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8)
중간고사 소식에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갈렸다.
먼저 말을 꺼낸 김유리와 전 과목 40점을 받을 예정인 황지호는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이 몸은 언제 시험을 쳐도 아무 문제 없다.”
“계획 짜자! 이번에도 반 스터디 하고 싶어. 아빠가 자택 요양 중이셔서 이번엔 우리 집에서 하긴 어려울 것 같아.”
이 둘 외에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도 중간고사를 그냥 학교에 있는 일정 중 하나 정도로 느끼는 것 같았다.
“벌써 중간고사야? 미술부도 당분간 쉬겠네. 아직 완성 못 한 그림 있는데 어쩌지.”
“……경기 보느라 요새 협회 연구소 못 가서 스터디 못 갈 것 같은데. 그린아, 너도 스터디 빠져!”
“싫어.”
“이번에 일반 에너미학 듣는 선배님들이 스터디 파티 열 거라고 하셨어. 범위가 좀 많아서 같이 공부할까 고민 중이야. 부분 참가가 가능하면 반 스터디와 병행하고 싶어.”
민그린과 송대석, 한이의 말투에선 여유가 느껴졌다.
그에 반해 조금 불안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평소엔 수업은 잘 듣긴 했는데, 복습은 열심히 하지 않아서요. 이제 매일 공부해야 할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그런 행사도 있었군요. 매번 잊고 있다가 시험 전날 밤을 지새워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잘 보이고 싶은 분도 있으니 저번 시험보다 길게 준비해 좋은 성적을 받겠습니다.”
목우람은 권레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좋은 성적을 받을 모양인가 보다.
그런데 권레나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수업도 듣지 않은 주제에 겨우 하루 준비해서 낙제를 면했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화제는 잠시 목우람 쪽으로 돌아갔다.
“우람이는 1학기 때 해외에 있었죠? 시험은 어떻게 치셨어요?”
“원격 시험 보는 거면 커닝 방지 주술이 걸린 헤드기어 착용해야 하잖아. 그거 배송받아서 쳤겠지.”
“원격 시험도 학교에서 보는 일정에 맞춰서 치니까 여러 날에 걸쳐서 시험을 칠 텐데 밥은 먹고 다녔어?”
“지정된 협회 사무소나 대사관에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시험 전날에 그 앞에서 노숙했더니 감사하게도 숙식을 제공해 주셔서 시험 기간은 춥거나 배고프지 않았습니다.”
집 없고 돈 없는 호구를 불쌍히 여겨 직원들이 자비를 베풀었구나.
훈훈한 미담에 분위기가 다소 나아졌지만, 죽상인 아이 둘이 있었다.
“뭐? 미친, 무슨 시험을 벌써 봐. 개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중간고사? 맞다, 곧 중간고사였지. 왜 잊고 있었지?”
맹효돈과 권레나, 1학년 0반의 낙제 후보생 둘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우리는 두 사람을 위해서 학교 근처의 카페를 들러 스터디 계획을 짜기로 했다.
김유리의 집을 빌리기도 어렵고 개인 사정으로 스터디에 참가하기 어려운 아이들도 있어, 장소를 확보하고 일정을 맞추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기숙사생용 스터디 룸은 빌려 두긴 했는데, 통학생은 원칙적으로 이용이 금지되어 있어. 우선 기숙사생 중에 밤에 공부할 사람은 거기에서 공부하는 걸로 할까.”
“잘했다, 부반장.”
“……오늘부터 공부해야 할 것 같아.”
맹효돈과 권레나, 둘은 오늘부터 매일 스터디 룸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할 예정인 것 같다.
“공통 과목은 같이 공부하고 싶은데. 특히 실기는 팀으로 쳐야 하잖아.”
“실기는 아마 미궁형 이계 시뮬레이션 볼걸?”
“시뮬레이터 룸도 예약해 뒀어.”
“그럼 주중에는 1학년 건물에 있는 다용도실을 이용하고, 주말에는 스터디 카페에서 볼까?”
“학교 근처 스터디 카페 예약은 거의 꽉 찬 것 같던데.”
긴 대화 끝에 단체 스터디 계획이 잡혔다.
이번 중간고사의 목표는 늘 그랬듯이, 반 아이들이 낙제 없이 무사히 넘기는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주말이 시작된 것을 핑계로 오늘은 평소보다 늦은 시각에 일어났다.
