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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279화 (279/925)

49. 스포츠 교류전 (9)

먼 옛날, 적호와 웅녀가 맺어지고 호족과 웅족이 힘을 모아 외적에 대항했을 때.

천신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나 신성한 범들은 아직 신화적 존재가 아니었으며 외적은 강하고 교활했다.

외적은 꾀를 부려 신인, 호족과 웅족의 우두머리를 노렸다.

그 결과 신인과 은호를 지키던 청호가 수많은 제자를 잃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으며 웅족의 수장은 전사했다.

웅족과 호족이 수장과 정예를 잃은 틈을 타 외적은 삿된 어둠으로 한반도의 하늘을 덮었고, 그 결과 열린 하늘 사이로 내려오던 천신의 목소리가 단절되었다.

그 외적들이 부른 삿된 어둠을 갈라내고 다시 천신의 은총을 되찾은 게 백호였다.

“아…… 그래서 지금 저 학생은 하얀 호랑이 가면을 쓴 것입니까?”

“응! 개천신화에 기록된 벽사 행위는 ‘백호’가 한 거니까. 개천신화 속의 벽사 행위를 검무로 재현할 때는 백호 가면을 쓰는 게 원칙이야.”

목우람의 질문에 김유리가 답했다.

1학년 0반 학생 중에선 개천신화에 관해 잘 모르는 이들이 많아 김유리가 짧게 외적이 부른 어둠과 백호의 벽사에 관해 설명했다.

김유리가 알고 있는 개천신화 속에선 적호와 웅녀의 열애도, 웅족도, 은호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백호가 한 벽사를 설명하기엔 충분했다.

“시작하려나 봐요!”

사월세음의 말이 끝나자 백호의 가면을 쓴 이가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무반주로 검을 휘두르는 건 멋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순백의 검이 남기는 파공음과 거침없는 검의 흐름이 그 생각을 바꿔 놨다.

순백의 검이 하얀 자취를 남기며 허공을 그을 때마다 공기가 점점 가벼워졌다.

그저 돔이 닫혀서 갑갑하게 느꼈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공기가 변하는 걸 감지했다.

아주 미미한 수준의 사기가 검기가 스칠 때마다 소멸했다.

“진짜로 벽사를 사용하는 거 같은데…….”

“고레벨의 벽사 스킬 유저인가 봐!”

“신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시는 분은 처음 봐. 스킬 레벨이 적어도 5 이상은 되지 않을까?”

1학년 0반 아이들이 순수하게 감탄할 때, 국가 무형 문화재가 재현되는 장면을 몇 번 그린 경험이 있는 민그린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벽사 스킬 레벨 5가 넘는 인간문화재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수준이 높은 거 같아……!”

백호의 검무는 은광 스타디움에 산재한 씨앗을 차례로 베어 갔다.

검무는 물 흐르듯 진행되어 신화 속 백호가 한반도를 덮은 어둠의 근원을 지키는 외적을 쓰러뜨려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한 장면으로 이어졌다.

*    *    *

은광 스타디움의 어느 대기실.

그 안은 여전히 치열하게 대치하는 중이었다.

황호의 결계가 대기실 전체를 덮고 있어 기물 파손은 없었으나 부서진 결계를 몇 번이나 수복해야 했고, 마족의 사제가 뿌린 독기를 묶기 위해 눈이 시릴 정도로 황금빛의 이능파를 전개해야 했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궁지에 몰렸으나 여전히 그 기세가 죽지 않았다.

‘황호가 제힘을 전부 발휘하지 않는데…… 생포할 생각인가 보군요.’

독기를 다루는 마족을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죽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마족의 마지막 생명의 불꽃으로 퍼뜨린 독을 묶기 위해선 특수한 스킬이 필요했는데, 이 경기장 안에는 그 스킬을 가진 이가 없었다.

‘호족 중에도 그 성가신 스킬을 가진 이가 없었어요. 신인이 그 스킬을 가졌다고는 하는데 오래 전 호족을 떠났고…….’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복잡한 계산을 반복하며 독기를 터뜨렸다.

백호에 의해 씨앗이 반 이상 잘려 나간 게 감지되어 이를 악물었을 때였다.

퍽!

“커헉!”

정장 차림을 한 황호의 구둣발이 명치를 파고들어 격통이 온몸으로 퍼졌다.

