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트 피스 (4)
12지 동맹의 일각, ‘예민한 흑마’라는 대화명을 쓰던 마족(馬族)의 수장은 이 세계에서 두 번 마주친 적이 있다.
한 번은 12지 동맹 회담 당시 마법진을 통해서, 또 한 번은 홍천 쪽에 맹효돈을 마중 갔을 때.
흑마는 마족(馬族)의 권속을 구해 준 답례를 하겠다며 맹효돈의 주소를 끈질기게 물어봤다.
‘맹효돈이 은광고 기숙사 소속이라는 걸 알자 ‘또 봐.’라고 말했는데, 진짜 또 보러 온 걸까.’
흑마는 맹효돈에게 순수하게 선의를 베풀기 위해 은광고로 왔을 거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경계심을 풀 수는 없었다.
“바로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용족과 달리 마족(馬族)은 배신자가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나 보군.”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현재 긴 꼬리의 후보는 우족(牛族), 사족(蛇族), 마족(馬族), 원족(猿族) 넷.
또한 12지의 수장이 공동으로 제작한 결계에 눈에 띄지 않게 간섭할 수 있는 건 같은 12지의 수장뿐이다.
만약 마족(馬族)이 12지 동맹을 깨고 호족을 배신했다면, 결계를 해제한 건 흑마인 셈이다.
“흑마가 은광구에 머문 지 얼마나 됐어?”
“은광고 결계 주변에 접근할 때까지의 행적이 묘연하다. 은광구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는 파악이 안 되는군.”
“파악이 안 돼?”
“그렇다. 수호자의 힘을 개방하지 않는 한, 혹은 상대가 막대한 이능을 쓰지 않는 한 은광구 안의 모든 진족의 움직임은 파악할 수 없어. 진족의 접근을 상시 판단할 수 있는 건 은광고등학교 부지 내다.”
은광고등학교의 학교 부지는 약 50만 평이니 충분히 사기적인 감지 능력이지만, 은광구 전체를 상시 감시할 수 없다는 건 좀 아쉬웠다.
“대놓고 은광고 입구 주변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걸 보니 힘으로 결계를 돌파할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하군. ……맹효돈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있다.”
예상대로 흑마는 맹효돈과 만나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흑마는 디바이스로 연락하지 않고 온 거야?”
“유감스럽게도 연락처가 없어. 굳이 연락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면 마법진으로 호출한다. 이 몸과 마족(馬族)은 교류가 없다.”
흑마와는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아 보이는데 정작 사이가 나빠 보이는 서돌과 옥토연의 연락처는 있는 게 뭔가 이상했다.
교류가 없어서 사이가 나빠질 일도 없었던 걸까.
‘단순히 맹효돈에게 답례를 하기 위해서 온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어. 그래도 만나야 해.’
지금은 위기 상황도 아니고 여기는 호족의 영역이며 호족의 전력도 충분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쉽게 대책을 세우고 도움을 구할 수 있으니 흑마와 접촉해도 리스크가 적었다.
적은 리스크로 상대의 의중을 떠볼 기회이므로 이를 놓칠 수 없었다.
“우선 ‘황명호’로서 접촉해 안으로 들이기로 했다. 배신자를 찾고 있다고 하나 지금 흑마가 12지 동맹의 한 축을 맡는 수장임은 변함이 없어.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생각이다.”
황지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호족이 ‘긴 꼬리’라는 단서를 잡았다는 걸 아는 건 현재 호족을 제외하면 토족뿐이다.
지나치게 경계하면 이쪽이 가진 패를 보여 주는 꼴이 된다.
“단, 조의신 네가 직접 접촉하는 건 금한다.”
“이미 만난 적이 있는데.”
태풍이 지나간 후 홍천에 갔다가 흑마와 마주친 건 황지호에게 말해 둔 상태였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건 서로 귀찮은 짓이겠지만, 긴 꼬리일지도 모르는 진족의 수장과 마주쳐 놓고도 말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안다. 그래도 네가 호족과 가까운 자란 걸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어.”
일개 학생이 호족의 수장과 같이 나타나면 이상하긴 할 거다.
배신자일 가능성이 없는 토족, 용족, 서족과 마주치는 건 내버려 둬도 긴 꼬리일 가능성이 있는 진족에게 나와 호족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건 좋지 않았다.
‘자칫하다간 나를 인질로 삼겠다는 진족이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다른 모습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황지호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단언했다.
“까마귀 가면을 쓰거나 적벽괴도의 모습을 빌려도 안 된다.”
갑자기 나온 ‘그 단어’에 생각해 둔 대책과 변명이 모두 날아갔다.
