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두 번째 시도 (6)
중앙 구역 선도부 회관, 선도부 전용 대회의실.
3/4분기 학생 대표 회의가 끝난 후, 모든 선도부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회의를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임기가 끝난 3학년 임원들의 송별식을 하기 위해서였다.
선도부장인 오혜지가 중심에 서서 선도부 로고가 새겨진 머그잔을 들고 건배사 겸 송별사를 했다.
“그동안 다들 수고했어. 1, 2학년은 앞으로도 더 수고해 줘. 졸업하기 전까진 가끔은 들여다보러 올 거니까 무슨 일 있으면 말하고. 그럼 건배!”
오혜지가 말을 마치자 선도부원들은 머그잔을 아주 가볍게 부딪치며 탄산음료를 비웠다.
단상에서 내려온 오혜지가 곧바로 천동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혜지 누나,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후배들이 일을 잘하는데 내가 고생한 게 뭐가 있어.”
“……아뇨. 후배들 때문에 선배님들이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는데요.”
천동하는 곤욕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입구 쪽에서 주수혁과 이야기하는 중인 마진승을 바라봤다.
오혜지는 천동하가 무슨 의도로 그 말을 꺼냈는지 알아챘다.
“아, 준열이 건 때문에 그래?”
“준열이 팬들이 선도부 측에 몇 번 항의하지 않았어요? 싸움을 말려야 하는 입장인 선도부가 싸움을 걸고 다닌다고요.”
“곤욕이라고 할 것도 없어. 교칙대로 진승이한테 벌점 주고 끝냈는걸.”
“…….”
오혜지의 대답에 천동하가 의문을 품었다.
오혜지는 여름 방학을 기점으로 한동안 상당히 지쳐 보였다.
그때 마침 마진승이 염준열에게 시비 거는 빈도가 늘어 팬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천동하는 오혜지가 우울해하는 원인을 마진승 탓으로 꼽았는데, 지금 말하는 걸 보니 그의 예상이 빗나간 것 같았다.
‘그냥 진승이 건과 겹친 건 우연이었나? 원인이 따로 있나 본데.’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단순히 수험, 진로 스트레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동하는 그건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혜지 누나 진로는 거의 확정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을 텐데. 그럼 상희 누나 때문인가?’
유상희와 오혜지는 사이가 좋지 않기로 유명하나 사실 둘은 어렸을 때 인연이 있었다.
오혜지가 엇나갈 뻔할 때 잡아 준 게 유상희였다.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아도 오혜지가 유상희를 신경 쓰는 건 주변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모르겠다. 내가 알 수 없는 일이라면 내게 해결할 능력도 없는 셈인데,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혜지 누나가 직접 이야기하지도 않은 사항을 캐는 건 좀 그렇지. 나도 말 못 하는 사정이 있는데.’
천동하는 동생이 떠올라 추리를 멈추고 화제를 돌렸다.
새로 화제로 삼은 대상은 한때 선도부 소속이었던 인물, 계이담이었다.
계이담은 한때 마진승만큼 호전적이었던 시기가 있었는데, 성시완에게 완패당한 후 마음을 고쳐먹고 지익회로 갔다.
“이담이가 있으면 진승이도 사고를 덜 쳤을 텐데요.”
“지익회에 인재를 빼앗긴 건 아쉽긴 해. 시완이가 엄청 고마워하더라. 시완이는 우기환이 상대하기도 바빠서 2학년 0반을 감당하기 어려워했거든.”
계이담은 상위 10위에 드는 우수한 성적의 플레이어였고, 대(對) 플레이어를 상대로 아주 유효한 이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이계 공략에 나서서 플레이어SAT-K에 기록을 남겼을 때 바로 플레이어 협회에서 졸업 후 협회에 오지 않겠냐며 스카우트를 했을 정도였다.
2학년이 된 계이담이 지익회에 들어간 후, 그는 플레이어를 제압하는 데에 최적화된 이능을 발휘해 2학년 0반이 기숙사에서 친 사고를 수습했다.
그 결과 그는 지익회장이 되기까지 했다.
