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세트 피스 (11)
게임 속 황지호는 돌아이 같지는 않았지만, 진족 다운 캐릭터였다.
그는 모든 사건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수혁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또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 변덕스럽게 도움을 주곤 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주수혁을 관찰하며 대놓고 흥미를 표현하는 모습이 게임 속 황지호의 행동 원리를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 행동 원리를 고려해 처음 이 세계에서 황명호 이사장과 면담을 할 때 흥미를 끄는 대화를 하려 했고, 그 결과 황지호와 같은 반이 되어 함께 행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게임 속에서 황지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또 무슨 일을 겪는지 잘 몰랐다.
‘그래도 눈이 내리는 순간에 무엇을 했는지 말할 수는 있어.’
게임 속 황명호 이사장은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 내릴 당시 부재중이었다.
황호의 분신으로 보이는 진족은 등장하지 않았다.
“너는 그날 학교에 없었어.”
“내가 그날 학교를 비울 사정이 생기는 건가…… 분신 하나 배치하지 못할 만한 일인가?”
“아니, 넌 1년 내내 학교를 비울걸. 내 기준으로 2학년 1학기가 되어야 등장해.”
태만한 이사장이 학교를 비운 건 하루 이틀 이야기가 아니었다.
15년 전 성국언의 주도로 학생들과 이사진이 대립했을 때도 이사장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학생회가 사건 진행 과정, 증거와 기록들을 영상화해 38개 언어의 자막을 달아 언론에 공개한 결과 국내 언론과 외신의 주목을 받으며 학교가 뒤집힌 후에야 학교에 돌아왔다.
성국언이 황명호 이사장과 담판을 지은 것도 그때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지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알고 있던 것’에서 적호는 검은 옷만 입는다고 했지. 조의신 너도 등장하지 않고.”
장남욱이 황명호 대저택을 방문한 날, 황지호는 이런 말을 했다.
―예전에 네가 한 말에서 걸리는 게 있었다.
―적호가 검은 옷만 입게 된다는 건 네가 ‘알고 있던 일’ 중 하나였나?
―네가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면 김신록이 죽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건가 보군.
황지호는 나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알고 있던 것’에서 나는 등장하지 않고 김신록이 사망하며 적호가 검은 옷만 입고 살게 된다는 걸 알아챘다.
“제가 검은 옷만 입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풍백과 우사와 운사가 언급된 이후로 계속 멍하니 있던 적호가 자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물었다.
검은색 옷이란 말에 적호가 의문을 품을 법했다.
적호는 서돌만큼 화려하게 입지는 않아도 옷차림에 신경 쓰는 편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한 가지 색으로 통일한 옷을 입을 것 같지는 않았다.
“조의신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다. 조의신이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지 않았을 경우를 상정해 보도록.”
황지호의 표정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 속에서 자신이 왜 학교에 없었는지 짐작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굳이 적호에게 저걸 묻는 걸까.
‘그 원인이 적호와 관련이 있는 건가?’
적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날 조의신이 없었다면 학생은 물론이고, 감독관도 사망했을 거다. 적호,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너는 어떻게 행동할 거지?”
“그런 일이 생기면…….”
적호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모양이었다.
“신역에서 웅족의 손에 제 아들이 죽었다면, 황호를 용서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랬겠지.”
적호는 그 뒤로도 이어서 길게 독설을 뱉었는데 황지호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날 김신록이 웅족에게 다친 게 아직도 한인 모양이다.
“황호, 나와 당신이 맺은 계약을 잊지 마십시오.”
적호는 그 말을 끝으로 긴 독설을 마쳤다.
저번에도 ‘계약’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 ‘계약’이라는 건 뭔가요?”
그 말에 적호가 황지호를 흘끗 봤다.
황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말해도 상관없다.”
“……그렇습니까. 저도 괜찮습니다.”
“그럼 내가 설명하지.”
황지호는 담담하게 말했다.
“적호가 죄를 범한 직후, 적호는 제 목숨을 내놓아 죗값을 치르는 대신 아들을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해 달라 청했다.”
그게 계약의 내용인가?
하지만 적호는 아직 살아 있고, 김신록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호족 쪽에 남았다.
아마 저게 계약의 내용은 아닐 것이다.
“당시 은호를 대리해 임시로 수장을 맡고 있던 건 나였다. 나는 호족을 대표해 적호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개인적인 계약을 제안했다. 뭐…… 제안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깝겠군.”
“협박?”
“그래, 적호가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계약을 제안했으니까.”
황지호가 그 계약의 내용을 읊었다.
“적호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고 내 명을 듣는 한, 나는 적호의 아들을 호족의 후예로 취급하며 그를 보호할 것이다. 단, 적호가 죽는 순간 그 아들을 웅족의 후예로 여길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여태까지 희미하게 위화감을 느꼈던 스토리의 공백이 메워지는 것 같았다.
대죄를 지은 적호가 살아남아 여기에 있는 것도, 그 적호의 아들인 김신록이 신역에 남아 있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황호는 죽으려는 친우와 그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저런 제안을 했을 것이다.
“저는 그 계약을 받아들이고 긴 기간 붉은 형틀에 묶이기로 했습니다. 아들을 살릴 길은 황호의 말을 따르는 것뿐이었으니까요.”
적호는 한마디 덧붙였다.
“대신 저도 감히 조건을 붙였습니다. 제 조건은 제 아들이 제가 아버지인 것을 모르게 하고, 부자 관계에 일절 관여하지 말 것. 아들의 목숨을 구걸하는 입장에서 제시하기에는 주제넘는 조건이었지만, 황호가 자비를 베풀어 응해 주었습니다.”