뇌가 표백된 듯한 감각에 잠시 움직임이 굳었는데, 망할 노친네가 바로 알아챘다.
“흠, 방금 뭔가 위화감이 느껴졌는데.”
그 이후로는 평정을 유지하는 데에 온 힘을 다했다.
기껏 할 수 있는 말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안위를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맹효돈한테 별일 없게 해라.”
“걱정 말도록.”
* * *
최근 방윤섭은 인생 최고의 절정기를 보내고 있었다.
누군가 영광의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자신만만하게 지금이라고 답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방윤섭의 황금기는 개학과 함께 시작됐다.
―1학년 2반의 2학기 첫 수업, 1 대 1 보스 에너미 시뮬레이션! 타임 어택 순위를 공개합니다!
문새론이 호들갑을 떨며 공개한 순위의 첫 줄과 두 번째 줄에는 누구나 예상했던 인물들의 이름이 있었다.
압도적인 속도로 첫 줄에 이름을 올린 주수혁.
주수혁에 비해선 많이 밀리지만 야단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전투는 꽤 하는 문새론.
이변이 일어난 건 다음 줄부터였다.
―3위는 모두가 아는 무명의 초신성의 빵셔틀! 빵윤섭이!
―헐?
―뭐야, 기계 오류 아니야?
방윤섭은 그저 중간 이상은 갔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어서 입을 떡 벌렸다.
다들 시뮬레이터의 연산 오류, 계측 오류 등을 예상했지만, 기록기기 속 방윤섭의 전투 장면을 본 후 모두 납득했다.
―시비만 터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
―야, 요즘 빵윤섭이 말 착하게 한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도인의 가르침을 받고 좀 달라진 듯.
탁거산의 지옥 훈련에서 살아 돌아온 방윤섭은 몸을 쓰는 수업에선 날아다녔다.
방윤섭은 처음부터 예체능계, 그중 ‘체’ 쪽에 스탯이 쏠린 인간이었다.
중학교 시절 방윤섭은 성적은 상위권이었지만, 은광고에 갈 수준이냐고 물으면 애매한 성적이었다.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은 방윤섭의 부모가 한국 고교 입시의 1인자들을 수소문하고 방윤섭의 공부 패턴을 분석해 딱 맞는 강의를 찾아 꽂아 주지 않았다면 절대 은광고에 합격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은광고에 붙었다고! 추가 합격이긴 하지만, 붙으면 땡이지. 수석이나 나나 똑같은 은광고 학생인데. 선택 과목 잘 고르면 머리 쓰는 과목 피할 수도 있고…….’
그렇게 자신을 달랬지만 방윤섭은 좀처럼 은광고에 적응하지 못했고 1학기 내내 방윤섭의 입지는 몹시 위태로웠다.
생활 태도는 불량했으며 열등감과 자격지심에 말도 험하게 하는 방윤섭과 어울리려는 학생들은 없었다.
같은 반에 있는 주수혁이 방윤섭이 선을 넘는다 싶으면 개입해서 중재하거나 아예 화제를 돌려 분위기를 바꾸거나 2인 1조로 수행하는 미션에선 자진해서 짝을 하는 등의 노력을 한 덕에 그럭저럭 반에 섞여 있을 뿐이었다.
그런 방윤섭이 방학 중에 어느 계기를 통해 변하게 되었다.
—계기가 뭐든 기회가 왔으면 잡아야 할 거 아냐.
몹시 분했지만 조의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 자존심을 꺾고 맹효돈과 함께 탁거산의 정식 제자가 되었다.
맹효돈은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강해졌다.
맹효돈에게 제대로 된 스승이 없었다는 걸 알았을 땐 아연실색했다.
그는 TV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적당히 흉내 내 싸웠다고 한다.
‘그 땅꼬마 새끼가 가진 스킬이 ‘싸움’이었나? 그런데 그건 맨손 격투밖에 해당 안 된다는데, 난 그 새끼한테 주무기로도 졌어!’
중학교 시절 방윤섭은 태권 쌍절곤 대회 예선에서 개박살이 난 적이 있었다.
키도 작고 폼도 엉성한 맹효돈을 얕봤는데 시작하자마자 무섭게 파고든 맹효돈이 휘두른 쌍절곤에 급소를 연속으로 처맞고 쓰러졌다.
그게 맹효돈의 사기 스킬인 ‘싸움’ 스킬을 쓰지도 않고 그냥 TV를 보고 흉내 낸 거라고 하니, 몇 년 동안 쌍절곤 수련을 거듭한 방윤섭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쌍절곤은 사거리가 상당히 짧고 무기의 공격력에 의존하는 정도가 낮다. 맨손 격투 계열 체술을 응용해 싸우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싸움이 안 되지.
