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연휴와 개교기념일 (6)
은광한빛보육원은 개원 이래에 가장 떠들썩한 추석 연휴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황명건설이 한 리모델링 덕에 규모는 세 배 커지고, 보육원이 받는 후원금은 그보다 더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 수가 늘어날 줄은 몰랐어.’
최근 황명 재단이 은광한빛보육원 외에도 기부하는 보육원을 하나 더 늘렸는데, 시설이 많이 낙후되어 황명건설 측에서 안전 검사를 하는 동안 그곳 아이들을 이곳에서 맡게 되었다.
교류가 없었던 두 보육원의 원장들은 이번 일로 말을 트고 함께 추석을 보내며 많이 가까워졌다.
어쩌면 이대로 두 보육원이 통합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이 누나, 저기 호랑이들이 와요!”
순한 인상의 아이가 저편을 가리켰다.
한이가 나온 광일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이 아이는 한이와 금방 친해졌다.
또 이 아이는 한이 외에도 매일 보육원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는 4인조 남녀를 호랑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한이가 아이에게 왜 저들을 호랑이라고 부르냐고 묻자, 아이 대신 4인조 남녀가 급히 말을 끊으며 이렇게 말했었다.
―저번에 호랑이 놀이를 했더니, 호랑이로 보이나 봅니다!
―어…… 어흥!
대체 호랑이 놀이가 뭔지 모르겠지만, 4인조 남녀가 어흥거리며 놀아 주자 그 아이가 너무나 좋아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여튼 호랑이라고 불린 4인조 남녀가 쭈뼛거리며 한이 쪽으로 왔다.
“저기, 그러니까…….”
“이걸 받아 주셨으면 하는데…….”
그들이 내민 건 수박 하나는 들어갈 만한 상자였다.
상자는 푸른 한지로 포장되어 있었는데, 손잡이에 달린 청색 비단 끈에 ‘달토끼떡’이라고 작게 쓰여 있었다.
‘떡인가? 달토끼떡 한정 모시송편은추석 날에 먹었는데 왜 오늘 또…….’
한이가 머뭇거리자 네 남녀가 울먹거렸다.
저들이 뜬금없이 우는 걸 몇 번이나 본 한이를 포함한 보육원 사람들은 ‘사연이 있나 보다.’, ‘마음에 병이 있는 것 같으니 잘 대해 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좋은 연휴에 저들이 울기 전에 한이가 상자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아뇨,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열어 봐요!”
한이가 상자를 받자 그들은 곧장 표정을 바꾸고 포장을 뜯어 달라, 안을 봐 달라 요청했다.
상자 안의 내용물은 떡케이크였다.
설탕으로 장식된 오색 두텁떡과 찹쌀떡, 꽃떡을 시작으로 각양각색의 떡들이 케이크 형태로 쌓여 있었다.
꿀과 설탕이 아낌없이 들어갔는지 달콤한 향이 확 뿜어져 나와 한이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 얼굴을 본 남녀들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꼭 오늘 같이 먹고 싶었습니다.”
한이는 얼떨결에 자리를 잡고 네 남녀와 떡케이크를 먹게 되었다.
달토끼떡에서 만든 떡케이크답게 한입 먹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오후에 공청훤 선생님 오신다고 했으니까 같이 먹어야지!’
공청훤은 한이만큼 단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떡케이크는 그에게 추천해도 괜찮을 만큼 맛있었다.
……어쩐지 곶감떡이 많은 것 같긴 했지만.
* * *
10월 3일 아침.
나는 일찍 MITRON에 방문했다.
옥토연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주문한 떡케이크는 두 개인데 둘 다 곶감떡 비중이 만만치 않았다.
특히 황명호 대저택으로 배송 예정인 떡 케이크에는 특별히 호랑이에서 이미지를 따온 곶감 장식을 더했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간 백호군이 케이크를 못 먹는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서 최고의 케이크를 고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늘 사람이 많은 MITRON에는 나와 파티시에 둘뿐이었다.
어제 김신록의 제안을 듣고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케이크 예약을 했더니 MITRON에서 파티시에로부터 직접 전화가 왔다.
파티시에는 MITRON은 연휴 기간 휴무가 예정되어 있는데, 예약 란의 휴일 기간을 설정하던 도중 오류가 일어나 실수로 예약이 된 것 같다고 설명하였다.
MITRON 말고 다른 베이커리를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그가 물었다.
―요청 사항이 많던데요. 혹시 기념일 케이크인가요?
그 말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그는 그날 출근해 케이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1학년 0반 학생들도 자주 저희 가게를 찾지만, 조의신 학생은 가장 큰 단골이잖아요. 이번 한 번만 예외로 해 둘게요.
1학년 0반 아이들과 MITRON을 방문하거나 빵셔틀 방윤섭이 자주 내 이름으로 예약한 빵을 찾으러 갔으니 내 이름을 기억한 것 같았다.
