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20화 (319/925)

53. 두 번째 시도 (10)

플마고가 망겜인 이유를 대라면 끝없이 댈 수 있다.

그리고 그 망겜을 플레이하는 유저로서 몇 개 안 되지만 단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을 댈 수 있었다.

속칭 말하는 팬덤이 치는 피의 실드가 그러했는데, 그런 나도 도저히 실드를 못 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캐릭터 간의 밸런스였다.

모든 캐릭터를 아끼는 입장에서 봤을 때, 누구는 사기급으로 강하고 누구는 폐기급으로 약하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약한 캐릭터를 조작해 어려운 미션과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긴 했으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다른 사람들에게 망캐 취급받는 건 그리 좋지 않았다.

그 망캐의 대표 주자가 플마고의 ‘이레나’였다.

공격력은 바닥이었고 채찍술 스킬 조작은 상당히 어려웠으며 광림은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었다.

광림인 ‘허상 연회’는 낮은 희귀도의 에너미를 겨우 속일 법한 허술한 환상을 잠깐 보여 주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아무도 망캐 소리를 못 할 텐데.’

권레나가 손가락을 놀려 바이올린의 현을 튕기자 경쾌하고 청량한 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소리에 이어 빛이 무대 위를 채웠다.

이능 바이올린이 권레나가 자아내는 음색과 그녀의 이능파에 공명해 광림의 효과를 증폭시킨 듯했다.

무대가 소리와 빛으로 가득 찬 후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 나는 연회장에 서 있었다.

복층 구조의 넓은 연회장 안은 드레스 코드인 베가스 골드 일색이었다.

카펫도, 샹들리에도, 벨벳 커튼도, 연회 참석자들의 드레스나 액세서리, 행커치프 등에도 베가스 골드가 들어가 있었다.

‘환몽 경매장을 이 정도로 구현해 내다니……!’

권레나가 구현한 환상을 본 사월세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눈에 여기가 올해 환몽 경매가 열렸던 컨벤션 센터임을 눈치챈 듯했다.

“이건…… 여기는…… 그리고 저기 서 있는 건…….”

사월세음은 혼란스러워하며 앞을 봤다.

사월세음의 시선 끝에 베가스 골드의 리본을 매고 칵테일 드레스를 착용한 권레나가 서 있었다.

권레나는 화사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얼굴은 침울해 보였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우울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염준열, 정확히는 내가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한 모습을 보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레나와 적벽괴도 님?”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보여 주는 환상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 단어’와 ‘님’의 조합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직후, 귓가를 울리던 바이올린의 음색이 변했다.

권제인이 직접 작곡한 바이올린곡, ‘귀향(Homecoming)’은 고향에서 가족과 재회한 기쁨을 노래하는 곡이었다.

도입부는 고향으로 달려가는 경쾌하고 쾌활한 발걸음을 묘사하는 듯한 피치카토 주법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에는 고향에 다다르고, 그리운 이와 만나는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 아르코 주법으로 길게 현을 켜는 게 이 곡의 특징이었다.

아르코 주법이 시작되자 풍경이 급변했다.

‘연주를 바꿔 환상의 내용도 조절 가능하다니……!’

무대 위에 놓인 황금 새장 안.

그 안에는 금사로 짠 날개옷을 입은 소년, 사월세음이 갇혀 있었다.

사월세음을 본 권레나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권레나는 차마 그 이후를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툭.

바닥을 보는 그녀의 손에서 순은 동전이 떨어졌다.

카펫이 깔린 바닥이라 소리가 크게 들릴 리가 없는데, 묵직한 동전이 바닥에 닿자 소리가 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끝으로 환상은 불에 탄 것처럼 이능파의 입자로 변해 사라졌다.

연주는 어느덧 멈춰 있었다.

이능파와 체력을 크게 소모한 건지, 권레나의 기척이 약해지고 그녀의 손에 들린 바이올린과 활이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

“네……?”