황지호와 적호의 말이 끝나자 몇몇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 흔적은 돈족 측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걱정하지 마십…….
―황호,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그 아이를……. 계약은…….
저강렵의 갈래에 꿰뚫려 쓰러지던 적호는 정신을 잃기 전에 자신이 임무를 무사히 수행했으니 황호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청한 것이다.
적호가 그 자리에서 죽어 계약대로 김신록이 웅족의 후예로 취급받는다면, 아버지로서 그 뒤의 일은 상상하기 싫을 거다.
한편, 황지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왜 여태까지 저 둘을 내버려 둔 거야?
―……적호와 ‘계약’을 했으니까 나는 저 둘 사이에 개입할 수 없다.
황지호는 둘 사이에 개입하지 않겠노라 계약을 통해 맹세했다.
비록 김신록이 자력으로 제 아버지가 적호임을 알아내고 말았으나, 그 이후의 일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황호와 적호가 이런 계약을 맺었는데 만약 신역인 은광고 안에서 웅족의 공격을 받아 김신록이 죽었다면?
‘게임 속에서 두 호족의 사이는 완전히 갈라졌을 거야.’
12지 내부에 배신자가 있었다고 하나 신역의 내부에서 호족의 후예가 웅족에게 죽었다고 하면 가장 큰 책임은 신역의 수호자에게 있다.
가혹한 계약을 하며 아들의 목숨을 지켜 달라 청한 적호의 입장에선 황호를 용서하기 어려울 것이다.
‘신역 안에서 웅족이 김신록을 해하게 한 건 황지호와 적호의 사이를 갈라 놓는 한 수이기도 했구나.’
왜 황지호가 적호가 죽은 후에야 스토리에 등장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만약 김신록이 죽었다면, 적호는 절대 나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제 손으로 아들의 복수를 할 테니, 태만한 당신은 손을 떼라고도 말하겠지.”
황지호의 말에 적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흑막이 첫수로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의 감독관 김신록을 노린 건 호족 내의 분열을 노리기 위함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의신, ‘네가 알고 있던 것’의 나는 이 사건에 개입하기 어렵겠군. 그 이후의 내 행보는 어떻지?”
아는 게 없어서 말할 게 거의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
“그렇군.”
모르겠다는 내 대답에 황지호는 딱히 실망스러워 보이지도 않았고, 나를 더 추궁할 기색도 없었다.
게임 속 황지호의 행보는 나도 궁금했다.
대체 황지호는 왜 사라졌는가.
지금 말대로라면 적호가 죽은 이후에 황지호는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거다.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의 눈에 보이지 않게 호족을 움직이고 학교를 운영했을 것이다.
그래도 플레이어의 입장에서는 짐작만 할 뿐,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아니야, 확실히 알아낼 방법은 있어.’
그때 머릿속으로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리플레이’ 기능.
장남욱과 유상훈이 실기 시험을 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의 모습을 꿈으로 보게 한 그 기능이었다.
‘이 기능을 황지호에게 사용하면 실기 시험 날부터 게임 속에서 어떤 행보를 보였는지 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대로라면 황지호가 사라진 순간이 죽는 순간이라고 쳐도 황지호는 최소 1년 반이 넘는 시간을 꿈으로 겪게 된다.
만약 엔딩 때까지 살아 있다면 꿈은 더욱 길어질 것이다.
그 외에도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내 행적을 캐낼 방법이 있나 보군.”
입을 다문 나를 보던 황지호가 불쑥 말했다.
저 노친네는 쓸데없이 눈치가 빨랐다.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있긴 한데, 사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 리스크가 있어.”
“리스크? 누구에게 생기는 리스크지?”
“너.”
그 말에 황지호가 바로 답했다.
“그럼 해 보도록.”
주저 없이 답했지만 꺼려졌다.
장남욱과 유상훈은 1시간도 안 되는 분량의 리플레이에도 힘들어했는데.
“나는 네가 잘 모를 만큼 모호한 행보를 보였다. 내 안위에도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사전에 정보를 파악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나?”
황지호가 냉정하게 말했다.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황지호가 왜 사라졌는지 언젠간 알아내야 해. 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메뉴 창을 열어 리플레이 기능이 있는 항목을 열었다.
[리플레이]
다른 차원에 게임의 형태로 새겨진 미래, 기록을 꿈으로 재현한다. (1단계)
리플레이를 선택하자 내가 ‘게임 속에 등장했다’고 인식한 인물들의 목록이 펼쳐졌다.
목록이 체스판처럼 배열된 게, 마치 그 위에 있는 인물이 체스 피스처럼 보였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늘어난 목록 상단에 황지호도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황지호를 택했다.
〈현재 단계에서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번처럼 황지호를 선택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직 쓸 수 없는 것 같아.”
“아직이라…… 그럼 언제쯤 가능하지?”
“일종의 스킬 같은 거라 레벨을 올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나 저 단계를 올리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전용 메뉴의 레벨이 오르는 방법도, 이 기능 수치를 올리는 것도 전부 미지수였다.
‘가장 단순한 방법은 써 보는 건데.’
리플레이를 여러 번 써 보는 것도 방법일 거다.
리플레이를 사용할 수 있는 상대.
사용해도 딱히 문제가 없을 상대.
이 상대는 금방 떠올랐다.
“당분간 레벨 업을 시도할게. 대신 누구 하나 감시해 줘. 가능하면 의사를 붙여서 이능파 검사도 하고.”
“알았다. 누구지?”
나는 리플레이 항목 중 거의 최상단에 위치한 어느 인물을 택했다.
그 대상은 황명호 이사장과 말을 트는 계기가 된 인물이었다.
“손민기.”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