연휴의 오전인데 괜히 나 때문에 일하는 게 싫어서 사양하려 했지만 파티시에가 이미 계량을 시작했다며 웃었다.
―연휴 내내 쉬면 손이 굳어요. 케이크 하나 정도 만드는 건 괜찮아요.
파티시에는 손을 풀기 위해 간단한 케이크를 만드는 것처럼 말했으나 결과물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내가 주문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결과물이 나와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오늘 황명호 대저택에서 열릴 잔치의 주역, 백호군, 황지호, 적호의 이미지에 맞춰 맞춤 케이크를 주문했다.
내가 부탁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케이크에 흰색, 금색, 붉은색이 들어갈 것.
둘째, 가능하면 호랑이 모양 장식을 넣을 것.
첫 번째 주문이야 생크림과 캐러멜, 붉은 사탕무를 활용하면 되니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호랑이 쪽은 그리 기대하지 않았는데…….’
내가 생각한 건 생크림으로 데포르메된 호랑이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파티시에가 내 눈앞에 내보인 건 호랑이 예술품이었다.
세 개로 갈라진 영역 위, 슈거 크래프트로 만들어진 백호, 황호, 적호 세 호랑이가 당장이라도 케이크 위를 뛰어다닐 것처럼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예술품을 만들어 낸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직접 설탕으로 만드신 건가요?”
“슈거 크래프트를 배운 적이 있어서요.”
파티시에는 액자에 걸린 자격증들 쪽에 눈길을 줬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불어로 쓰여진 파티시에와 쇼콜라티에 자격증과 영어로 쓰여진 슈거 크래프트 자격증이 보였다.
자격증 옆에는 국제 기능 올림픽 대회 미예 분과 제과 제빵 부문을 비롯한 온갖 대회 수상 경력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정도 실력자면 에어호텔 수석 파티시에 자리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왜 고등학교 근처에서 베이커리를 운영하는지 의문스럽게 느껴졌지만 나름의 장인 철학이 있는 건가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문득 파티시에가 케이크를 포장하다가 도중에 멈추고 혼잣말하듯 말했다.
“멋지지 않습니까? 아름답고 달콤한 예술 작품이라니…… 기온이 높으면 쉽게 녹아 버리는 걸 제외하면 완벽하죠.”
그의 눈에 삼색으로 빛나는 케이크가 비추어졌다.
파티시에의 말투에서 장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본인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졌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케이크를 보던 파티시에가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질문은 굳이 겉치레로 답할 필요가 없었다.
MITRON의 파티시에가 만드는 작품은 전부 아름다우면서도 맛있었고, 신작을 기다리고 챙겨 먹는 우리 반 아이들 얼굴은 행복해 보였으니까.
“저도 멋지다고 생각해요.”
파티시에가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저런 얼굴을 하니 평소 접객할 때 보이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때보다 훨씬 인간미가 넘쳤다.
포장을 마친 파티시에가 말했다.
“이건 선물입니다.”
“네?”
뜬금없이 당한 소매 넣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연휴에 나와서 예술품 같은 맞춤 케이크를 만들고는 돈도 안 받겠다니.
제값을 치르겠다고 했지만, 파티시에는 완강히 거절했다.
“대신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약속한 시각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말씨름을 길게 할 수도 없어 더 자주 방문하겠다고 말한 후 돌아섰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반 아이들하고 어디 놀러 갈까. 간식은 내가 MITRON에서 사고…….’
시험 후의 계획을 짜며 향한 황명호 대저택의 미로 정원 밖 별채.
연회장으로 사용되는 원통형의 별채 안은 다섯 개의 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하얀색, 황금색, 붉은색, 푸른색, 은색의 휘장과 장식품이 곳곳에 배치된 게 눈에 띄었다.
‘케이크 주문할 때 색을 다섯 개 넣었어야 했나.’
오늘 이 자리에 없을 청호와 은호의 색은 제외한 게 실수인 것 같다.
“어서 와라, 조의신. 잘 왔다.”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는 황지호를 필두로 주역인 호랑이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각자 자신을 상징하는 색의 옷을 입은 게 생일이라 신경 쓴 티가 났다.
나와 함께 연회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은호의 후예들도 은색의 예복을 걸치고 있었다.
드레스 코드를 언급하지 않아서 그냥 캐주얼한 재킷을 입고 왔는데, 더 신경 쓸 걸 그랬다.
“그럼 노래 부르고 케이크 잘라요!”
“의신이 오빠, 같이 불러요!”
5천 년을 넘게 산 호랑이들은 의외로 평범한 생일 파티에 가깝게 잔치를 진행했다.
생일 축하곡도 한반도 전통 악곡이나, 해외의 클래식을 연주하는 대신 평범하게 ‘생일 축하합니다’를 불렀다.
아마 인간에 가까운 삶을 산 은호의 후예들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화려한 장식에 비해 소소한 인원수와 평범한 파티 내용이었지만 호랑이들의 생일잔치는 훈훈했다.
