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학생 대표 총선거 (9)
존경하는 스승 적벽괴도의 홍룡을 직접 보는 건 염준열의 목표였다.
그것을 이룬 지금, 염준열은 환희하면서도 절망했다.
세계 10대 프로 플레이어 팀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가 아버지고, 유서 깊은 용족의 후예가 어머니인 염준열의 주변엔 강한 이들이 많았다.
청룡, 용제건, 염방열, 방랑벽이 있는 스승 등 지금의 염준열이 당해 낼 수 없는 강자들이 그의 주변에 상시 존재했다.
그러나 광림은 이 세계에 하나 뿐이기에 그들 누구도 자신의 힘을 불꽃의 용의 형태로 구현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이게 스승님의 홍룡……!’
적벽괴도가 불러낸 홍룡과 눈이 마주친 순간, 염준열은 마치 하늘 저 너머에 있는 별을 올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스승의 경지가 너무나도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멀구나.’
잠시 넋을 잃고 홍룡을 바라보던 염준열의 고개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염준열은 무의식중에 스승과 그의 홍룡을 감히 바라볼 생각을 못 하고 시선을 낮췄다.
한편, 적벽괴도를 만나기 위해 염준열이 구교사에 방문했다는 걸 안 용제건이 공간 뒤에 몸을 감추고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제건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홍룡을 주시했다.
용제건은 적벽괴도 조의신이 부른 홍룡의 위상도, 염준열이 느끼는 좌절과 성장통도 모두 황홀하게 느꼈다.
* * *
구교사 교실 한편에서 공간이 아주 미약하게 일렁였다.
염준열은 감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내가 잘못 볼 리가 없었다.
‘저기에 용제건이 숨어 있나 보네.’
슬슬 내가 염준열을 부를 때가 됐으니, 호위할 겸 염준열을 따라다녔던 게 분명했다.
홍룡을 보겠다고 미궁의 벽을 부수며 폭주하고도 보지 못했으니 몸이 더 달았던 걸까.
염준열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내가 부른 홍룡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은, 혹시…… 미래의 저인가요?”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빌린 이 모습은 성장한 염준열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지금 이 모습을 염준열의 미래라고 칭할 수는 없었다.
내가 광림으로 사용한 시점의 염준열은 많은 것을 잃은 상태다.
친구의 사망으로 폭주를 통해 각성한 능력도 있는데, 이런 모습이 염준열의 미래가 되진 않을 거다.
그런 계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가 염준열을 가르쳐서 그 능력을 습득하게 할 예정이었다.
짧은 사고 끝에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 대답에 염준열의 고개가 더 내려갔다.
목소리에서 완전히 활기가 사라졌다.
“그렇죠? 스승님의 모습이 너무 멀어요. 제가 스승님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조금도 들지 않아요. 그러니 스승님이 미래의 제 모습일 리가 없죠.”
……말실수를 했다!
내가 부른 홍룡을 보는 걸 기대하던 염준열이니 그저 기뻐할 줄 알았는데!
염준열이 어른스러운 후예라고 하나 아직 10대 청소년기를 보내는 중이고, 플레이리스트 촬영과 응원단 학생회장 선거와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으니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을지도 모른다.
내 제자의 정신적인 건강을 고려하지 못하다니 스승 실격이다.
내가 부른 홍룡이 안절부절못하며 고개 숙인 염준열의 주변을 둥둥 떠다녔다.
“스승님의 홍룡에게는 아무도 소(少) 자를 붙이지 않겠죠.”
점점 땅을 파는 내 제자를 두고 볼 수 없어 손을 뻗었다.
지금의 염준열보다 조금 나이를 먹은 모습을 빌린 데다 염준열이 고개를 숙인 탓에 내 손은 쉽게 염준열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몇 번 쓰다듬으니 염준열이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눈만 올려서 나를 봤다.
“……스승님?”
염방열이나 청룡한테 걸리면 손목이 잘릴지도 모르지만 한 번 더 쓰다듬고 손을 뗐다.
“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성장할 거야. 내가 잘 가르칠게.”
염준열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믿을 수 없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가면 너머로 곧게 염준열을 응시했다.
내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전해진 건지, 마음을 다잡은 염준열의 표정이 결연하게 바뀌었다.
