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 번째 시도 (3)
목우람은 얼마 전 박승현에게 ‘입학 첫날 1학년 0반이 친 장난’에 관해 들었다.
입학 첫날 밤, 옥상과 17층 사이에서 긴 머리카락의 여학생이 떨어진 사건이 그 장난의 내용이었다.
1학년 0반은 첫날에 기숙사에서 과격한 장난을 쳤지만, 지익회장 성시완과 1학년 0반의 담임이자 학생부장인 함근형에게 크게 혼난 후 얌전해졌다는 게 주변의 의견이었다.
목우람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1학년 0반 학생 중에 그런 과격한 장난을 할 인물들은 없어 보였으니까.
‘굳이 따지면 지호가 그럴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뭔가 이상해.’
목우람은 자신의 감을 믿었다.
목우람의 감은 호구 인생 탈출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뮤즈와의 만남과 이어졌기에.
뮤즈에 얽힌 사항이란 생각에 목우람의 머리는 평소보다 비상하게 돌아갔다.
‘떨어진 건 정말 사람이었나? 허수아비나 더미가 아니었을까?’
목우람은 짧은 사고 끝에 그건 분명 여학생이라고 단정지었다.
17층과 20층 사이에서 떨어지는 여학생을 본 기숙사 소속 학생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동체시력과 감각을 모두 속이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문제가 됐던 시각은 기숙사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라고 했어. 그리고 기숙사 교칙에 따르면 은광고 소속 학생이라도 기숙사생이 아닌 학생은 8시 이후에는 출입이 금지된다.’
그렇다면 떨어진 여학생은 기숙사 소속 학생일 터.
후보가 둘로 줄었다.
‘1학년 0반 기숙사 소속 여학생은 둘, 레나 님과 한이다. ……그리고 한이는 머리가 짧아.’
단서를 얻기 위해 반장 김유리에게 입학 첫날 1학년 0반의 등교생 숫자를 물었다.
―반장, 1학년 0반은 원래 등교하는 학생이 더 적었다고 들었습니다. 입학 첫날엔 몇 명이나 등교했습니까?
그러자 김유리는 흔쾌히 답했다.
―나랑 한이랑 의신이랑 지호! ……아, 의신이랑 지호는 중간에 이사장실로 불려 갔으니까 두 명이네.
그 말을 듣고 목우람은 확신했다.
권레나는 입학 첫날 옥상에서 떨어졌고 이는 장난으로 무마되었으나 그녀가 마음을 추스를 때까지 등교를 못 했을 거라고.
목우람은 그 원인을 짐작하지는 못했다.
‘그 이능 바이올린이 관계가 있나?’
예전 권제인은 목우람의 스승에게 선물용 바이올린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가족이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이면 선물할 예정’이라고 언급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그 이능 바이올린은 권레나의 손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때 스승님의 뮤즈는 모든 가족을 잃었다고 알려졌는데…… 웹상에도 딱히 눈에 띄는 정보도 없고…….’
목우람의 추리는 결국 난항에 부딪쳤다.
여기까지 오니 그저 권레나를 걱정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다들 늦네요. 무슨 일이 있는 걸까요? 의신이가 갔으니까 별일 없겠지만요!”
사월세음은 태평한 어조였다.
조의신은 목우람을 구해 주기도 했으니 그 신뢰의 원인은 가히 짐작이 갔으나 뮤즈의 안전을 제 눈으로 확인할 때까지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자꾸 권레나가 떨어졌다는 1학년 건물 옥상이 떠올랐다.
“……잠시 나갔다가 오겠습니다.”
“어, 의신이가 기다리고 했는데…….”
“한 명만 남아 있으면 괜찮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디바이스로 연락하겠습니다.”
“아, 그렇네요. 의신이는 둘 다 남아 있으란 말도 안 했죠. 다녀오세요!”
그렇게 목우람은 1학년 전용 기숙사 건물로 향했다.
정신없이 올라가던 중 옥상에서 불꽃이 터지는 장면을 목격해 더욱 빠르게 기어올랐다.
그리고 옥상에서 마침내 권레나를 발견했다.
* * *
“……여기에서 뭐 해?”
“기숙사 벽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오르던 중에 옥상에 불덩어리가 보여서 서둘러 왔습니다…….”
