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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08화 (308/925)

52. 연휴와 개교기념일 (5)

추석 당일, 기숙사에 남은 1학년 0반 학생은 넷에서 셋으로 줄었다.

조의신이 자리를 비워 남은 건 권레나, 맹효돈, 목우람 셋.

셋만 남게 되자 대화 수가 크게 줄었다.

평소라면 권레나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했겠지만, 아직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맹효돈이 수학 문제로 고통받는 중에 가끔 목우람이 한 마디씩 던지곤 했다.

“아, 왜 답이 안 맞는 거야.”

“세 번째 줄에서 합성함수를 전개하던 중에 f와 g를 바꿔 쓰셨습니다.”

“……너 수학 선택 안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아냐.”

“교과서에 나온 예제와 유제는 위에 나온 설명만 보면 풀 수 있지 않습니까?”

맹효돈은 외계인을 보는 눈으로 목우람을 보다가 다시 식을 전개했다.

권레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텅 빈 노트를 응시했다.

‘나도 공부해야 하는데…….’

그러나 권레나는 좀처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저번 기말고사 때는 열심히 공부해서 중간 정도 되는 성적을 냈는데, 아주 옛날 일, 아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한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딩동.

그때, 권레나의 디바이스에서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알람음이 들렸다.

오늘 만나기로 한 그녀의 언니, 이여름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언니] 지금 은광고 앞에 왔어. 늦어서 미안해.

[언니] 지금 나올 수 있어?

어차피 공부도 안 되니 권레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갔다가 올게. 저녁 먹고 올지도 몰라. 늦으면 먼저 먹고 있어.”

“어…….”

맹효돈은 수학 문제에 기력과 영혼을 뺏긴 건지 선대답을 했지만, 목우람은 덩달아 일어나며 물었다.

“레나 님, 어디 가십니까?”

‘레나 님’이라는 말이 좀 그렇긴 해도 권레나는 순순히 답했다.

“학교 앞에 나갔다 올게. 가족이랑 약속이 있어서.”

“그러십니까? 레나 님의 가족분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응!”

권레나는 머리와 옷을 가다듬으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정문 앞, 그녀의 언니, 이여름이 권레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이여름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말 없고 무뚝뚝한 언니였지만 표정은 부드러웠다.

권레나는 오랜만에 가족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 들떠서 혼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카페로 이동한 후에도 권레나가 일방적으로 말을 하고 이여름이 듣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이여름이 먼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이거 너야?”

이여름은 홀로그램을 두 개 띄웠다.

첫 번째 홀로그램에는 청소년 수련회에서 권제인과 함께 연주한 장면이, 두 번째 홀로그램에는 독고미로의 버스킹 영상이 찍혀 있었다.

권레나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여름이 알아본 것 같았다.

권레나가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여름이 말했다.

“잘됐다. 바이올린 배우고 싶어 했잖아.”

“……기억하고 있었어요?”

“응.”

왠지 그 말을 들으니 눈물이 날 것 같아 권레나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꽉 움켜쥐며 버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다음에 이어진 말은 권레나의 눈물을 쏙 들어가게 했다.

“그 사람들하고는 연락해?”

그 사람들.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건지 지칭하지 않았지만 권레나는 바로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권레나의 부모와는 연락이 끊긴 지 한참 되었다.

3월에 온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는데 요새는 바쁜 건지 통 연락이 없었다.

권레나의 부모가 그녀에게 불필요한 메시지를 보내 자신들을 번거롭게 만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에 추석에 안부 인사도 보내지 못했다.

“아뇨, 요새 바쁘신 거 같아요.”

“……그래.”

“언니는요……?”

“취업했을 때 연락했는데 답이 없었어. 아, 명함 나왔어. 자.”

이여름이 권레나에게 명함을 여러 장 건넸다.

명함에는 ‘남궁물산 이계 산업 1사업부 사원 이여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계 산업 쪽은 플레이어가 아니면 들어가기 힘들다는데…… 언니가 정말 노력하셨구나.’

이여름은 기숙사가 있는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 부모와 연락을 끊었다.

그녀들의 부모는 이여름이 연락이 없는 것도 권레나의 탓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이여름은 부모의 눈을 피해 권레나에게 연락을 하거나 선물을 하곤 했다.

이여름은 작년에 취업을 눈앞에 두고 한창 바쁠 시기에 아르바이트를 해 채찍 아이템을 선물했을 정도로 권레나를 위했다.

‘그때는 언니가 나 때문에 취업에 실패할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이여름은 무사히 대기업의 상반기 공채에 최종 합격하여 취직에 성공했다.

이여름은 권레나가 불안해하는 걸 알았기에 가장 먼저 연락해 그녀를 안심시켰다.

“네가 그 사람들이랑 거기에 간 거…… 문제 안 됐어?”

환몽 경매 이야기가 나오자 권레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여름이 자신을 탓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걱정해서 묻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새삼 그 말에 자신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유유자적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던 탓이다.

“아뇨…….”

이여름은 권레나의 속을 모르고 안도했다.

“다행이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보호자 필요한 일 있으면 그 사람들 이름 말고 내 이름 써.”

그때, 이여름의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여름이 미안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권레나의 어두워진 안색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회사에 가야 할 것 같아. 저녁 같이 못 먹어서 미안해.”

“……괜찮아요. 바쁘신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

“저녁 꼭 먹어.”

이여름이 당부했으나 권레나는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권레나는 이여름과 헤어진 후에 에어보드를 타는 대신 은광고 안을 멍하니 걸어 다녔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야지.’

그러나 그 조금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권레나는 해가 진 후에도 같은 반 아이들이 있을 곳으로 가지 못했다.