“약한 소리를 해서 죄송합니다. 스승님이 저를 이렇게 믿어 주시는데 정작 저는 저를 믿지 못했네요.”
염준열이 허공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파앗!
손끝 위로 아공간이 열리고 불꽃과 열기 너머로 홍룡이 형상화되었다.
아공간 속에서 등장한 염준열의 홍룡은 내가 부른 홍룡에 비해 몸집도 작고 감고 있는 불꽃도 약했지만, 내가 부른 홍룡을 보는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염준열의 마음가짐이 그대로 홍룡에게 반영된 것 같았다.
“그럼 오늘 수업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염준열의 홍룡이 형상을 잃을 만큼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지만, 염준열은 다시는 약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오늘 수업으로 얻은 게 전혀 없는데도 염준열은 내내 밝은 표정을 지었다.
수업을 끝내고 헤어지기 전, 중간고사 때 1등을 노리느라 무리할까 봐 이번엔 등수보다는 선거 준비와 오늘 수업 복습을 우선할 것을 돌려서 권하니 염준열이 힘차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답했다.
답하는 걸 보니 염준열은 중간고사 때 또 수석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 같다.
내 제자를 생각하며 구교사를 빠져나가던 중, 디바이스가 메시지 수신을 알렸다.
딩동.
아직 발신자 이름은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용제건] 의신아, 네가 준열이 머리 쓰다듬은 건 청룡하고 염방열에게 비밀로 할게.
용제건에게 내 정체에 이어 또 약점을 잡혔다.
용제건이 저 약점으로 날 어떻게 하진 않겠지만 제 유희를 위해 무언가 요구할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맞아떨어져 용제건은 곧장 원하는 바를 전했다.
[용제건] 직접 네 용을 본 소감을 말하지 못해서 아쉽네. 다음엔 더 가까이에서 보여줘.
[용제건] ^^
이모티콘 ‘^^’에 용제건이 황홀하게 웃는 얼굴이 겹쳐 보였다.
조만간 용제건에게 홍룡을 보여 줘야 할 것 같다.
* * *
일요일 오전, 장남욱과 약속한 시각.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장남욱과는 유상훈보다 일찍 만나기로 했다.
장남욱은 나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덤을 데리고 있었다.
장남욱보다 나를 먼저 발견한 도시후가 인사했다.
“안녕! 따라왔어!”
그건 보면 안다.
도시후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옆에 있는 인물이 신경 쓰였다.
초면이었지만, 얼마 전 사진으로 봤던 남궁규연이었다.
“얘가 그 무명의 초신성 맞음? 소문보다 별로 안 수상하게 생겼네.”
대체 어디서 무슨 소릴 들었기에 저러는 건가.
홍규빈과 이곳저곳 닮은 구석이 많긴 한데 그것 외에도 묘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아, 의신아. 얘네들도 오늘 이 근처에서 약속이 있어. 시후는 복귀하기 전에 황명은광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고 규연이는 은광고 친구랑 만날 예정이라는데, 약속 시간 될 때까지 같이 카페에서 기다리겠다고 해서…….”
“남욱이가 혼자 심심할까 봐. 같이 있어 주려고!”
“기수장님을 위해 같이 있어 준 거임요.”
도시후와 남궁규연과 꽤 친한지 셋이서 격 없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둘 다 TC 그룹과 남궁 그룹의 자제들인데, 준군인의 신분으로 집안 따지지 않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대견했다.
현재 TC와 남궁에 얽힌 일들을 생각하면 더 그랬다.
‘저 둘의 배경이 배경이니, 장남욱이 또 사건에 말려들지도 몰라.’
복잡한 심정으로 농담을 주고받는 셋을 지켜보던 중, 기시감이 점점 명확해졌다.
남궁규연의 말투가 그랬다.
‘말투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랑 닮은 거 같은데.’
혹시 남궁규연의 은광고의 친구가 그 인물일까?
둘 다 평소 명사형 종결 어미에 ‘요’를 붙인다.
이 말투는 웹상에서 자주 쓰고 실제로 쓰는 사람이 많긴 하니 억측일 수도 있겠지만.
“아, 시간 됐다. 가야 할 거 같아.”
“나도 친구한테 도착했다고 연락 왔음요.”
“그래, 조심하고 복귀 시간 늦지 않게 잘 와. 혹시 예정이 길어질 거 같으면 먼저 연락해. 외박계 양식 보내 줄게.”
