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7)
폐막식 참가를 위해 이동하기 전, 응원단원들은 한 번 씻고 예비 응원단복으로 갈아입기로 했다.
일주일 가까이 진행된 스포츠 교류전의 응원 계획을 짜고 실행한 응원단원들은 모두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모두 표정이 밝았다.
아쉬운 마음도 남긴 했지만, 이를 덮는 보람과 성취감이 더 큰 덕이었다.
유상희도 예외가 아니었다.
유상희는 2학기 들어 가장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상멍청이가 MVP라니. 그것도 두 번이나!’
세 번에 걸쳐 진행된 농구 시합은 모두 멋졌지만 방금 경기가 제일 근사했다.
유상훈을 집중 마크 했던 도시후와도 인연이 있어 대놓고 말하긴 좀 그랬지만, 도시후를 제치고 슛을 넣는 유상훈의 모습에 속이 무척 후련했다.
이능이 생기고 건강해져 머리가 굵어지니 유상희의 남동생은 점점 귀염성이 사라졌다.
그래도 한때 그 철없고 시커먼 남동생에게도 누나 누나 거리면서 유상희의 병문안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리고 병약한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안 되고……. 앞으로도 상멍청이답게 농구나 하면서 잘 지냈으면.’
유상훈은 어릴 적 기병(奇病)에 시달리고 몸이 약해 그 좋아하는 농구는커녕 거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유상희는 어린 시절 치유 이능을 얻었지만, 광림을 사용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에 동생의 투병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능을 개화한 이후로 기적적으로 건강해지긴 했지만, 유상희는 유상훈이 앓던 기병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그런 유상훈이 입학 실기 시험을 치르던 중 진족의 권속에게 습격당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병약한 상멍청이였던 주제에 툭하면 다치고 지랄이야.’
유상훈이 농구 첫 시합 때 상대 팀 선수의 팔꿈치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쏟은 걸 봤을 땐 응원이고 뭐고 그 선수의 팔꿈치를 가루로 만들어 주고 싶을 만큼 속상했다.
특히 손민기라는 쓰레기를 감싸다 다쳤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도 속이 썩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답장을 안 보낸 지 한참 됐는데도 끈질기게 들이대네. 음…… 조금만 더 갖고 놀까?’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니 스트레스가 쌓였다.
손민기에게 무슨 말로 헛된 희망을 심어 줄까 고민하며 디바이스 메신저를 열었을 때, 새로 도착한 메시지를 본 유상희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발신자는 TC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손민기에 관한 생각이 머리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상희 언니.”
안다인의 목소리에 유상희가 고개를 들었다.
유상희는 학생회 소속 후배들 모두를 아끼고 다정하게 대했는데, 특히 안다인은 유상훈과 함께 학급 임원을 맡는 중인 것도 있어 더욱 신경 쓰고 있었다.
“1학년 애들은 준비 끝났어?”
“네, 지금 짐 나르고 있어요. 곧 에어 셔틀이 도착하니까 같이 가요.”
“그래.”
생각보다 오랫동안 멍하니 있던 것 같았다.
후배들을 기다릴 생각이었는데, 되레 기다리게 만들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상희는 한숨을 참고 대기실 앞 복도를 걸어 입구를 향해 갔다.
몇 걸음 걷지 않아 안다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상희 언니…… 도원우 선배님하고 싸우셨나요?”
“응? 원우랑? 아니.”
싸움은커녕 오늘은 인사 외엔 말을 한 기억이 없었다.
유상희는 기억을 더듬어 봤다.
‘농구 첫 시합을 할 때였나? 원우가 시후랑 이야기할 게 있다고 뒷정리하던 중에 빠져나갔었지.’
도원우가 시합으로 지쳤을 도시후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둘이 만나기 전에 도원우를 잡고 자초지종을 물었던 기억이 있었다.
“혹시 원우가 또 무슨 짓을 했니?”
“아뇨. ……그 반대인 것 같아서요.”
‘무슨 짓을 했다’의 반대?
그러면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 아닌가.
‘아, 원우가 오늘 안 추잡했지.’