떡케이크를 두고 황호가 다섯 개의 칼을 불러냈다.
“그러면 함께 케이크를 잘라 볼까. 청호의 몫은 호족의 수장인 내가, 은호의 몫은 은호의 형제인 백호가 대신 자르겠다.”
백호군이 은호의 형제였구나.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생일 파티에 온 것에 이어 숨겨진 설정을 알게 되었다.
나와 호랑이 후예들의 박수 속에서 세 호족이 케이크를 다섯 등분했다.
크게 다섯 등분한 케이크는 다시 여러 조각을 냈는데, 백호군의 몫은 적호가 손수 잘라 건네줬다.
“백호, 곶감떡을 먹어 보십시오. 특별히 고사신서(攷事新書)에 등장한 조리법에 맞춰 빚었다고 합니다. 자, 아들아. 네 몫도 여기에 있다.”
적호는 곶감떡 더미를 김신록과 백호군에게 각각 내밀었다.
곶감을 좋아하는 김신록은 아버지가 내미는 떡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나 백호군은 아니었다.
“…….”
백호군은 묵묵히 접시를 받아들였지만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미세한 표정 변화였으나 나 같은 썩은 물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왕왕!
올무가 백호군의 발치에서 자신에게 달라며 깡충깡충 뛰었다.
착한 올무가 대신 먹어 주려는 모양이었다.
“선물이야.”
천사가 이미 나서긴 했으나 백호군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다섯 개가 아닌 세 가지 색밖에 없는 케이크였지만 다행히 호랑이들은 기뻐하며 선물을 받아 줬다.
* * *
학생들 다수가 귀가하며 기숙사는 한산해졌으나 여전히 사고를 치는 이들이 있기에 연휴 기간에도 지익회는 쉬지 못했다.
올해 연휴 사고의 주역은 2학년 0반으로, 사건은 추석에 일어났다.
추석 당일, 금찬솔과 왕찬솔을 필두로 열 명이 넘는 0반 학생이 제갈재걸과 함께 추석을 보내겠다며 기숙사에 남았다.
이들은 기숙사 건물 앞에 절구와 용저를 들고 와 떡방아를 찧고 송편을 빚으며 떠들썩하게 보냈다.
일견 평화로운 모습이었으나, 어떤 용감한 자들이 송편 소 일부를 한약재로 바꿔치기했고 하필 처음으로 시식한 제갈재걸이 그 바뀐 송편을 먹고 말았다.
―제갈 쌤, 송편 맛 어때요?
―진짜 저희가 레시피 연구 열심히 했어요!
―이번 컨셉은 단짠단짠인데요. 출석 번호 기준으로 단맛은 홀수 번호 담당이고, 짠맛은 짝수 번호 담당이에요. 어느 거 먼저 드셨어요?
―…….
토트의 가호로 거짓을 고할 수 없는 제갈재걸은 달다고도, 짜다고도 말할 수 없었다.
그냥 그 송편은 달지도 짜지도 않고 쓰고 맛없는 한약 맛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갈재걸을 두고 이상하게 생각한 2학년 0반 학생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어떤 미친놈들이 우리 제갈 쌤한테 맛대가리 없는 걸 먹여!
―짜증 나…… 제갈 쌤이 우리가 만든 것보다 저놈들이 만든 걸 먼저 먹은 게 짜증 나!
―죽었어!
쓸데없이 우수한 2학년 0반의 집요한 조사 결과, 범인 그룹은 방송부로 밝혀졌다.
방송부는 여전히 사약 맛 다쿠아즈 복불복 사건을 마음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분노한 2학년 0반은 방송부 부실의 정수기 물에 쓴맛이 나는 미각 테스트 용액, PTC 용액을 섞어 복수를 감행했고 그 외에도 기숙사에서 자잘한 복수를 하는 바람에 학교는 혼돈에 빠졌다.
박승현은 지익회 소속 멤버로서 거주 구역에 일어난 난리를 수습해야 했다.
박승현의 그 모험담을 듣던 목우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수고를 이해해 줬다.
“고생하셨습니다.”
“하하하…… 계이담 선배님이 안 계셨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
박승현은 목우람이 기숙사에 입소한 이후 그를 챙겼다.
둘은 마주치면 인사를 하거나 잡담을 나눌 만큼 친해진 상태였다.
“1학년 0반은 다른 학년 0반 같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하하하, 솔직히 입학 첫날에는 긴장했는데…….”
“입학 첫날이요?”
“아, 반 애들한테 못 들었어? 1학년 0반 애들이 입학 첫날에 기숙사 건물에서 장난쳤는데…….”
박승현은 첫날 1학년 기숙사 건물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해 줬다.
박승현은 그날 장난으로 알려진 투신 사건의 목격자였다.
한밤중, 갑자기 긴 머리의 여자아이가 창문 밖으로 추락한 장면은 그의 뇌리에 똑똑히 새겨져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목우람의 표정은 점점 묘하게 변해 갔지만, 박승현은 알아채지 못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