“넵.”
장남욱이 꼬박꼬박 잔소리를 하는 사이, 남궁규연이 내쪽으로 왔다.
“님 디바이스 코드 좀요.”
“그래.”
친구의 친구와 말을 트고 연락처를 교환하는 건 흔한 일이다.
홍규빈과 장남욱의 말만 들었을 땐 종잡을 수 없는 괴짜 같았는데, 생각보다 사교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순순히 코드를 교환했을 때였다.
“아, 이번 일은 감사요. 뭐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하고. 우리 오빠는 마음껏 부려 먹으셈요.”
남궁규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 없이 물러났다.
‘이번 일에 내가 개입한 걸 눈치챘나? 친오빠가 야근하는 원흉이 나인 것도 아는 거 같은데……. 장남욱이나 홍규빈과 내 친분을 생각하면 짐작 못 할 것도 아니긴 하지만.’
홍규빈의 동생이라서 그런 걸까.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남궁규연은 초면에 어딘가 수상한 인상이었던 홍규빈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둘이 카페 밖으로 나섰을 때, 장남욱이 A4 용지 수십 장이 묶인 파일철을 두 개 꺼내 하나는 내 앞, 하나는 자신의 앞에 뒀다.
“의신아, 네가 준 질문의 답과 예상 추가 질문과 그에 따른 답변을 미리 준비해 왔어!”
A4 용지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장남욱의 잔소리가 쓰여 있었다.
예상대로 이번 인터뷰 기사 작성은 요약이 가장 큰일일 것 같다.
디바이스에 종이를 스캔해 요약을 하다 보니 유상훈이 등장했다.
유상훈이 정시에 딱 맞춰 왔는데도 그 요약 작업이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장남욱 말 개 많아.”
“나도 내가 말이 좀 많은 편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미리 이렇게 정리해 온 거야. 나름 줄인 건데…….”
“뭐래.”
유상훈은 종이 뭉치를 한 번 보고 코웃음 쳤다.
30분가량 장남욱의 잔소리를 듣자 그 자리에서 인터뷰를 정리하는 건 포기하고 그냥 놀러 가기로 했다.
장남욱이 예약한 곳은 갈비 뷔페였는데, 갈비와 함께 쌈밥을 먹을 수 있도록 마련된 라디키오, 신선초, 깻잎 같은 잎채소와 유자청이 들어간 특제 소스가 훌륭했다.
응원단과 농구 대표 팀 회식으로 잔뜩 먹었을 장남욱과 유상훈은 고기도 쌈밥도 아주 잘 먹었다.
고기는 몇 인분 먹었는지 짐작이 안 가지만, 불판이 일곱 번 정도 갈린 건 기억이 났다.
다음 일정은 소화도 시킬 겸, 코인 배팅장으로 향했다.
“꼴찌가 간식 사기 하자.”
“할래!”
저번에 VR 게임방에 놀러 갔을 때 유상훈이 승리를 독식했던 게 분했던 걸까.
아니면 농구에서 대패한 게 걸렸던 걸까.
장남욱은 흔쾌히 승부에 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타율 꼴찌는 주오 드래곤즈 골수 팬 장남욱이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거랑 하는 거는 다르구나.’
장남욱은 공이 안 보인다면서 별 처녀의 눈을 쓸까 고민한 것 같으나 이능은 사용 금지라는 암묵적인 룰에 따라 그 뜻을 접었다.
간식은 아이스크림 체인점에서 먹었다.
장남욱은 가을 야구 시즌을 맞이해 우승 후보 주오 드래곤즈와 콜라보레이션한 제품을 골랐고, 나와 유상훈은 물주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유상훈은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뭐냐?”
“용용이.”
주오 드래곤즈 로고가 박힌 아이스크림에 마스코트 용용이 스트랩이 딸려 왔는데, 나와 유상훈은 미련 없이 장남욱에게 그 스트랩들을 넘기기로 했다.
실컷 놀고 기숙사로 향할 때였다.
딩동.
기다린 것처럼 황지호가 메시지를 보냈다.
[황지호] 저택으로 와라.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냐고 묻기 전에 황지호가 이유를 덧붙였다.
[황지호] 흑마와 마법진으로 이야기하기로 했다. 직접 대화는 시켜 줄 수 없지만 참관하도록.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