스포츠 교류전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동기나 후배들보다 유상희의 건강과 휴식을 염려한 도원우가 계속 추하게 굴었다.
평소엔 웃고 넘어가던 학생부회장 겸 응원단장 지명수가 장난인 척 복부에 주먹을 꽂으면서 ‘하하하, 작작 좀 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안다인의 말과 요 며칠 사이에 있던 일을 돌이켜 보니 새삼 도원우가 어제오늘 덜 추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추한 소꿉친구가 드디어 철이 들었다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원우가 좀 얌전했지.”
“…….”
안다인은 말을 신중하게 고르다가 결국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안다인은 도원우의 급변한 태도를 두고 걱정하는 것 같은데, 유상희는 걱정거리가 하나 줄어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음 주가 선거 기간이잖아. 임기가 끝날 때가 됐으니 학생회 안에서도 학생회장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유상희의 말을 시작으로 대화 주제는 학생 대표 총선거로 바뀌었다.
어느덧 도원우는 화제의 중심에서 밀려나 학생회장 후보인 염준열과 그의 러닝메이트 곽경구의 이름이 나왔다.
“준열이가 학생회장을 맡아 주면 안심이야. 준열이가 외부 활동으로 바쁘긴 하지만, 경구가 서포트하면 학생회 업무 공백은 없을 거고. 평소 하는 행실을 보면 어떻게 뽑혔는지 이해가 안 가는 원우보다는 준열이가 훨씬 좋은 회장이 되리라고 믿어.”
“염준열 선배님은 좋은 회장이 될 것 같아요.”
웃는 얼굴로 진심에서 우러난 소꿉친구 흉을 보는 중에도 가끔 머릿속에서 아직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무력했던 유상희의 과거는 졸업을 앞둔 지금도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디바이스에 쌓인 메시지들과 유상희 집에 도착한 우편물을 떠올리니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묘하게 머리는 상쾌했다.
‘……다인이 근처에 있을 땐 사고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
후배를 공기 청정기 취급하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휘잉.
순간 유상희의 긴 머리가 살랑였다.
유상희와 광림과 가호로 이어진 치유의 신 아케아가 그녀의 이능파를 움직여 작게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아케아 님……?’
갑자기 아케아가 왜 개입한 걸까.
유상희는 의문으로 여기면서도 안다인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 * *
폐막식이 열리는 은광 스타디움.
아이스하키를 보러 갔던 아이들과 합류해 우리는 자리로 이동했다.
자리로 이동하는 사이 각자 본 경기에 관해 열띤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스하키 쪽에선 경기가 중단되는 해프닝이 있던 모양이다.
경기 중에 퍽이 펜스를 넘어 관객석으로 날아왔는데 하필 그게 송대석의 머리 쪽으로 날아왔다고 한다.
“선수들이 거의 동시에 퍽을 쳤는데, 한쪽 하키 스틱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어요. 그 탓에 맞은 편에서 퍽을 노리던 선수가 힘 조절에 실수한 것 같아요.”
“제일 먼저 눈치챈 건 지호 같았습니다. 손가락으로 튕겨 내려고 하다가 대석이가 손을 강화해 퍽을 잡으려는 걸 보고 방치한 것 같습니다만.”
목우람은 그 찰나의 정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나는 목우람의 호구스러운 모습 밖에 못 봤지만 은광고 면접 때 헛소리를 해도 합격할 만한 실력자인 건 사실인 듯하다.
목우람의 폭로에 모든 시선이 황지호 쪽으로 쏠렸다.
“하하하! 솜씨 좀 보려고 했다.”
저 노친네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한테 위기가 닥쳤는데 그 솜씨인지 뭐를 보려고 내버려 뒀단 말인가?
퍽 정도야 송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잡을 거고 다칠 리도 없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됐어. 누구 다친 사람은 없지? 대석아, 괜찮아?”
“나는 안 맞았는데. 그 허접 새끼들 때문에 그린이가…….”
“……나 안 다쳤어!”
“아,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김유리의 질문에도 송대석과 민그린이 금방 두 사람의 세계에 빠졌기에 사월세음이 설명했다.