‘지금쯤 이담이는 지익회관에서 송별회하고 있겠지.’
선도부원 외에도 각 자치 기구의 임원들은 부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오혜지가 같은 생각을 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내년이 되면 ‘비밀 통로’에 출입할 1학년을 새로 뽑아야 할 텐데. 우리 쪽은 수혁이나 너나 문제가 없는데, 학생회는…….”
오혜지가 말꼬리를 흐렸다.
매년 초, 학생회와 선도부는 두 건물 사이에 있는 비밀 장소에 출입하는 비밀 결사를 뽑는다.
뽑히는 조건은 셋.
첫째, 학생회나 선도부에 소속되어 있을 것.
둘째, 비밀 결사 멤버의 추천을 받을 것.
셋째, 진족이나 후예가 아닐 것.
문제는 용족의 후예 염준열이 학생회장으로 뽑혔다는 점이다.
“……왜 후예는 안 되죠? 준열이는 인간에게 호의적이고, 준열이를 아끼는 용족도 인간을 함부로 못 대할 텐데요.”
“그게…….”
오혜지는 주저하며 고개를 숙였다.
최근 그녀는 생각에 잠길 때 착용한 시계를 매만지는 버릇이 생겼다.
가만히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오혜지가 말했다.
“……선배들이 그 비밀 통로에 후예를 데려간 적이 있대.”
“그럼 준열이도…….”
“그러지 마.”
오혜지가 고개를 저었다.
“비밀 통로 중간에 진족과 후예를 대상으로 발동하는 함정이 있었어. 그때 그 장소에 간 후예는 함정에 걸려 정신을 잃었고…… 깨어난 후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어.”
“네……?”
오혜지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진족과 후예만을 선별해 공격하는 이능의 존재가 알려지면, 모든 진족과 후예들의 표적이 될 거야.”
* * *
황명호 대저택.
은광고 입시 준비로 바쁜 은서호와 은이호를 만나서 격려해 주고 응접실에 앉았다.
오늘의 차는 홍국쌀차, 곁들인 간식은 씨 없는 적포도.
붉은 차와 음식이 담긴 사기그릇을 머릿수대로 준비해 건네던 황지호가 불쑥 내게 말을 걸었다.
“김신록에게 기숙사 외벽 CCTV를 꺼 달라고 했다면서?”
언젠가 그 건에 관해서 말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그런데 지금 바로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입막음할 시간이 없었어. 그날 바로 황지호 귀에 들어갔겠지.’
나는 기숙사 옥상으로 향한 날, 김신록에게 급하게 외벽 CCTV를 꺼 달라고 부탁했다.
김신록은 두말없이 알았다고 하고 실행에 옮겼으나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다.
지익회에서는 주기적으로 CCTV의 영상을 확인한다.
그러니 카메라가 꺼진 시간의 영상을 다른 영상으로 채우거나, 카메라가 꺼진 원인을 은폐하기 위해 공작을 해야 했을 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하고 있다. 심야에 권제인이 권레나를 데리러 온 걸 안다. 그때 권레나가 어떤 상태였는지도.”
다 알고 있는데 굳이 나한테 말해서 확인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
황지호가 가만히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
“뭐가?”
“권레나가 무사한 것과 네가 그걸 막은 것.”
“내가 막은 게 아니야.”
내가 한 건 권레나가 어떤 일을 했는지 상기시켜 줬을 뿐이었다.
그러니 권레나가 두 번째 시도를 멈춘 건 그녀가 해 온 선택 덕이다.
그날 염준열을 가장한 나를 구하려고 했던 게 결과적으로 그녀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황지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이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는 자명하지.”
내가 그날 그 자리에 없었다면 기숙사 건물 외벽을 나선형으로 타고 올라가던 목우람이 권레나를 받아 내지 않았을까?
0반의 전설이 하나 추가되긴 하겠지만, 목우람이 권레나를 구했을 텐데.
“그 바이올린 장인의 제자가 권레나를 받아 내도 그녀가 직접 두 번째 시도를 한 것과 안 한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 노친네는 목우람이 기숙사 외벽을 탄 것도 아는가 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황지호는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조의신, 네 능력은 다시 사용이 가능할 때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했지. 유상훈, 장남욱, 손민기에게 사용했을 때 각각 초기화까지 걸리는 시간이 달랐다고 했고.”
