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 번째 시도 (4)
밤 10시가 넘은 시각.
거주 구역 1학년 기숙사 건물 1층 남녀 공용 휴게실 곳곳이 차 있었다.
저마다 그룹을 이뤄 스크린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다들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와, 미로가 공부하는 장면이 나와요!”
“……필기한 걸 보니 강의는 다 들은 것 같은데.”
“바쁘신 중에도 열심히 준비하셨나 봐요. 굉장하시네요.”
우리가 보고 있는 프로그램은 ‘플레이리스트’.
내 제자 염준열이 보조 MC를 맡고 우리 반 독고미로가 출연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막바지에 다다른 플레이리스트의 생존자는 현재 넷.
오늘 경선 결과를 바탕으로 생방송으로 최후의 3인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기숙사생들은 함께 모여서 플레이리스트를 시청하기로 했다.
권레나는 영원의 호수 팀 빌딩에 있어서 함께할 수 없었지만.
‘권레나가 자리에 없는 게 아쉽네. 학교도 계속 쉬고 있긴 한데 권제인과 있으니 괜찮겠지.’
지금은 생방송 무대를 앞두고 출연자의 경연 준비 과정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독고미로 차례에는 자신이 부를 곡을 들으며 중간고사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대기실에서 독고미로가 노트를 보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온 염준열을 보고 공부 관련 질문을 하자 염준열이 막힘 없이 답했다.
“헐, 저 선배는 1학년 때 배운 거 다 기억하나 보네.”
“이번에도 염준열 선배님이 2학년 차석이라고 들었어요!”
중간고사 때 공부하는 모습을 비롯한 준비 과정이 방송된 후, 바로 라이브 무대가 시작됐다.
그러나 염준열의 소개 멘트가 끝났는데도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래?”
“라이브 방송이니까…… 방송 사고인가 봐요.”
화면은 어두운 무대 위에 서 있는 독고미로를 비추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독고미로는 카메라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보고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중요한 무대에서 방송 사고가 터졌는데도 전주가 흐르길 기다리는 독고미로의 눈에 패기가 넘쳤다.
약 10초 정도 되는 방송 사고 후.
드디어 무대가 밝아지고 전주가 흘렀다.
그러자 독고미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준비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독고미로가 부른 곡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발매된 옛 댄스곡의 커버 버전이었다.
춤 동선이 길어 무대를 넓게 사용하고 고음 파트도 많았는데 독고미로는 무리 없이 춤과 노래를 잘 소화해 냈다.
‘여전히 제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데도 이 정도라니. 굉장하다……!’
장시간 카메라 앞에 서 있으면 정신적으로 지치는지 2절 후렴이 지나자 힘이 빠진 게 보였으나 실수는 없었다.
독고미로가 특별 심사 위원으로 초청된 원곡을 부른 가수를 향해 손가락으로 총을 쏘는 포즈를 취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무대가 끝났다.
“미로 연습 때보다 잘한 거 같아요!”
“……좋은 무대였습니다.”
사월세음뿐만 아니라 권레나가 없어서 그런지 기운 없이 앉아 있던 목우람도 그런 코멘트를 할 만큼 훌륭한 무대였다.
원곡을 부른 가수도 자기보다 잘하는 것 같다며 거듭 칭찬을 했다.
여전히 카메라를 어색해한다는 점, 뒤로 갈수록 박력이 떨어진다는 점 등을 지적받았으나 무대 직전에 일어난 방송 사고에도 잘 대처한 부분을 비롯해 칭찬받은 점이 훨씬 많았다.
“빨리 투표하죠!”
“아, 맞다. 어디로 메시지 보내면 되냐?”
“지금 자막으로 보이는 코드를 입력한 후에 독고미로를 써서 보내면 돼요.”
아이들이 저마다 디바이스를 꺼내 독고미로에게 한 표씩 던졌다.
우리 반 말고도 다른 반 아이들도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고 디바이스 화면을 전개하는 게, 독고미로에게 표를 던지는 중인 것 같았다.
플레이리스트 참가자의 개인 무대가 끝나자 짧은 토크 후 단체 무대를 했다.