이어진 설명에 의하면, 송대석이 퍽을 잡기 전에 민그린이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퍽을 걷어찼다.
걷어찬 퍽이 아이스링크 엔드존에 깊게 박히는 바람에 복구할 때까지 경기가 중단될 정도로 강력한 발차기였다는데, 송대석은 링크 걱정보다 민그린의 발 걱정을 했다.
“와, 그린이 영상 떴어!”
“같이 보자!”
“……꼭 여기에서 봐야 해?”
민그린이 작게 항변했지만, 이미 홀로그램 위로 영상이 재생되었다.
민그린의 움직임에 모두가 감탄했다.
영상 마지막엔 링크에 박힌 퍽이 클로즈업됐는데,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 완벽하고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였으니 당연한 거긴 했다.
“훌륭합니다. 다시 봐도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군요.”
“오, 쩐다. 빠르네.”
“그린아, 발차기할 때 말인데…….”
민그린 화백의 발차기 영상을 본 한이가 감탄하며 발차기를 할 때 이능파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
지극히 0반스러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다. 우리 빨리 앉자!”
김유리는 안심한 얼굴로 반 아이들을 이끌었다.
이동 중에 아이들이 신문부인 나와 황지호가 또 자리를 이탈하는 건 아닌지 물어봤다.
이번에는 사전에 무인 촬영 준비도 했고, 마족의 습격도 없으니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럼 이번에는 끝까지 같이 보시는 거예요?”
“어. 개막식 때 베스트 컷이 나온 위치에 신문부 부장 선배가 무인 드론을 보냈어.”
사월세음은 대놓고 기뻐하며 폐막식 일정표를 전개해 신나게 이야기했다.
비록 백호군의 벽사의 검무와 같은 신화적인 공연은 없어도, 고등학교 스포츠 교류전이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폐막식은 충실한 구성으로 이어졌다.
은광고 오케스트라부를 중심으로 현악부, 관악부, 피아노부 등에서 차출된 동아리원들의 연주로 폐막식이 시작되었다.
“이번 공연에 권제인 선생님도 나오셔?”
한이의 질문에 권레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멍한 표정을 짓는 권레나의 얼굴에선 피로감이 묻어났다.
‘아이스하키를 보러 간 아이들은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했다고 했어. 민그린이 나온 영상을 보니 권레나는 가장 끝 사월세음 옆자리에 앉았고. 그거 때문인가?’
한이가 다시 말을 걸기 전에 내가 권레나를 불렀다.
“부르는 것 같은데.”
“어? 그러니까…… 미안. 나 불렀어?”
권레나가 뒤늦게 한이의 질문에 답했다.
“선배님은 준비 과정에만 참가하셨어. 학생들 주도로 군사관학교 스포츠 교류전이 시작했으니, 그 취지를 생각해서 가능하면 학생들 공연으로 채우고 싶다고.”
권제인 이야기에 권레나에게 활기가 돌아왔다.
연주가 이어지는 가운데 응원단들과 선수들이 입장했다.
각각 떨어져 입장했던 개막식과 달리 선수단복과 응원단복을 입은 학생들이 학교나 선수, 응원단 여부 가릴 것 없이 섞여 들어왔다.
여러 복장이 섞이니 무질서해 보이긴 했지만, 축제의 끝에 어울리는 복작거림이 좋아 보였다.
입장 중에도 서로 대화를 하는 게 교류전을 거쳐 다들 부쩍 친해진 게 보였다.
폐막식의 마무리는 황지호의 돈지랄이 느껴지는 화려한 폭죽이었다.
은광 스타디움 위를 끊임없이 장식하는 폭죽 아래 귀빈석에 앉은 교사진들도 악수를 하고, 선수단들과 응원단들이 포옹을 하거나 하이파이브를 했다.
축제의 여운을 즐기며 반 아이들과 다 같이 스타디움을 빠져 나올 때였다.
“이제 다음 주부터 다시 바빠지겠구나. 다들 준비는 하고 있어?”
“아, 학생 대표 총선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헤어지기 전, 김유리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잊고 있었고 잊으려 했던 단어를 꺼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잖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