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5)
남궁규연과 홍규빈.
성별이 다르다고는 하나 두 사람은 몹시 닮아 있었다.
친남매가 아닌 3촌 이상의 친척 관계일 가능성도 생각해 봤으나 곧 지웠다.
‘홍규빈이 남궁규연을 언급할 때 그냥 여동생이라고 한 걸 보면 친척 여동생일 가능성도 적어.’
조카나 사촌 이상의 동생을 여동생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드물다.
또 예전에 황지호와 홍규빈이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남궁 그룹에서 부른 용역 업체가 은광고 학생을 위협했는데.
―남궁 그룹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알아보겠습니다.
그날 공항에서 저 대화를 들었을 때 의문을 느꼈다.
황지호는 마치 남궁 그룹과 홍규빈이 연관이 있다는 가정하에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설마…….’
내 가설의 진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인을 위해 디바이스로 포털 검색 사이트를 열어 검색어를 입력했다.
[검색어: 남궁규빈]
희귀성에 흔하지 않은 이름이다 보니 검색 결과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결과란에서 원하는 걸 발견했다.
최신 업데이트 날짜가 몇 년 전인 방치된 블로그에 올라온 남궁 그룹의 가계도였다.
성인의 경우 신문 기사에 쓰였던 사진이, 그렇지 않은 경우엔 출처가 SNS이거나 학교 행사 앨범인 듯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있다……!’
야근에 찌든 지금과 달리 매우 앳되어 보이는 홍규빈의 얼굴이 보였다.
교복 위에 코트를 입은 옆모습이었는데, 염준열만큼은 못해도 곱게 자란 도련님 태가 났다.
그리고 그 아래로 ‘남궁규빈’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이름을 보니 여름방학 때 사월 일족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오혜정이 사월세민에게 청혼인지 4대 그룹 디스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을 했던 게 떠올랐다.
―그것도 아니면 기어코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힌 멀쩡한 아들의 호적을 파내고 개판이 된 남궁 그룹에 시집가라는 건 아니겠죠?
제갈재걸에게 구질구질하고 질척거리게 구는 걸 제외하면 홍규빈은 우수하며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편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남궁규빈이 아닌 홍규빈이다.
‘남궁 그룹에서 호적이 파였다는 아들이 홍규빈이었나.’
그렇다면 문제는 호적이 파인 이유다.
자세한 정황은 파악이 안 가지만, 짐작은 갔다.
황지호는 예전에 홍규빈을 많이 부려 먹으라고 언급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어둠의 시대를 경험한 인간들은 제 집안의 귀한 아들이 이능술사가 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변하지 않는 인간도 있지. 홍규빈의 집이 그랬어. 제갈재걸은 이능술사가 되겠다는 홍규빈의 꿈을 도왔고…… 그 결과 제갈재걸은 많은 걸 잃었지.
―나는 그 과정을 듣는 대가로 제갈재걸을 은광고에 취직시켰다. 그걸 책잡아서 번거롭게 구는 인간이 있긴 했지만, 이 몸의 결정을 꺾을 수는 없었지.
이 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홍규빈은 남궁 그룹의 방침상 이능을 숨겼고, 플레이어가 되기 위해 성을 바꾸기까지 하며 집을 나왔다.
그 과정에서 당시 홍규빈의 과외 강사였던 제갈재걸이 도왔다.
그 결과, 제갈재걸은 많은 것을 잃고 황지호가 뒤를 봐주는 은광고에서만 근무할 수 있게 되었으며, 홍규빈은 플레이어가 되었다.
‘그럼 홍규빈의 친여동생인 남궁규연은 어떻게 플레이어 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걸 허락받은 거지?’
의문점은 남았지만, 아무 문제 없었다.
오히려 고민하던 문제 몇 개가 해결되는 것 같았다.
‘홍규빈이 남궁 그룹 출신이라면 4대 그룹 암투에서 이용할 수 있는 피스가 늘어난 셈이야.’
하물며 홍규빈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제갈재걸이 고생을 했고, 제갈재걸의 고용주인 황지호도 홍규빈을 부려 먹으라 했다.
