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 번째 시도 (2)
사월세음에게서 도망치고 난 후, 정신을 차렸을 땐 입학 첫날 밤에 서 있던 장소에 있었다.
그날만큼은 아니었지만 밤바람이 많이 차가워진 탓에 몸이 떨렸다.
‘추워…….’
그 생각이 든 순간 다시 밑도 끝도 없이 죄책감이 느껴졌다.
‘세음이는 그날 더 춥고 힘들었을 텐데……!’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기억 속의 부모가 뭘 잘했다고 우냐며 매섭게 다그치는 목소리가 새삼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젠 권레나에게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없는데도 머릿속에선 툭하면 그들이 했던 말들이 맴돌았다.
그리고 요즘엔 머릿속에서 부모의 비난을 한참 듣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난 이제 버려진 걸까……?’
갑자기 연락이 끊겨 더는 욕을 들을 일이 없어지자 처음에는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권레나는 불안해졌다.
부모가 자신을 버린 게 아닐까 하고.
한 번 그런 의심이 생기자 연이어 의문이 생겼다.
‘내가 없었다면 언니랑 부모님은 화목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환몽 경매와 엮일 일도 없지 않았을까? 부모님 말씀대로 다 나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제 버리기로 한 걸까?’
궁지에 몰리니 권레나의 양부모가 뱉은 폭언이 전부 진실처럼 느껴졌다.
세상에는 별 이유 없이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가 존재하고 권레나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권레나의 부모는 이여름은 평범하게 대했다.
이여름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몰래 가서 본 세 사람은 겉보기엔 그리 나쁘지 않은 가족으로 보였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정말 다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낳아 준 부모에게도 버림받을 정도면 정말 내가 못된 아이가 아닐까?’
가족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비참함에 이어 든 기분은 자기혐오였다.
‘그날 의신이가 날 구하지 말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조의신과 함근형의 도움을 받아 시작한 은광고 생활은 꿈처럼 멋지고 눈부셨다.
반 아이들도 다 좋은 아이들뿐이라 힘든 일이 있어도 함께 이겨 낼 수 있었다.
권제인을 만나 바이올린을 선물 받고 레슨을 받게 된 사건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러나 이제 권레나는 사월세음의 친절함을 견딜 수 없었다.
공부에도, 시험에도 집중할 수 없어 낙제까지 해 버렸다.
권제인은 권레나가 연주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눈치챘는지 레슨을 중단시켰다.
권레나는 이제 반 아이들과 어울리고 공부를 하고 또 바이올린을 연주할 자신이 없었다.
‘……정말 내가 살아 있어서 다행인 걸까?’
살고 싶은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이제 권레나는 자신이 살아 있어도 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권레나는 두 번째 시도를 하기 위해 난간을 향해 걸어갔다.
걷기 시작하자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어 권레나의 발목을 잡았다.
겨우 난간에 가까워졌을 때, 어둠 사이로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그 무언가는 권레나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착륙했다.
권레나가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보고 힘없이 입을 열었다.
“의신아……?”
* * *
권레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묻고는 입을 다물었다.
권레나가 품에 안은 바이올린 케이스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
막상 눈앞에 권레나가 위태롭게 서 있는 걸 보니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 돌아가자.”
“……먼저 가.”
나는 말을 더 걸지는 않았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권레나는 두 번째 시도를 그만둘 마음이 없는 듯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했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어떤 수를 둘지 침착하게 생각하자. 권레나를 구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
권레나를 이 자리에서 힘으로 제압해 안전한 장소로 데려갈 수도 있고, 함근형 선생님께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최후의, 최악의 수단이 될 거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권레나가 내가 파악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세 번째 시도를 할지도 모른다.
저번처럼 운이 좋으면 운명력이 발동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권레나의 목숨을 운에 걸고 싶지는 않았다.
‘권제인이 친고모인 점을 밝혀서 권레나를 소중히 여기는 가족이 있다는 걸 알려야 할까?’
이건 판단하기 모호하지만 악수가 될 가능성이 컸다.
권레나의 양부모는 쓰레기였지만 언니는 아니었다.
권레나는 자신을 생각해 주는 가족이 없어서 두 번째 시도를 한 게 아니다.
오히려 출생을 비밀을 아는 게 독이 될 거다.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플레이어인 권제인과 혈연관계인 자신이 환몽 경매에서 아무것도 못 했다며 큰 죄책감에 짓눌릴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단어’의 인물로서 객관적으로 권레나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음을 인지시켜 죄책감을 덜어 줘야 할까?’
수를 떠올리다 보니 정체를 밝힌다는 생각까지 미쳤지만 이건 사실상 자살수였다.
같은 고등학교 1학년생인 내가 사월세음을 구했다는 사실을 알면 권레나가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결국 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권레나가 이곳에 온 결정적인 이유를 파악해야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기다려야 해. 권레나의 말을 듣고 내가 해 줘야 할 말이 뭔지 냉정하게 판단하자.’
권레나를 이 장소에 계속 세워 두기 싫었다.
그래도 버텨야 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권레나가 입을 열었다.
“……의신아, 나한테 시간 쓰지 마. 나한테는 그런 가치가 없어.”
권레나는 오열을 참는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권레나가 저런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하는 걸 보고 있으니 속이 터질 것 같았지만 침착하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의신이 너는 입학 첫날 내 얘기 들었으니까 알고 있지? 나 환몽 경매장에 있던 거.”
권레나는 자포자기한 것처럼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정을 떼고 이대로 돌아섰으면 하는 건지, 환몽 경매에 관한 얘기를 계속 꺼냈다.