홍룡을 보고 스피드를 낸 건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내가 광림을 쓰기 전부터 기숙사 벽을 타고 올라온 거잖아. 대체 왜 엘리베이터를 놔두고 기숙사 벽을 올라온 거야.’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목우람은 한 손으로 난간을 잡고 남은 한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한 손으로 건물에 매달린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안정적인 자세였다.
목우람은 숨을 가다듬고 여전히 매달린 상태로 말했다.
“입학 첫날에 우리 반 사람들이 친 장난에 관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반에 그런 장난을 치실 분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장난이 아니라면 떨어진 사람은…….”
목우람은 그날 떨어진 게 권레나라는 걸 추측해 낸 건가.
그 생각에 다시 슬퍼진 건지 목우람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레나 님은 시험 기간 내내 우울하고 불안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레나 님과 연락이 안 되니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한참 부반장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더 그랬습니다.”
그래서 혹시 권레나가 옥상에 서 있을까 봐 이곳으로 온 건가.
권레나는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기에 아마 두 사람을 많이 기다리게 했을 거다.
그런데 기숙사 벽을 타는 것보다 엘리베이터를 쓰는 게 더 빠르고 안전할 텐데 왜 그런 짓을 한 걸까.
도약 같은 이동형 스킬이 5 이상은 되어야 수직 이동 시 엘리베이터보다 빠르지 않을까?
“……왜 벽을 타고 올라왔어?”
“엘리베이터로 이동하는 사이 레나 님이 떨어지시면 어떡합니까!”
목우람이 격분하여 외쳤다.
같은 반 아이, 그것도 뮤즈로 모시는 권레나가 이런 선택을 하려 한 걸 알았으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거다.
목우람은 일견 침착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패닉에 빠진 것 같았다.
“기숙사 벽을 이용해 이동하면 레나 님이 떨어지시더라도 제가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면에서 떨어져도 받을 수 있게 나선형으로 건물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목우람에게 기숙사 벽을 나선으로 기어 올라오고, 또 그 짓을 하는 중에 위에서 떨어지는 사람을 구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인가.
지극히 냉정하고 날카로운 사고와 추론을 바탕으로 결론에 다다르고 행동에 옮겼는데, 정작 그 결과물이 또라이짓이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연 목우람은 면접 한 방에 0반에 배정받을 법한 범상치 않은 인재였다.
‘그래도 매달리는 건 그만두고 그냥 올라오거나 밑으로 내려갔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목우람의 신체 능력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걱정하는 마음은 기특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목우람이 나와 권레나의 비밀을 알게 됐어.’
목우람은 내가 광림을 사용한 직후 옥상에 도착한 듯했다.
‘그 단어’와 침묵맹세, 환몽 경매가 언급되었으니 목우람은 나와 권레나의 비밀을 알아챘을 거다.
무엇보다 이렇게 울고 있다는 게 증거였다.
권레나의 처지를 알고 저리 슬퍼하는 것일 테니까.
“레나 님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시는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다시 터진 목우람의 눈물이 그칠 기색이 없었다.
‘정말 권레나를 생각하는구나.’
또라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건 탐탁지 않았으나, 오늘 한 행동은 훌륭했다.
만약 오늘 내가 늦었다면 목우람이 권레나를 받아 냈을 테니까.
고심 끝에 목우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렸다.
“앞으로 ‘님’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좋아할 것 같은데.”
“……고작 그런 걸로요?”
“그래.”
“……해 보겠습니다.”
목우람은 고심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나 님…… 아니, 레나…… 를 잘 부탁드립니다.”
목우람은 그렇게 말하고 밑으로 기어 내려갈 준비를 했다.
권레나 곁에서 안 떨어지려고 할 줄 알았는데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비밀을 안 사람이 늘어났다는 걸 알면 혼란스러워하시겠죠. 나중에 진정하시면 말을 전해 주세요.”
나와 권레나가 이야기를 마친 후에도 접근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우람은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밑으로 향했다.
그냥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엘리베이터를 타면 될 걸, 왜 저런 수고를 하는 걸까.
역시 목우람의 사고 회로는 비범했다.
* * *
다음 날, 권레나는 학교를 쉬었다.
권레나의 결석 사실을 알자 목우람도 조퇴하여 기숙사 건물을 오르려 했다.
어제는 외벽 감시 CCTV를 꺼 놓은 데다 운이 좋게 들키지 않아서 괜찮았지만, 오늘 또 목우람이 그 짓을 하면 분명 들킬 거다.