어젯밤에 스터디 계획을 짜고 기숙사생들과 지익회관 스터디 룸에 들렀는데, 맹효돈과 권레나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늦게까지 함께 머물러 공부를 봐준 탓이었다.
맹효돈은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 돌머리로 한국 최고 명문고의 수학 수업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문제는 권레나였다.
‘최근에 들은 수업 내용 필기가 거의 없었어. 집중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권레나와 같은 과목을 수강 중인 목우람은 그 노트를 보더니 ‘레나 님은 머릿속에 다 넣고 계신 모양이군요! 저도 본받아 앞으로 필기를 삼가겠습니다!’라는 헛소리를 했다.
권레나는 얼굴을 새파랗게 바꾸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우람아, 필기 좀 보여줘…….’라고 답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본 목우람의 필기 상태는 개판이었다.
해외 생활이 긴 예비 마스터 크래프트맨께서는 영어 필기체와 그림을 섞어서 자유롭게 필기를 했는데, 권레나는 그게 어떤 과목의 필기인지 분간을 하지 못할 정도로 필기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등학교 수준의 음악 수업이나 클래식의 역사를 다루는 과목은 나도 도와줄 수 있지만, 음악과 이능을 접목한 과목은 잘 모르는데…….’
수강 신청을 하지 않아도 은광고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강의 영상을 볼 수 있으니, 따로 공부해서 내가 가르치는 방법도 있긴 할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벼랑 끝에 서 있는 맹효돈을 도울 시간이 줄어든다.
현재 기숙사 멤버 중 수학을 선택한 건 맹효돈 하나라 따로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다.
권레나 건은 목우람의 교수 능력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아예 권레나는 따로 혼자 공부하는 게 낫나? 아니, 그렇게 하면 다른 기숙사 애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또 권레나가 그걸 신경 쓸지도 몰라.’
사월세음이 권레나를 걱정하며 공통 과목 공부를 돕겠다고 하니 그녀의 혈색이 나빠졌다.
기숙사생들끼리 모여서 공부하는 게 권레나에게 오히려 독이 되는 게 아닐지 고민되었다.
딩동.
디바이스 화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으니, 메시지 수신 알람이 떴다.
‘신문부 단체 메시지방에서 온 메시지잖아.’
어제 폐막식의 여파도 있어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와 첨부 파일이 천 건이 넘어갔다.
숫자가 커 들어가기 꺼려졌지만 메시지가 더 밀리기 전에 확인하기로 했다.
메시지방에 들어가는 건 오래 걸렸는데, 막상 한 번 보기 시작하니 관객석에선 확인할 수 없는 구도의 사진들이 올라와 있어 눈을 떼기 어려웠다.
그중 장남욱과 유상훈의 사진은 나중에 보내 주려고 따로 저장해 두며 스크롤을 내리니, 문새론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문새론] 수상한 부반장님이랑 사관학교 1학년 기수장 장남욱이랑 아는 사이지?
[문새론] 인터뷰 좀 부탁함요!
그 말에 기꺼이 응했다.
장남욱을 인터뷰하면 엄청 길게 답할 테니 그걸 요약하는 과정이 좀 번거롭겠지만, 내가 하는 게 장남욱한테도 편할 거다.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메시지방에는 메시지가 얼마 쌓이지 않았는데, 장남욱이 보내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길어 분량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마지막 농구 시합을 응원단석에서 함께한 장남욱은 아쉬워하면서도 유상훈을 칭찬하고 은광고의 승리를 축하했다.
[장남욱] 상훈아, 정말 멋진 시합이었어. 은광고의 응원도 좋았고, 은광고 농구팀의 팀플레이랑 MVP를 한 네 슈퍼 플레이도 인상 깊었어. 상훈이 네가 자유투를 할 때 눈을 감고 쐈잖아. 눈을 감고 슛을 성공시키는 건 프로 농구 선수도 어렵다고 하는데 정말 굉장해. 시후는 자기가 눈을 감고 슛을 쏘면 백보드도 못 맞출 것 같다고 했어. 시후 말고도 다른 선배들도 네 연습량이 어마어마할 거라고 하더라.