홍규빈에게 실컷 일을 시킬 당위성은 충분했다.
무슨 일을 어떻게, 얼마나 시킬지 생각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 * *
황명호 대저택.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김신록이 손수 술상을 준비했다.
적호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아들과 은호의 후예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줬다.
백호는 묵묵히 그 이야기를 경청했고 황호가 가끔 끼어들거나 정정하기도 했다.
“하하하하! 풍백과 우사가 네 대련 요청에 응한 게 아니지. 적호 네가 ‘아니꼬우면 덤비든가.’라고 도발했을 뿐이지 않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냐. 변한 건 말투뿐이구나.”
“적호 님! 빨리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린 은호의 후예들은 적호의 무용담과 풍백, 우사, 운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지만, 밤이 깊고 이야기가 길어지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
어린 후예들을 침실로 옮긴 후에도 호랑이들의 술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빈 술병이 늘어 갈수록 화제는 어둡게 바뀌었다.
“그분들이 삿된 눈을 뿌린다니요. 은광고의 결계를 뚫고 말입니까?”
“그날이 오면 긴 꼬리가 직접 나서서 결계를 어그러뜨릴 것이다.”
긴 꼬리라는 말에 김신록이 긴장한 기색을 보였으나 곧 투지를 불태웠다.
“알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저도 싸우게 해 주십시오.”
아들의 태도에 적호는 몹시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곧 아들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협회에서 간호 장교를 고문하며 보인 활약상이 그러했다.
김신록은 낯이 뜨거운지 백호나 황호가 말리거나 이야기를 끊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백호는 양배추 롤에 들어 있는 곶감을 씹은 이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황호는 실실 웃으며 김신록의 벌건 얼굴을 관찰했다.
“협회에도 심문을 담당하는 플레이어가 있었으나 제 아들의 실력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습니다. 압정 하나로 손끝의 신경 섬유를 자극하고 원하는 만큼 정확하게 파괴하는 솜씨에 참관인들이 모두 감탄하더군요.”
김신록이 가한 고문은 하나같이 살벌하여 말 한마디에도 피비린내가 묻어나는 듯했으나 호랑이들은 그저 후예의 활약을 기특하게 여겼다.
적호의 아들 자랑은 술병을 다섯 병이나 비운 후에야 끝났다.
“……그렇게 제 아들은 압정 하나로 TC 그룹의 파벌 하나를 지울 단서를 잡아냈습니다.”
웃으며 그 말을 듣던 황호가 TC 그룹이라는 단어에 얼굴을 굳혔다.
“TC 그룹이라. 그 분수를 모르는 것들이 이번에 또 사고를 쳤지. 이번에는 신역의 학생까지 노렸으니, 참으로 불경하다.”
“황호 님은 예전부터 TC 그룹을 싫어하셨죠. TC에서 일어난 일에 뒤에서 움직이셨던 걸 기억합니다.”
김신록은 화제를 바꿀 기회다 싶어 냉큼 말을 덧붙였다.
그 말에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백호가 입을 열었다.
“황호, 무슨 짓을 했나?”
백호의 질문이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황호는 순순히 답했다.
“딱히. TC 그룹의 창립자 부부가 이혼 소송을 할 때 부인 쪽에 협력하고, 기업 이름을 바꾸도록 압박을 가한 것 외엔 손을 쓰지 않았다.”
황호가 TC 그룹, 특히 도씨들이 알면 충분히 기함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저는 황호의 명을 받아 움직였으니 그때 일을 기억합니다만,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었던 백호는 사정을 모르겠군요.”
“…….”
적호의 신랄한 말에 백호는 반박하지 않았다.
“황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TC 그룹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창립자 부부의 성을 하나씩 따왔으니 한자로 따지면 그 뜻이 다릅니다만, 한국어로 발음했을 때 그 의미가 몹시 광오하고 분수를 모르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옛 이름?”
적호의 설명에 백호가 되물었다.
적호는 곧장 그 물음에 답하였다.
“TC 그룹의 옛 이름은 ‘도천 그룹’이었습니다.”