“나 거기 한 번만 간 거 아니야. 올해 간 게 세 번째였어. 플레이어들이 팔려 가든 말든 가만히 있었어……! 그리고 그중에는…….”
차마 사월세음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떨구었다.
“내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그걸 보기만 했어…….”
“…….”
“그런데 아무런 처벌도 안 받았잖아? 부모님 말씀대로 내가 못된 애라서…… 그래서 이제 벌을 받는 거야. 더 공부할 자신도 없고 학교에 다닐 자신도 없어. 바이올린도…….”
권레나는 말할 기력이 없는지 말을 멈췄다.
숨을 몰아쉬는 권레나를 보며 나는 그녀가 한 말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환몽 경매장.
경매에 오른 플레이어들.
권레나의 죄책감.
머릿속에 얼마 안 되는 단서를 조합하고 생각을 거듭하니 권레나에게 해 줄 말이 떠올랐다.
‘그 사실을 전하자.’
각오를 다진 후 권레나에게 말했다.
“넌 그날 보고만 있던 게 아니야. 너의 말대로 네가 못된 아이라면, 그날 보고만 있었겠지.”
“……?”
“그 자리에 있던 참석자를 구하려고 했잖아.”
권레나가 고개를 들며 의아해했다.
그냥 권레나를 달래기 위해 아무 소리나 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것도 못 했다고 했잖아!”
권레나의 마지막 말은 비명처럼 들렸다.
나는 그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아니야, 내가 그날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알아.”
“그게 무슨…….”
권레나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흐린 눈으로 나를 봤다.
‘믿게 하려면 증거를 보여 줘야 해.’
나는 다시 광림을 발동시켰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광림의 대상으로 선택한 것은 염준열.
선택한 캐릭터의 외형을 빌리자 내 모습이 변해 갔다.
염준열의 모습으로 변하는 나를 보고 권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홍룡소환(紅龍召喚)’을 사용합니다.〉
파아아!
염준열의 광림을 발동시키자 이공간의 틈 사이로 홍룡이 등장했다.
불꽃을 휘감은 용이 권레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봤다.
“적벽괴도…….”
그 말에 홍룡이 권레나를 걱정스럽게 보던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도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하여튼,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알아.”
“다, 당신은 제가 아무것도 안 한 걸 잘 아실 거 아니에요!”
권레나는 갑자기 존댓말을 쓰며 당황했다.
이 모습으로 오래 있으면 권레나의 혼란을 가중시킬 것 같아 광림을 해제했다.
홍룡이 사라지고 내가 다시 조의신의 모습으로 돌아오자 권레나가 안도한 기색이 느껴졌다.
권레나가 다소 진정한 걸 보고 말을 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권레나가 용기를 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로 했다.
“그날 너는 나를 보내려고 했잖아. 또 내 말대로 동전을 버려서 침묵맹세도 하지 않았어.”
그날, 막 17세가 된 권레나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처음 만난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염준열 선배님 정도 되는 급이면······ 이런 곳에 안 와도 될 텐데.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귀가하시는 게 어떠세요? 선배님 부모님은 안 오신 거 같은데, 걱정하시지 않을까요?
그뿐만이 아니라 권레나는 내 말대로 침묵맹세의 순은 동전을 버렸다.
“지금 네 손에는 그 낙인이 없잖아.”
만약 나를 환몽 경매 시작 전에 내보내려고 시도한 것과 침묵맹세의 순은 동전을 버린 게 발각되었으면 권레나는 환몽 일당과 그녀의 양부모에게 크게 보복당했을 거다.
그런데도 권레나는 용기를 내서 행했다.
사월세음을 구할 만한 힘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환몽 경매 참가자 중에서 염준열 선배님의 모습을 한 나를 보고 도망가라고 권한 것도, 손바닥에 낙인이 찍히지 않은 것도 너 하나뿐이었어.”
권레나의 동그란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너는 그날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야.”
덜그럭.
권레나가 품에 안고 있던 바이올린 케이스를 떨어뜨렸다.
권레나는 자유로워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기 시작했다.
“우…… 으…….”
바이올린 케이스는 처음부터 제대로 닫혀 있지 않았던 건지 그대로 열려 안의 내용물이 보였다.
그 안에는 권레나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권레나의 양언니인 듯한 인물과 찍은 사진.
현악부에 들어가서 받았던 연습용 바이올린, 활, 예비용 현.
우리 반 아이들과 찍은 단체 사진들.
권제인과 같은 무대에 섰을 때 착용한 로얄 블루 사파이어가 장식된 리본.
그리고 예전에 권레나가 떨어뜨렸던 리본을 담아 돌려준 봉투가 들어 있었다.
‘아직도 그 리본 갖고 있구나.’
그 소중한 것들 대부분이 은광고에 들어 온 이후로 얻은 것들이었다.
“사월세음한테 그 사실을 밝히고 싶으면 도와줄게. 걔는 내 정체 알아.”
권레나는 울면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권레나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기다리는 사이, 바이올린 케이스에서 떨어진 물건을 주웠다.
천자(天子)의 갑판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 멀리 날아간 바람에 구석까지 이동했을 때였다.
나는 그제야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다.
‘……누가 있어.’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플레이어의 감각을 속이고 이 정도까지 접근했다니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보통 인물이 은광고에 있을 턱이 없지만, 기척을 죽이고 이 정도로 접근했다면 아주 우수한 플레이어일 것이다.
‘옥상 입구 쪽은 경계하고 있었는데…… 벽을 타고 올라온 건가!’
옥상 저편, 누군가가 기척을 죽이고 20층짜리 건물의 벽을 타고 기어 온 듯했다.
권레나의 정 반대편 난간에 매달린 인물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목우람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