좌절하는 방윤섭을 두고 탁거산이 그렇게 달랬지만, 좌절은 계속 이어지고 의욕은 점차 꺾였다.
홍천에서 흡연 미수 사건을 저지른 이후로 탁거산이 더 혹독하게 굴어 탈주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 번 탁거산에게 찍히니 벗어날 수 없었다.
방윤섭은 주오 아일랜드 때 촛불 의식 시간에 엄마 생각에 설움이 몰아쳐 아주 통곡을 했는데,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울었다.
울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방윤섭의 부모님과 담임인 노영미가 탁거산의 지도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해 방윤섭이 탁거산의 과격한 가르침 속에 방치된 탓이다.
그렇게 의욕은 죽었지만 억지로 끌려다니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개학하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의욕이 죽었지만 어쨌든 최고의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니 맹효돈에 비해선 성장다운 성장도 아니지만 어쨌든 강해지긴 한 거다.
방윤섭은 성장했고, 주변에서 그걸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뮬레이터 수업에서는 반 3위 성적을 유지하게 되었고, 첫 이계 실습에선 무려 최대 공헌자에 이름을 올렸다.
―최대 공헌자 방윤섭이네, 보스 룸에서 날아다니길래 그럴 줄 알았다.
―야, 이러다가 우리 반에선 수혁이 다음으로 빵윤섭이가 이명 받는 거 아니야?
―1학년 2반 B조 이계는 그레이트 탁 일대기에 나온 패턴이랑 비슷했는데. 운이 좋았던 거 아니냐?
―플레이어계에선 운도 실력이다.
방윤섭 안에서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사라지니 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주수혁이나 기타 잘난 놈들을 볼 때마다 들었던 짜증이 사라지고, 탁거산이 쉬지 않고 훈련을 시켜 대니 시비를 걸 힘도 없던 덕이 컸다.
방과 후에 반 아이들과 교류전 경기를 보러 가게 됐는데, 방과 후에 반 아이들과 어울려 놀러 간 경험이 없어 아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어색하고도 들뜬 기분으로 교문 쪽으로 향할 때였다.
“어.”
눈앞에 맹효돈이 있었다.
방윤섭은 갑자기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들어 주수혁이나 조의신 같은 놈들에게 열등감은 안 들어도 이 땅꼬마 놈은 예외였다.
‘자꾸 저 새끼가 바로 옆에서 치고 나가는 게 보이니까 열 받아……!’
첫 이계 공략 실습에서 1학년 0반의 최대 공헌자는 맹효돈이 아닌 조의신이었다.
그러나 맹효돈이 방윤섭과 같은 이계를 공략했다면, 최대 공헌자는 맹효돈이 되었을 게 틀림없었다.
쓸데없는 가정에 울컥한 마음이 더 들었지만 일단 동문수학하는 사이니 아는 척은 했다.
방윤섭의 입에서 시비인지 인사인지 모를 말이 튀어나왔다.
“……뭐 하냐.”
“이사장실 가는데.”
맹효돈은 시비조로 말하는 방윤섭에게 적응한 듯 무심하게 답했다.
“너 미식축구 경기 보러 간다며.”
“이사장실 들렀다가 갈 거다.”
“이사장실은 왜 가는데. 사고 친 거냐?”
맹효돈은 머리를 잠시 굴리다가 답했다.
“……저번에 만난 말족의 수장? 흑말이 나 보자는데.”
“말족이 아니라 마족(馬族)이겠지. 흑마라고 해. 돌머리 새끼야.”
“아, 그랬냐.”
맹효돈은 진짜 헷갈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돌머리 땅꼬마에 비해 자신의 자질 수준이 바닥이라는 사실에 열불이 났다.
‘잠깐, 그 흑마라면…….’
흑마라는 단어에 뒤늦게 떠올랐다.
태풍으로 엉망이 된 홍천의 야산.
무력하게 무너진 자신을 두고 다시 구조 작업에 나선 탁거산과 맹효돈.
그리고 맹효돈에게 감사를 표하며 답례를 하겠다던 흑마도.
“…….”
방윤섭은 맹효돈을 지나쳐 걸어갔다.
여기에서 한 마디 더 하면 추한 열등감이 폭발할 것 같았다.
“아, 맞다.”
그때 맹효돈이 방윤섭을 불러 세웠다.
방윤섭이 내려다보자 맹효돈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번 실습 때 최대 공헌자 된 거 축하한다.”
맹효돈의 웃는 얼굴과 꾸밈없는 말에는 순수한 호의와 축하가 담겨 있었다.
갑자기 방윤섭의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열등감이 다시 무럭무럭 차올랐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