권레나가 사과했지만, 사월세음은 아직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아니,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사월세음이 반 친구 권레나와 환몽 경매 일당을 몇 분 만에 엮어 생각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거다.

사월세음이 내 쪽을 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시선을 보냈으나 나는 도와주는 대신 권레나 쪽을 봤다.

지금은 내가 끼어들어 설명하는 것보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게 나을 거다.

결국 사월세음도 내 눈치를 보는 대신 권레나가 더 말을 하길 기다리기로 했다.

“……나 그날 환몽 경매장에 있었어. 거기에서 세음이를 봤는데 아무것도 안 했어.”

권레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권레나는 사월세음에게 사실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등교를 시작하고 세음이가 그때 경매에 나온 플레이어인 걸 알아봤는데도 여태까지 말하지 못했어. 아무것도 안 하고, 또 아무 말도 안 해서 미안해…….”

권레나가 말을 마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하는지 동그란 눈을 가늘게 뜨며 눈가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사월세음은 입을 작게 벌린 상태로 나를 한 번, 권레나를 한 번 번갈아 봤다.

권레나가 보여 준 환상 속에 환몽 경매장에서 염준열의 모습을 한 나도 나왔으니, 왜 내가 이 자리에 있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권레나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도.

“왜…….”

긴 침묵 끝에 사월세음이 목소리를 냈다.

사월세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걸 레나가 사과해요!”

사월세음이 크게 소리 지르자 권레나가 놀라 몸을 움찔했다.

사월세음은 권레나를 향해 걸어가 그녀의 떨리는 손을 움켜쥐었다.

사월세음의 손도 잘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둘이 손을 잡고 나니 떨리던 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가라앉는 게 보였다.

“레나가 저기에 좋아서 갔을 리가 없잖아요. 그날 저를 보고 웃고 있지 않던 건 제 가족과 적벽괴도 님과 레나뿐이에요!”

“하지만…… 나는 세음이네 가족이나 적벽괴도와 다르게 아무것도…….”

“그날 저를 구하려다가 삼촌과 숙모가 크게 다쳤어요. 레나도 봤잖아요! 레나가 저를 구하기 위해 뭔가 하셨다가 그렇게 됐다면 전…….”

‘그 단어’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방해하지 않게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데 오혜정은 사월세음 안에서 이미 ‘숙모’로 굳어진 건가.

“……혹시 실습했던 날에 홍룡을 같이 본 이후로 계속 자책하신 거예요?”

“미안해…… 세음아…….”

“사과할 일이 없는데 왜 자꾸 사과하세요……!”

사월세음이 상냥한 말투로 권레나를 달래자 결국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

사과하지 말라고 부탁해도 권레나는 계속 사과했다.

울면서 사과하는 권레나를 보고 결국 사월세음도 울기 시작했다.

“레나 잘못이 아닌 일로 레나가 힘들어하는 게 싫어요…….”

두 사람이 진정할 때까지는 오래 걸렸다.

하지만 눈물을 그친 이후에 두 사람은 지쳐 보이긴 해도 정신적으로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저녁을 거른 두 사람을 위해 소화하기 편한 메뉴를 떠올리며 둘이 내게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렸다.

*    *    *

사월세음이 호연관 콘서트홀 안으로 들어간 후.

목우람과 호연관 근처에서 대기하던 재러드 리가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우람 군,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닙니다. 마침 부업 중이라 이쪽으로 올 일이 있어서요.”

“……부업?”

목우람은 탁거산이라는 한국의 고수의 의뢰를 받아 그의 제자를 감시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마침 오늘 그 고수의 제자라는 인물이 중앙 구역 쪽으로 도주해 이쪽으로 왔다고 한다.

‘은광고 0반 학생은 특이한 부업을 하는군.’

재러드 리는 권레나가 속한 0반의 소문을 떠올리며 납득했다.

그때, 갑자기 목우람이 호연관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습니까?”