[유상훈] ㄱㅅ
[나] 장남욱 인터뷰 좀
[장남욱] ……그래.
나와 유상훈이 지나치게 짧게 대답하니 장남욱이 섭섭한 눈치였지만, 이제 익숙해졌는지 금방 회복했다.
[장남욱] 의신이는 신문부였지? 곧 중간고사니까 가능하면 빨리 만나서 이야기하자. 어젯밤에 은광고 근처 연수원에서 뒤풀이하느라 아직 은광구에 있어. 일요일 오후까지 복귀하면 되니까 직접 만나자.
[유상훈] 나 가도 됨?
[나] ㅇ
[유상훈] ㅇ
[장남욱] 그럼 나중에 보자, 얘들아! 우리 뭐 먹을까? 고기 먹을까?
[유상훈] ㅇ
본격적으로 중간고사 대비 모드에 들어가기 전 이 둘과 만나서 인터뷰 겸 놀기로 했다.
어디에서 만나고 뭘 먹을지는 장남욱이 제안했는데, 은광고에 다니는 나와 유상훈보다 은광고 근방의 정보에 밝은 것 같아 다 맡기기로 했다.
장남욱이 세운 계획에 맞춰 내일 오전 일찍 만나기로 약속하고 메시지방을 닫았다.
‘그럼 그 아이를 만나러 가 볼까.’
유상훈과 장남욱 외에도 다음 주가 되기 전에 만나야 할 상대는 또 있었다.
* * *
폐쇄 구역, 구교사.
내 착한 제자는 시간에 맞춰 찾아왔다.
“스승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염준열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2학기가 개학한 후, 나와 염준열은 스승과 제자로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염준열은 다음 주부터 선거 운동도 하고 중간고사 준비도 하는 데다 플레이리스트 촬영도 있으니 지금 만나야 했다.
“숙제 확인을 할게.”
“네! 스승님, 확인 후 조언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염준열이 기척 죽이기를 선보였다.
염준열의 기척 죽이기는 그의 불꽃 같은 이능파가 한 겹 한 겹 사라지는 것 같은 모양새로 발휘되었다.
섬세하게 이능파의 기척이 사라지는 게, 염준열의 노력이 새삼 느껴졌다.
‘이 정도면 용족의 눈도 잠깐 속일 수 있겠네. 청룡이나 용제건 정도 되는 용족은 못 속이겠지만.’
눈을 감으면 어디에 서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염준열의 존재감은 옅어졌다.
이동 중에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주요 시나리오에서 살아남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마침 기척에 민감한 후배가 주변에 있어서요. 그 아이의 반응을 참고해 감각을 속이기 위해 노력했더니 크게 나아진 것 같아요.”
염준열은 칭찬에 몹시 기뻐하며 답했다.
그 기척에 민감한 후배는 독고미로를 말하는 걸까?
독고미로는 플레이리스트 촬영으로 부딪칠 일이 많을 테니 내 제자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기척 죽이기는 꾸준히 연습해. 다른 사람에게 네가 그 정도로 기척을 죽일 수 있는 건 숨기고. 그 후배한테는 도움을 청해도 괜찮아.”
“어? 혹시 그 후배가 누군지 아시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아는지 캐물을 줄 알았는데, 염준열은 묻지 않고 감탄만 했다.
“역시 스승님은 모르시는 게 없네요!”
그 이후로는 바로 수업 이야기를 했다.
기척 죽이기 연습을 할 거냐는 염준열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와 있을 때는 나하고만 할 수 있는 연습을 하자.”
“스승님하고만 할 수 있는 연습이라면…… 오늘은 이능 삼키기를 하나요?”
“이능 삼키기는 다음에 할 거야.”
내 제자는 의아한 표정을 잠깐 짓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새로운 수업을 한다는 말이 기쁜 것 같았다.
“숙제도 잘해 오고 성장했으니 오늘은 다른 걸 할게.”
나는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홍룡소환(紅龍召喚)’을 사용합니다.〉
파아앗!
내 손 위로 열린 아공간의 틈을 타고 홍룡이 등장했다.
지금 염준열이 다루는 홍룡보다 훨씬 크고 강렬한 이능파의 불꽃을 휘감은 홍룡의 등장에 내 제자가 눈을 크게 떴다.
“오늘은 홍룡을 다루는 연습을 할 거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