플레이리스트 타이틀 송에 가사를 붙여 편곡한 곡이었는데, 랩만 하던 내장산의 성자가 보컬 파트도 짧게나마 맡은 게 인상적이었다.
내장산의 성자는 콤비 미션을 하며 친해진 독고미로와 함께 하이라이트 파트를 불렀는데, 둘이 서로 마주 보며 음을 맞추는 장면에선 방청석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자정이 되면 플레이리스트 최후의 3인을 정하는 메시지 투표를 마감합니다.
출연자들이 단체 곡을 부르고 나니 벌써 자정에 가까워졌다.
염준열이 멘트를 마치자 화면 한구석에 12시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떠올랐다.
“다 보내셨죠?”
“어, 이거 두 번 보낸 거 같은데 괜찮냐?”
“여러 번 보내도 한 번만 집계될걸.”
출연자뿐만 아니라 반 아이들도 덩달아 긴장해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끝난 이후 보내는 메시지는 전부 무효 처리됩니다.
―그럼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10 .
―9 .
―8 .
메인 MC 최지나와 염준열이 번갈아 가며 숫자를 외쳤다.
두 사람이 천천히 숫자를 세는 동안 4명의 얼굴이 차례로 클로즈업되었다.
0을 외치자 화면 구석에 있는 시계가 사라지고 주변이 고요해졌다.
몇 초간 뜸을 들이던 최지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최고 득표자부터 발표하겠습니다. 지금 이름이 불린 플레이어는 최종 라운드로 진출합니다.”
최종 라운드에 진출하는 건 셋.
셋 중에서 바로 우승자를 뽑기 때문에 지금 이름이 불리는 건 사실상 마지막 방송까지 가는 사람이 될 거다.
플레이리스트에서 PPL을 하며 유명해진 태블릿 타입 디바이스로 결과를 확인한 MC가 멘트를 했다.
―2위와 아주 근소한 차이네요.
―네, 1위와 2위를 차지한 플레이어 모두 멋졌죠.
―플레이리스트 세미파이널, 1위로 최후의 3인이 될 플레이어는…….
박진감 넘치는 BGM이 멎자 어지럽게 움직이던 스포트라이트가 한 사람을 비추었다.
―독고미로! 축하드립니다!
―축하합니다!
화면 너머로 관객석에서 독고미로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숙사 휴게실 여기저기에서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미로가 최종 라운드에 진출했어요!”
“뽑힐 거라 믿었습니다. 훌륭한 무대였으니까요.”
바로 옆에 서 있던 내장산의 성자가 웃는 얼굴로 독고미로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자 독고미로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직 생존 여부가 결정되지 않은 출연자들은 독고미로와 한 번씩 포옹한 후, 무대 뒤에 마련된 세 개의 의자 중 하나에 먼저 오르는 걸 배웅했다.
“잘됐다……!”
한이는 기뻐하는 얼굴로 화면을 봤다.
그러나 그 얼굴엔 기쁨 외에도 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당혹, 의심, 의아함.
옛 친구로서 카메라 속 독고미로에게서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독고미로가 무대 공포증이 아니라 카메라 공포증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네.’
독고미로는 카메라 공포증을 갖게 된 시점을 즈음해서 한이와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한이는 어쩐지 독고미로가 카메라 공포증이 아닌 무대 공포증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독고미로는 한이를 지키려고 했겠지.’
초등학교에서 교사와 급우의 악의를 한 몸에 받던 패왕이 하나 있는 친구를 지키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하지만 한이가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어.’
어쩌면 곧 한이는 독고미로가 품은 공포의 근원 외에도 두 사람이 소원해진 계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게 될 것 같다.
* * *
다음 날, 방과 후.
오늘은 학교에서 다들 독고미로 이야기를 했다.
우리 반뿐만이 아니라 학교 전체가 그랬는데, 특히 방송 사고가 난 무대 시작 전 10초는 움짤로 만들어져 은광고 게시판에 올라왔다.
어두운 무대 위, 독고미로가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는 광경은 이번 화의 명장면으로 꼽혔다.