“어떤 소리?”

“바이올린 소리가 들린 것 같습니다.”

재러드 리는 오늘 권레나가 친구의 앞에서 연주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쯤 권레나가 연주를 시작했을 테니 목우람이 제대로 들은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호연관에서 공연을 해 본 스태프로서는 의문이 들었다.

‘호연관의 방음 시설을 생각하면 들릴 리가 없는데.’

재러드 리가 고개를 저어도 목우람은 귀를 쫑긋거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는 듯했다.

재러드 리는 그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본론을 꺼내고 자리를 바꾸기로 했다.

“우람 군에게 물어볼 게 있어. 같이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네, 말씀하십시오.”

“우람 군은 뮤즈를 찾아서 여행을 하고 있었지? 그때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말해 줬으면 하는데.”

“저의 뮤즈를 찾았던 기나긴 여정 말씀입니까? 그거라면 얼마든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곧 목우람의 눈물 나는 무일푼 호구 여행기가 시작되었다.

그 긴 이야기에는 의문의 집단과 습격에 관한 건도 섞여 있었다.

재러드 리는 옛날 머물렀던 팀, ‘세 기사의 맹세’를 떠올리며 목우람의 여행담에 귀를 기울였다.

*    *    *

저녁은 권레나와 사월세음, 나 셋이서 먹었다.

둘이 눈이 퉁퉁 부은 상태라 이동하기 뭣해서 호연관 내부의 대기실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메뉴는 전부 블루베리가 들어간 양식이었다.

권레나와 사월세음은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둘은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며 단란한 식사 시간을 가졌다.

‘나도 자리를 비우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착한 두 사람은 내게 이 자리에 있어 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한편, 권제인과 재러드 리는 헤어지기 직전까지 계속 자리를 비워 줬다.

오늘 밤은 권레나가 기숙사에서 혼자 지내는 걸 원치 않는지, 자리가 파할 때쯤에 등장해서 부득불 영원의 호수 팀 빌딩으로 데려갔지만.

“내일 레나가 기숙사에 오면 바로 같이 공부할 거예요. 의신이도 시간 되시면 와 주세요.”

사월세음이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식사 도중, 사월세음은 권레나의 재시험 준비를 돕겠다고 말했고, 권레나도 주저하다가 그 도움을 받겠다고 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안심이 되었다.

두 사람이 다시 평범한 학교생활을 보내는 친구 사이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간식 사 갈게.”

“저도 사 갈 예정이에요. 겹치지 않게 사기 전에 메시지 보낼게요!”

나와 사월세음은 각자 기숙사 방으로 가기 전까지 계속 간식 이야기를 했다.

‘예약부터 해야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우리 반 아이들이 먹을 간식을 고르려 했는데, 디바이스를 켜니 읽지 않은 메시지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메시지를 보낸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유독 많은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있었다.

[도시후] 뭐 해? ㅎㅎ

[도시후] 내일 주말인데 많이 바빠?

[도시후] 의신아?

[도시후] 상훈이도 메시지 확인 안 하던데…….

[도시후] ㅠㅠ…….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도시후한테 메시지가 왔었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메시지 같아서 미루다가 그대로 잊어 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도시후는 유상훈한테도 메시지를 투척하고 있었나 보다.

유상훈도 확인을 안 한 것 같고.

‘급한 일이면 전화로 했겠지.’

그 생각에 그냥 다음에 확인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답변을 보내기로 했다.

[나] ?

[도시후] !!!

[도시후] 뭐 해? ㅎㅎ

갑자기 다시 무시하고 싶어졌지만, 답변하기로 했다.

[나] 메시지 확인해.

[도시후] 그렇구나!

다시 대화가 단절되었다.

고작 이걸 묻기 위해 이놈은 계속 메시지를 날려 댄 건가.

메시지창을 끄려고 했을 때, 도시후가 메시지를 보냈다.

[도시후] 상희 누나는 잘 지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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