“그래.”
“김신록의 경우는 어땠지?”
“유상훈 때보다는 길게 걸렸고, 손민기 때보다는 짧게 걸렸어.”
“중간이라…… 후예나 인간, 그 사이의 차이는 없나 보군.”
황지호가 말을 마치자 김신록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대충 자신은 괜찮으니 얼마든지 리플레이를 사용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인간 아이도 견뎠습니다. 저번에도 괜찮았습니다. 조의신이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때 언제든지 다시 제게 써 주길 바랍…….”
“아들아,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적호가 급히 말을 끊었다.
행여 내가 그 능력을 김신록을 상대로 시도 때도 없이 사용할까 봐 걱정하는지 내 쪽과 김신록을 번갈아 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적호가 아들을 한참 나무라고 황지호도 몇 마디 거들어 김신록의 의견을 꺾은 후에야 상황이 수습되었다.
“그럼 그 능력을 써 보도록 하지. ……그런데 그 이능에는 이름이 붙어 있지 않나? 광림이나 스킬은 시전자가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알게 될 텐데.”
“그러고 보니 조의신은 한 번도 그 꿈을 꾸게 하는 능력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요. 광림인지, 스킬인지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괜찮다면 스킬명, 광림명을 알려 주지 않겠나?”
‘리플레이’는 엄밀히 말하면 스킬의 일종일 거다.
현재 레벨 5인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 스킬을 사용할 때 플마고 속 메뉴 창과 유사한 윈도우가 떠오른다.
전용 메뉴 스킬을 사용할 때 나오는 기능 중 하나에 리플레이가 있으니, 스킬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곤란하다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고민하고 있을 때, 백호군이 그렇게 말했다.
역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사려 깊었다.
보통 플레이어의 능력은 서로 캐지 않는 게 예의였다.
호랑이들도 그래서 나한테 리플레이에 관해 깊게 캐묻지 않다가 조심스럽게 물은 걸 거다.
‘……그래도 이 능력을 뭐라 칭하는지 말해야 의사소통이 쉽겠지.’
나는 고민하다가 이 능력의 분류와 이름을 말하기로 했다.
“이 능력은 스킬의 일종이야. ‘리플레이’라고 해.”
“……리플레이?”
리플레이의 뜻은 말 그대로 ‘다시 보다’, ‘재경기를 하다’라는 뜻이다.
플마고를 플레이한 입장에서는 왜 이 스킬에 ‘리플레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겠지만, 호랑이들은 의문을 품을 법했다.
“과거에 있을 뻔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리플레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은 안 했으면 좋겠구나.”
“리플레이라…….”
김신록과 적호는 적당히 납득한 것 같지만, 황지호는 속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안 가.’
잠시 5천 살 다운 표정을 짓던 노친네가 침묵을 깼다.
“……알았다. 그럼 ‘리플레이’를 사용해 보도록.”
황지호의 손에 저번에 본 그 황금 향로가 들려 있었다.
김신록은 각오를 굳힌 얼굴을 했으나 적호는 대놓고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사용하겠습니다.”
예고를 한 후, 전용 메뉴를 열어 리플레이 항목을 골랐다.
황지호는 그사이 내 쪽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리플레이’의 비밀을 밝혀내려 하는 것처럼.
그리고 잠시 후.
김신록이 악몽에서 깨어났다.
‘저번보다 짧아졌어. 반복해서 악몽을 꾸면 리플레이 대상자가 자각하는 건가.’
내가 시계를 보며 시간을 체크하는 사이 황지호는 김신록을 살폈다.
황지호가 눈에 띄게 안심한 기색을 보이는 걸 보니 김신록은 괜찮은 것 같았다.
“추석 때 리플레이를 사용했을 때보다 이능파, 신체의 상태 모두 안정되어 있다. ……왜 그러지?”
“…….”
신체나 이능파는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김신록은 저번보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번에 보지 못한 걸 본 것 같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