“미로한테 연락 왔어! 마지막 촬영할 때 우리 부른대.”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 참가를 위해 김유리와 이동하던 도중, 독고미로가 메시지를 보냈다.
반장인 김유리에게 대표로 그 소식을 알렸나 보다.
“앞으로 2주 뒤지?”
“응! 첫 번째 주에는 작곡가와 만나서 새로 곡을 받고 연습할 거라고 했어.”
김유리는 바로 디바이스로 다른 아이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다 멈췄다.
“레나가 부담 가질지도 모르니까 자세한 일정은 재시험 끝나고 정하자. 다음 주 월요일에 재시험 보니까 그때 일정을 짜도 될 거야.”
내가 말리기 전에 김유리가 배려심을 발휘했다.
역시 우리 반 반장은 반 아이들을 생각하는 훌륭한 반장이었다.
학생 대표 회의용 대회의실A 앞에 도착하니 유상훈이 말을 걸었다.
“야, 왔냐.”
“안 들어가고 뭐 해.”
학급 임원들이 들어가지 않고 입구 앞에 몰려 있었다.
유상훈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0반이 사고 쳤다.”
“……2학년? 3학년?”
이 말에 답한 건 디바이스로 사진을 찍던 문새론이었다.
“2학년! 2학년이 새벽에 잠입해서 이중벽 만들어 놓고 거기에 숨었다가 학생회장 씨한테 걸림요.”
“사진 보니까 감쪽같은데 어떻게 알아낸 거야?”
“학생회장이 들어오자마자 학생회실 면적이 줄어든 걸 눈치채고 바로 벽 부숨. 아, 3학년 학급 임원은 오늘 손가락 부러져서 안 올걸?”
대회의실에서 사고를 친 건 2학년인 모양이다.
새벽에 벽 공사까지 하면서 숨어드느니 그냥 등장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데 손가락이 부러진 걸 보니 3학년도 여기가 아닌 곳에서 사고를 친 것 같은데.
“음…… 3학년 선배님들 실기 실습 중에 사고 나신 거야? 괜찮으시대?”
“아, 그건 강한 담임과 딱밤 때리기 내기를 하다 그런 거임. 바로 회복 아이템 써서 멀쩡한데 분해서 못 오는 거야.”
김유리가 최대한 좋게 선배들 실드를 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3학년 0반 우기환 일당은 임연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기 위해 하찮은 수작을 부렸다는데, 강한 담임의 힘 앞에 모든 수작질이 분쇄되었다고 한다.
“응? 그런데 왜 선배님들 손가락이 부러진 거야? 내기에 이긴 임연화 선생님이 딱밤을 때리는 입장이 된 거 아니야?”
“임연화 선생님이 차마 제자를 못 때리겠다고 하셔서.”
임연화는 너희들이 딱밤 때리는 연습을 열심히 한 걸 안다며 자비롭게 자신의 이마를 내주며 준비한 딱밤 때리기를 해 보라고 했다.
그 제안에 반장과 부반장은 사양 않고 동시에 임연화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그리고 그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우기환과 그 반 부반장의 손가락이 부러졌다.
물론 임연화의 이마는 멀쩡했다.
3학년 0반의 반장과 부반장은 학생 대표 회의를 빼먹을 만큼 굴욕감과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도 강한 담임께서 ‘따끔’했다고 하심. 3학년 0반 선배님들도 많이 강해지셨나 봄요.”
“……그렇구나.”
0반 선배님들의 훈훈한 사건담을 듣다 보니 대회의실 내부가 정리되었다.
2학년 0반의 장난질을 단번에 꿰뚫어 본 학생회장 도원우가 이마를 짚고 있는 게 멀리서 보였다.
‘이제 저놈들을 내 제자가 맡게 되는 건가……!’
염준열을 비롯한 차기 학생 대표들의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학생 대표 중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셋이나 있으니 나도 열심히 도와야 할 것 같다.
해프닝이 있긴 했으나 어쨌든 무사히 수습되어 다들 자리에 앉자 의장석에 선 도원우가 개회사를 했다.
“지금부터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