지익회와 함근형 선생님의 일거리가 늘기 전에 말리기로 했다.
“걔는 어제 권제인 선배님이 데리고 갔어. 당분간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머물 것 같아.”
“……레나 님, 아니, 레나가 스승님의 뮤즈를요?”
어젯밤의 통곡의 여파로 잔뜩 부은 눈을 한 목우람이 눈을 끔뻑이며 생각에 잠겼다.
“레나는 괜찮아요? 몸이 많이 안 좋나요? 어제 연락받고 깜짝 놀랐어요.”
사월세음은 어제 기다리다가 결국 권레나와 만나지 못한 채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를 기다리게 한 점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을 거야. 영원의 호수 팀 닥터가 요새 주치의를 맡고 있다고 들었어.”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레나가 그분께 검사받았다고 했죠.”
나는 그날 권레나와 상의 끝에 권제인을 불렀다.
어제 권레나는 목우람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상태가 안 좋았다.
그동안 잘 먹지도 자지도 못했는데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오랜 시간 울었으니 정상인 게 이상했다.
권레나가 한사코 괜찮다고 했으나 나는 양호실에 가든지, 권제인을 부르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권했다.
―……응, 나도 권제인 선배님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권레나는 양호실에서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대신, 권제인과 이야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팀 닥터 핑계를 대긴 했지만 주요 목적은 권제인과 대화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권제인은 아직 출생의 비밀에 관해 말할 결심이 안 선 것 같던데…….’
권제인은 내가 연락하자마자 바로 달려왔다.
권레나의 상태를 보고 괴로운 표정을 하면서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여전히 말할 자신이 없는 모양인 듯했다.
그래도 둘이 이제 환몽 경매 건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으니 한 걸음 나아간 셈이다.
아이들에게 권레나의 결석 소식을 전하고 조례를 마쳤을 때였다.
“아, 의신아.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 가기 전에 같이 자료 준비하고 싶은데, 점심 같이 먹고 얘기하자.”
“그래.”
김유리의 제안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광고는 일정상 시험이 끝나면 바로 학생 대표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1학기 때도 늘 있던 대표 회의였지만, 이번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는 조금 특별했다.
4/4분기부터는 저번 총선거에서 선발된 대표들이 회의를 이끌게 된다.
그러니 3학년에겐 이번이 마지막 대표 회의나 다름없었다.
‘후임들을 서포트하기 위해 4/4분기에도 출석한다고는 하지만 아마 거의 관여하지 않겠지. 이번에 뽑힌 대표들이 일을 잘하기도 하고…….’
갑자기 3학년의 졸업이 성큼 다가온 기분이 들었다.
* * *
영국, 맨체스터.
예정보다 영국 체류가 길어졌으나 서돌은 매일이 즐거웠다.
어느 괴짜 한국 소년과 친해졌는데, 미적인 센스가 훌륭한 데다 이능까지 우수해 즐거운 마음으로 그 소년과 교류를 나눴다.
오늘도 그는 소년을 만나기 위해 왔다.
“중간고사는 잘 쳤어요? 이제 시험도 마쳤는데 한국으로 갈 생각 없어요? 당신의 재능에 감히 잣대를 들이댄 아이들에게 뭔가 보여 줘야 하지 않겠어요?”
서돌은 늘 그랬듯 인사 대신 한국에 같이 가자며 징징거렸다.
오늘 소년은 진용인지 뱀인지 모를 무언가를 자수로 새긴 초록색 무광 벨벳 재킷을 입고 있었다.
‘저거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데……. 어디에서 모티브를 따온 거지?’
전위적인 옷차림의 소년은 서돌의 말에 진중하게 답했다.
“늘 그랬듯이 꾀돌이 씨의 제안에 따를 생각이에요. 하지만 귀국하기 전에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러니까 그 일이 대체 뭔데요?”
소년은 늘 그 질문을 모호하게 답했으나 오늘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위해 되찾아야 할 게 있거든요. 드디어 단서를 잡아서 조만간 움직일 생각입니다.”
“되찾아야 할 것?”
“힌트는 제 옷입니다.”
서돌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감탄사를 터뜨렸다.
잘 보니 소년이 오늘 입은 옷은 한국이 자랑하는 화가 사제가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존재가 그려져 있었다.
“도품(盜品), ‘이무기의 귀천’을 되찾을 거예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