황호가 자랑하는 결계술을 독기로 묶었지만, 조금이라도 손속을 늦추거나 딴생각을 하면 지금처럼 황호가 태호권으로 파고들었다.

백호의 손에 의해 차례차례 씨앗이 제거되는 사이, 마족이 문득 활로를 떠올렸다.

예상외의 전개에 마음이 흐트러졌지만,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호족의 신역에서 이번 일을 계획할 때 백호의 존재를 잊지 않았다.

백호의 힘을 가늠해 뿌린 씨앗이 있었다.

‘아직 여지는 있다!’

벼락 같은 깨달음을 얻은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입을 열며 그림자들을 만들었다.

그림자가 비추는 건 지붕을 지지하는 기둥 중 동서남북 각각의 입구에 가까운 4개의 기둥이었다.

기둥은 백호의 벽사로도 닿지 않을 만큼 주 경기장의 외곽에 있었고, 굳고 단단한 결계로 독기를 숨기고 벽사를 튕겨 냈다.

“당신 친우는 진명을 잃어 천신에게 미움을 사지 않았습니까? 지금 그의 힘으로 이 씨앗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백호는 천신의 진노를 짊어지고 있었고 이는 웅족을 상대할 때만 해제되었다.

눈앞의 마족과 신역을 방문한 인간을 위협하는 삿된 씨앗은 척살해야 할 존재들이었으나 천신은 백호가 제 모든 기량을 발휘하게 허락하지 않았다.

“백호의 힘을 과신한 모양이군요. 저는 지금 제 성에 찰 만큼 인간을 죽이진 못해도 신역을 더럽힐 만큼 사람을 죽일 수는 있습니다.”

백호의 벽사는 강력했지만, 천신의 디버프를 받은 이상 한계가 있었다.

지금의 백호로선 힘이 닿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다시 거래를 제안하려 했다.

교섭의 여지가 없다면 누구든 조종하고 죽여서 신역의 수호자의 얼굴에 먹칠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분노한 황호가 이능파를 발산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는 유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지금 내 말에는 허세도 거짓도 없다. 어째서 저렇게 여유가 있는 거지!’

황호의 손에 뭉친 이능파가 더욱 무겁게 변했다.

“간교한 마족의 말에 응할 생각은 없다.”

“……무슨 소리입니까? 신역의 수호자께서 인질을 버릴 생각입니까?”

황호는 대답 대신 손을 움직였다.

황금의 결계가 무수히 떠올랐다.

“말하지 않았나. 네 얕은 꾀를 전부 간파한 인간이 있다고.”

*    *    *

무음 속에서 이어진 순백의 검무는 점차 절정으로 향했다.

너울거리는 새하얀 이능파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외적과 대치한 개천신화 속 백호의 의지를 표현하는 듯했다.

외적을 베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베려 하던 백호가 이윽고 어둠의 틈을 찾았다.

호족의 수장에게 빚이 있는 월궁의 달토끼들이 항아에게 부탁해 어둠에 낸 작은 실금이었다.

백호 가면을 쓴 이가 두 손으로 검을 쥐고는 천신에게 기도를 올리듯 칼날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을 때였다.

‘어?’

입을 떡 벌리고 관객석에서 검무를 보던 지익회 소속의 학생, 박승현의 귓가에 희미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을 탄 휘파람 소리가 백호 가면을 쓴 이를 향해 울렸다.

박승현은 어쩐지 그게 자신의 광림, ‘군사가 지휘하는 진군가(進軍歌)’가 발동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 광림이랑 비슷한데. 뭐지? 유사한 버프 스킬이 있는 건가?’

비슷하다곤 하지만 고작 스테이터스를 조금 올려 줄 뿐인 자신의 광림과 비할 바가 못 됐다.

박승현이 의문을 품는 건 지당했다.

실제로 지금 벽사의 검무를 추고 있는 백호를 상대로 발동 중인 광림은 박승현의 ‘군사가 지휘하는 진군가(進軍歌)’였다.

그리고 그 광림을 발동한 건 박승현의 성장한 버전을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구현한 조의신이었다.

