 반 아이들이 간파하지 못했다는 것도.”
그 말을 들으니 왜 염준열이 ‘그 단어’를 사용했는지 알 것 같았다.
구교사에서 염준열과 수업을 마칠 때와 촬영할 때 모두 전무영의 능력을 사용했었다.
독고미로의 뛰어난 기척 감지 능력을 고려하면 보통 은신 능력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거다.
그리고 염준열의 말에 의하면 우리 반 신화계 호랑이가 내 은신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는 것도 전해 들은 것 같았다.
“그 능력은 혹시…….”
염준열은 말을 하면서도 고민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배운 거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안심하여 마음을 풀었다.
너무 안심한 티가 나지 않게 바로 말을 이었다.
“아니요. 누구에게 배우진 않았어요.”
나는 내 제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전무영이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사용 가능했을 때에는 플마고 콘크리트 층은 붕괴되었고, 염준열의 사망으로 유입된 소수의 신규 유저들도 다 떨어져 나간 시점이었다.
즉, 공략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이들도 없었고 최신 콘텐츠를 플레이하는 썩고 고인 물은 나 외에 보이지 않았다.
전무영을 육성할 땐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 힘으로 키웠다.
한편, 내 말에 염준열의 얼굴이 확 폈다.
“의신이 너한테 은신술을 가르친 스승은 없는 거지?”
“네.”
“그렇구나……! 갑자기 붙잡아서 미안해.”
서로 안심한 얼굴로 마주 봤다.
각자 왜 상대가 안심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지만 어쨌든 내 마음도 편하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걱정을 떨친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학생회 업무로 오셨나요?”
“아니, 음…… 곧 알게 될 거야.”
염준열은 말을 아꼈다.
그래도 왜 염준열이 이 자리에 있는지는 금방 이해했다.
염준열의 완벽한 차림새.
학생회와 관련이 없는 일.
두 가지만 봐도 연상이 되었다.
‘플레이리스트 촬영 때문이구나.’
내 성실한 제자는 엠바고 원칙을 지킬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그럼 가 볼게. 취재 힘내. 아,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어렵지만, 스포츠 교류전을 본 소감에 관한 인터뷰라면 응할 수 있어.”
무려 염준열의 인터뷰를 따냈다.
문새론을 비롯한 신문부원이 환호하는 모습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나중에 디바이스 메신저를 통해 간단한 소감문을 받기로 하고 염준열과 헤어져 목적지로 향했다.
* * *
은광 스타디움, 중앙 통제실.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화면을 통해 관중석을 확인했다.
개막식까지 앞으로 10분.
모든 관객들이 입장을 마치고 원활한 행사 진행을 위해 출입문이 닫혔다.
입장을 돕던 스태프들이 철수했다는 보고를 들은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일반인과 학생 스태프들이 바삐 문을 오가고 있어 자리를 뜨는 이자를 주목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문이 닫히기 전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제 돔을 닫으면 되는 건가.”
“네? 돔을 닫아요? 저번 리허설에는 딱히 그런 지시는 없었는데…….”
“봐, 여기 볼드체로 지시문이 있잖아.”
“어, 진짜네…….”
지시문을 늦게 확인한 방송부 학생이 수선을 부리는 사이, 시설 관리 스태프가 돔의 개폐 버튼을 눌렀다.
쿠구구궁……!
스타디움의 지붕이 닫히기 시작하고, 경기장의 하늘이 서서히 가려졌다.
* * *
쿠구구궁……!
돔이 닫히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을 것 같은데.’
염준열과 마주쳐 대화를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체되긴 했지만, 예정대로 약속한 장소에 도달했다.
‘고장’이라는 팻말을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만나기로 약속한 상대가 보였다.
“왔군.”
이곳은 은광 스타디움 주 경기장으로 이어지는 여러 통로 중, 선수단이 사용할 예정인 중앙 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구 근처의 대기실이었다.
현재 개막식을 앞두고 비어 있는 대기실은 몇 없었지만, 이 대기실은 주말 공조 시설과 통신 시설이 고장 났다는 이유로 폐쇄되어 사람이 없었다.
공조 시설은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이 공간의 통신 시설은 완전히 먹통이 된 상태였다.
“준비됐어?”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은광고 춘추복을 입은 백호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는 성인 버전에 사복을 입은 모습만 봐서 그런지 조금 낯설었지만, 역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은광고 교복을 아주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럼 간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무수히 떠오른 카드 중, 나는 미리 염두에 둔 캐릭터를 고르고 광림 발동을 준비했다.
쿠우웅!
광림 발동을 마쳤을 때, 돔이 완전히 닫혀 은광 스타디움이 외부와 차단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