아주 느리게 기숙사를 향해 걷는 동안 마음도 발걸음도 무겁게 느껴졌다.

*    *    *

권레나와 피로 이어진 가족은 권제인 하나뿐이지만, 권레나는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럼 호적상의 가족을 만나러 간 건가.’

순간 황명 타워 옥상에서 떨어뜨린 파렴치한 부부가 생각났지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지금 그 부부는 영원의 호수 팀에서 관리하는 중이다.

오늘이 추석이라고 하나 권레나가 명절에 받았을 푸대접을 생각하면 더욱 철저하게 감시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부모가 아닌 다른 가족일 거다.

‘권레나에게 언니가 있었지.’

백호군과 올무를 배웅하는 사이 권레나가 만났다는 가족의 추리를 마쳤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는 천사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목우람이 말을 걸었다.

“레나 님이 스터디 룸이 있는 지익회관이 아니라 기숙사 쪽으로 오셨을 가능성을 생각했는데 여기엔 안 오신 것 같습니다.”

“디바이스로 연락해 봤어?”

“레나 님께 아직 메시지를 보내 본 적이 없어서…….”

목우람은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레나 님’이라는 낯간지러운 호칭은 아무렇지 않게 쓰면서 왜 메시지는 못 날리는 걸까.

“내가 메시지 보내 볼…….”

“아! 저기 레나 님이 오십니다!”

목우람이 급히 흥분하며 내 말을 끊었다.

목우람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어둠 속에 사람 실루엣이 하나 보였다.

평범한 인간은 스킬을 써야 알아볼 만한 거리였는데 어떻게 바로 권레나인 걸 안 건지 모르겠다.

훤한 달 아래 서 있는 권레나의 얼굴이 파리하게 보였다.

목우람과 함께 권레나가 있는 쪽으로 가니 뒤늦게 우리를 알아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저녁 먹었어?”

“음…….”

권레나는 내 물음에 제대로 답변하는 대신 억지로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딱히 플마고의 고이고 썩은 석유가 아니더라도 권레나가 저녁을 안 먹었다는 건 알아챌 수 있을 거다.

‘권레나의 언니는 유일하게 가족처럼 지냈다는 묘사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나?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부모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조사해 봐야겠네.’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기분 전환할 겸 저녁 밖에 나가서 먹자. 내가 살게.”

권레나가 저녁을 굶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내 말에 권레나가 난색을 보였다.

“어, 아, 안 그래도 되는데.”

“2반 반장은 시험 기간에 애들한테 피자 샀대. 부반장으로서 낼게.”

“감사합니다! 사실 외식이 가능할 정도의 소지금이 없어서요. 기숙사 저녁 시간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어…….”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의 미담에 이어 목우람이 저런 발언을 하니 권레나가 가지 않겠다고 하기 어렵게 되었다.

맹효돈은 공부를 하기 위해 일찍 기숙사에서 저녁을 챙겨 먹었다고 하는데, 시험공부에 지친 짱돌 선생께선 두말없이 외식 권유에 응했다.

추석이라 그런지 문을 연 곳이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 프랜차이즈 피자 전문점이 문을 열어 아이들에게 저녁을 살 수 있었다.

맹효돈과 목우람이 각자 피자 한 판을 해치우는 동안 권레나는 샐러드 바에서 가져온 요구르트푸딩 하나와 피자 한 조각을 먹은 게 고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권레나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    *    *

추석 다음 날, 여전히 연휴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오전에 중앙 구역 제1양호실에 방문해 김신록과 검사를 받게 되었다.

김신록은 적호와 함께 제1양호실로 왔는데, 적호는 검사 결과가 나온 후에도 김신록을 5천 살이 아니라 5세 아이 대하듯 애지중지 다뤘다.

“전부 정상 범위군요.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피로가 쌓인 플레이어들도 이 정도 수치가 나올 겁니다.”

“그럼 더 쉬어야겠구나.”

“오늘은 이만 교직원 전용 사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는…….”

“내일이 10월 3일인데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이냐.”

적호의 말에 김신록이 입을 다물었다.

개천절이 호족에게 있어 중요한 날인 건 분명했다.

그런데 황지호가 저택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그날에 뭔가를 하는 건가?

“10월 3일에 뭘 하나요?”

“조촐한 잔치를 할 겁니다. 내일은 우리의 생일이니까요.”

“……우리?”

생일에 ‘우리’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건가?

내 질문에 적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태어난 날이 불분명합니다. 하지만 저와 황호, 백호, 청호가 진족으로서의 삶을 부여받은 날은 10월 3일입니다.”

그렇다면 내일이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의 생일인 셈이다.

설정집에는 백호군의 생일란이 ‘?’로 되어 있었는데!

미친 망겜에서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 있으면 설정집에 표기를 해야지, 왜 안 한 걸까.

게임 속에서는 축하받을 상황이 아니었던 걸까?

그렇다면 내일 반드시 축하하러 가야 했다.

내일 일정이 지금 이 순간 확정되었다.

“선물 사 갈게요.”

“조의신이 와 주는 것만으로 기쁠 겁니다.”

“아뇨. 꼭 사 갈게요.”

적호는 계속 선물은 필요 없다고 했으나 반드시 선물을 준비해 갈 생각이었다.

그러자 김신록이 제안했다.

“그럼 케이크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케이크요?”

그건 미식가인 황지호가 준비하지 않았을까.

왜 굳이 케이크를 추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김신록이 목소리를 낮추며 적호 쪽을 흘끗 봤다.

“황호 님께서 달토끼떡에 떡 케이크 제작을 의뢰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적호 님의 요청으로 곶감이 많이 들어갔다고 들어서요.”

아들을 공격한 뒤끝이 생일까지 이어졌나 보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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