‘도천’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황호는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가득 차 있는 술잔을 단숨에 비운 황호가 입을 열었다.
“도천이라니. 천신을 업신여기는 말이나 다름없다. 하늘에 다다를 정도로 큰물이 가득 차 넘치고, 하늘의 분노를 무서워할 줄 모른다는 뜻 아닌가.”
* * *
군 사관학교 고등부와의 스포츠 교류전, 그 마지막 날이 밝았다.
현재까지 남은 종목은 농구와 아이스하키 둘.
이 두 시합이 끝나고 해가 질 무렵에 폐막식을 할 예정이라 일단 우리 반은 종목별로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류하기로 했다.
우리 반 아이 중, 오늘 농구를 보러 온 아이는 김유리, 한이, 맹효돈, 나 이렇게 넷이었다.
일찌감치 관중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또 도시후가 어떻게 알고 와서 내 쪽으로 손을 열심히 흔들며 인사했다.
도시후는 야구장과 키모폴레이아 사건으로 맹효돈과도 얼굴을 터서 그런지 오늘은 아는 척을 더 했다.
“쟤가 대석이가 그렇게 뭐라 하던 의신이 친구구나.”
“야, 저 새끼가 수비를 그렇게 뭣같이 한다며.”
어제 경기를 보고 분개한 송대석의 열변으로 도시후는 우리 반 사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한이와 맹효돈이 어제 경기 영상을 재생하며 도시후의 뭣같은 수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음…….”
한편, 도시후가 등장한 이후 김유리의 말수가 적어졌다.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하고, 참는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러지?’
바로 옆에서 보니 이능파가 작게 이글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안광’ 스킬을 사용해 관찰하기 전에 일단 말로 물어보기로 했다.
“괜찮아?”
“의신아, 시후 말인데 쟤는 물가에 가면 안 될 것 같아.”
그거야 도시후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아는 내용이었다.
뱃멀미도 심한 데다 수영도 못 하는 놈이니까.
그런데 이걸 김유리가 알고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바다와 물에 관련한 상위 존재가 뭐라고 한 걸까.
“상위 존재들이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긴 하는데, 대충 쟤랑 놀지 말라는 내용인 것 같아.”
웬일로 김유리한테 들러붙은 상위 존재들이 맞는 말을 했다.
‘도시후한테 그 씨앗 말고도 또 뭐가 있나?’
김유리가 도시후와 접촉한다면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능파가 불안정해 실습 수업에도 제대로 참가하지 못하는 김유리를 어느 의미로는 더 불안정한 도시후 앞에 갖다 놓을 순 없었다.
상위 존재의 조언대로 도시후와 김유리는 같이 안 노는 게 좋을 것 같다.
“곧 시작하려는 것 같아.”
“오, 심판이 공 들고 나왔다.”
어느덧 팁오프가 가까워진 건지, 워밍업을 마친 선수들이 센터서클 주변에 모였다.
오늘도 스타팅 멤버에는 유상훈, 도시후가 포함되어 있었다.
삣!
주심이 농구공을 높게 던지고 전광판의 시계가 움직였다.
속공을 거듭하며 정신없이 점수가 쌓이던 1, 2차전과 달리 3차전은 다소 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초반과 달리 어느 정도 상대의 수와 버릇을 읽어 전부 대책을 세워 온 것이다.
스코어가 바뀌는 속도는 1, 2차전에 비해 훨씬 느리고 지지부진했지만, 경기 자체는 치열하게 이어졌다.
3쿼터가 끝나는 시점, 양 팀 모두 1, 2차전에서 낸 점수의 반을 겨우 넘기는 수준의 득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다 연장전 갈 것 같은데.”
“설마 무승부로 끝나?”
“무승부는 없어. 규칙상 승부가 날 때까지 5분씩 연장하면서 계속할 거야.”
반 아이들에게 연장전 룰을 설명해 주는 사이에 휴식 시간이 끝났다.
유상훈이 코트로 나서기 전 관중석을 한 번 둘러봤는데, 어쩐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
모두의 긴장 속에서 4쿼터가 시작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