마족의 ‘눈’이 은광 스타디움을 지켜보고 있을 때 백호는 학생을 가장해 교복을 입고 들어와, 사전에 시설 수리를 핑계로 통신을 차단해 둔 대기실 안에서 기다렸다가 조의신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천신의 진노 디버프는 웅족을 상대로만 풀리잖아.

―마족을 상대할 때는 여전히 디버프가 걸린 상태니까 벽사의 힘이 미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때를 대비해서 벽사의 검무 클라이맥스 부분에 내가 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버프를 걸게.

백호 가면을 쓴 백호는 조의신이 한 말을 떠올리며 묵묵히 검무를 췄다.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휘파람 소리가 커질수록 백호의 이능파가 더더욱 강렬해졌다.

백호와 박승현 외의 다른 관객들도 그 휘파람 소리를 들었는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두리번거릴 때였다.

마침내 검무도, 휘파람 소리도 절정에 달해 백호는 하늘을 베듯 백아를 휘둘렀다.

파아앗!

백호 가면을 쓴 이가 검을 휘두르자 새하얀 범이 검 끝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백호가 하늘을 달리자 숨죽이던 관객들이 환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순백의 검에서 등장한 백호가 하늘로 올라간 순간 이능파가 산개하며 경기장을 덮었다.

하얀 이능파가 관객들의 시야를 한순간 삼킨 직후, 꺼져 있던 조명들이 모두 켜졌다.

마치 신화 속의 백호가 외적이 부른 어둠을 가르고 열린 하늘 아래에서 천신의 은총을 되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직 돔은 열리지 않았는데 다시 하늘이 열린 것 같았다.

*    *    *

백호가 춘 벽사의 검무가 남긴 여파와 관객들의 함성이 황호와 아바리티아의 사제에게도 전해졌다.

‘말도 안 돼……! 백호가 어째서 저 정도의 힘을……!’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심어 둔 모든 씨앗이 백호의 일격에 파괴되었다.

씨앗이 파괴되자 동서남북 4개의 기둥을 비추던 그림자가 삽시에 꺼졌다.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이제 황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 오만한 황호가 극찬한 인간이 실존하고 그의 계획이나 힘을 모두 간파했다는 것을.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다.’

딱히 죽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호랑이굴에 떨어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기왕이면 이 주변에 있는 인간을 오염시키고, 황호에게도 데미지를 줘야겠다는 일념으로 독기를 끌어모았다.

황호는 아마 그의 뜻을 깨닫고 결계술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신역의 수호자가 펼친 결계술.

아바리티아의 최고 사제가 목숨으로 뿌린 독기.

어느 쪽이 이길지는 자신이 알 수 없겠지만, 마족이 신역을 더럽힐 각오를 굳혔다.

그러나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파아아…….

황호는 대기실을 덮고 있던 모든 결계를 해제했다.

황호는 제몸을 방어하는 이능파만을 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결계를 거두는 거지? 수호자의 임무를 방기할 생각인가!’

자폭하기 위해 독기를 몸 안으로 갈무리한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을 때였다.

쾅!

황호가 결계를 거두는 것과 동시에 대기실의 문이 기다렸다는 것처럼 곧장 열렸다.

누군가의 등장에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경악했다.

‘뭐지? 아니, 저건……!’

등장한 자는 아바리티아의 사제도 알고 있는 존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바리티아의 사제는 그 인간은 몰라도 그가 착용한 가면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등장한 자는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까마귀 가면……!”

침묵과 방관의 마왕 시델렌티움을 상징하는 까마귀 가면을 쓴 인간.

까마귀 마왕은 극히 혐오하면서 저 까마귀 가면은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늘 그에 대해 떠들었다.

까마귀 가면을 쓴 자는 허공에 손을 들어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아니, 그리는 게 아니야. ‘쓰고’ 있다!’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그가 무엇을 할지 알아채자 자폭을 멈추고 까마귀 가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까마귀 가면이 허공에 온점을 찍자 아바리티아의 사제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저 정도면 남옥시인과 동급, 아니, 그 이상……!’

지금 저 까마귀 가면이 사용한 스킬은 ‘언령’.

마족과 상극인 능력이었다.

언령 스킬 유저가 이곳에 없음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결국 당하고 말았다.

“그 꾀를 전부 간파한 자가 있다고 했거늘.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게 하다니.”

언령이 구현한 금족령으로 묶인 마족을 상대로 황호가 웃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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