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21화 (320/925)

54. 동생 (1)

메시지방을 나가기 직전에 보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이름에 손가락이 멈췄다.

왜 갑자기 이놈이 유상희에 관해 묻는 거지?

‘유상희의 연락처를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닐 텐데.’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메시지를 무시하는 대신 답변하기로 했다.

[나] 저번에 학생 대표 회의 때 뵈었는데, 건강해 보이셨어.

[도시후] 그렇구나!

도시후가 뭔가를 더 말하기를 기다렸으나, 저 말로 끝이었다.

정말 유상희가 잘 지내는지 안 지내는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인 것 같았다.

추궁하기 전에 도시후가 추가로 메시지를 더 보냈다.

[도시후] 원우 형은 잘 지내?

도원우는 최근 겉보기에는 잘 지내고 있다.

추함이 사라져 만화를 찢고 나온 듯한 재벌가 출신 명문고 만년 수석 학생회장으로 지내고 있으니까.

‘굳이 나한테 묻는 이유가 있겠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언급되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나는 도원우의 근황에 대해 말하는 대신 본론을 꺼냈다.

[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도시후] 응! 삽 빌려줄게!

뜬금없는 말에 메시지를 입력하는 손이 멈췄다.

갑자기 저놈은 무슨 삽 소리를 하는 건가.

[나] 삽?

[도시후] 묻고 싶은 게 있다면서!

[나] ?

혹시 다른 메시지방에 보낼 메시지를 실수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의문이 더 커졌다.

[도시후] 땅에 뭐 묻으려면 삽 있어야 편하잖아 ㅎㅎㅎㅎㅎㅎ

[도시후] 아, 같이 묻어 줄까? ㅎㅎㅎㅎㅎㅎㅎㅎㅎ

말장난이었나!

도시후가 이때다 싶어 허무한 개그를 시도한 모양이었다.

지금 내 앞에 삽과 도시후가 있었다면 당장 도시후를 묻었을 거다.

아니, 장남욱에게 부탁해서 지금 당장 묻어 달라고 해야 하나?

이유를 잘 대면 해 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일단 분노를 묻어 두고 되물었다.

[나] 물어볼 게 있는데.

[도시후] 물어볼 거? 뭐 물고 싶어?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도시후가 정신을 못 차리고 저 허무한 말장난을 계속할 생각인 듯했다.

나는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메시지창을 추가로 열었다.

장남욱과 유상훈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나] 도시후 한 대만 때려 주라.

[장남욱] 응? 무슨 일 있어?

[유상훈] ㅋ

[장남욱]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의신이 네가 그런 부탁을 한 것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겠지. 시후가 뭐 잘못한 거지? 잠깐만 기다려.

장남욱은 역시 좋은 놈이었다.

실행에 옮기기 전 긴 메시지를 입력하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고 장남욱이 곧바로 도시후를 때려 주기로 했다.

약 1분 후.

내가 분노를 삭이는 사이 장남욱에게 한 대 맞은 듯한 도시후가 메시지를 보냈다.

[도시후] ㅠㅠ…….

[나] 질문할 게 있는데.

[도시후] 응…… 대답할게 ㅠㅠ…….

[나] 갑자기 선배님들 안부를 묻는 이유가 뭐야?

답변은 바로 오지 않았다.

묘하게 뜸을 들이는 게 괜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도시후] 그게…….

[도시후] TC 연구소에서 새로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거기에 상희 누나를 부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

TC 연구소의 새 프로젝트?

게임 속 정보를 바탕으로 무엇인지 짐작해 보려 했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유상희의 행보가 게임 속과 크게 달라졌기에 짐작 가는 바가 거의 없었다.

[도시후] 상희 누나가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서 안부를 물은 거야! ㅎㅎㅎ

[나] 그래? 그것 외에는?

[도시후] 아, 그냥 원우 형 안부도 궁금해서?

도시후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숨기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정말 저 문제뿐이었다면 도원우의 안부까지 묻지 않았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이상으로 도시후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TC 그룹 내부 사정과 관계가 있는 일 같은데…… 외부인인 나한테 말하기는 어렵겠지.’

아직 자세한 사정은 파악할 수 없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연관되었는데 손 놓고 지켜볼 수는 없었다.

나는 메시지방을 나와 어디서 정보를 캐내서 어떻게 행동할지 머릿속에서 천천히 정리했다.

그사이 도시후가 쓸데없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바람에 팝업 알림창에 메시지가 계속 떴다.

[도시후] 상희 누나나 원우 형한테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주라!

[도시후] 응? 왜 읽음 처리가 안 되지……?

[도시후] 뭐 해? ㅎㅎ

[도시후] 자?

[도시후] ㅠㅠ

[도시후] 잘 자…….

*    *    *

주말, 원래 계획대로라면 권레나의 공부를 도울 예정이었으나 MITRON에서 주문한 간식만을 건네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내가 향한 곳은 황명호 대저택이었다.

‘너무 자주 찾아오는 것 같은데…… 그래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위해서 뻔뻔해져야지.’

4대 그룹 중 하나인 TC 그룹.

그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을 이로 떠오른 건 같은 4대 그룹의 일축인 황명 그룹의 총수였다.

황지호와 디바이스를 통해 이야기하려 했더니, TC에 관해 묻자 이 노친네는 직접 말하겠다며 이리로 불러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관련된 사항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어서 와라, 조의신.”

현관 앞.

마중 나온 황지호를 본 나는 생각 없이 온 걸 후회했다.

‘……선물로 아이스크림 사 올걸!’

나를 맞이한 건 초등학생 버전 황지호였다!

왜 오늘 초등학생 버전 황지호가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지 못한 걸까.

저번에 내가 사 온 솔잎 음료는 입에 못 대고 자료만 보다가 잠든 모습이 떠올라 괜히 미안해졌다.

지금이라도 밖으로 나가 저 아이의 입맛에 맞는 간식을 준비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끄응? ……왕!

천사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건가, 앞에 있는 건 황지호인데!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황지호가 내 이상한 태도를 알아챈 것 같았다.

“흐음…… 신수 때문에 지능이 떨어진 건가? 아니, 뭔가 좀 다른데.”

초등학생 모습을 한 황지호가 곱상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그 얼굴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이만 들어가지.”

이 상황을 끝낸 건 백호군이었다.

역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배려심이 깊었다.

“……흠.”

황지호가 눈을 반짝거리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린 모습으로 저러니 평소 같은 불길함은 없고 그냥 더 열심히 생각하라고 뭐라도 사서 먹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 생각은 응접실에 도착한 후 중단되었다.

오토매틱 메이드가 내온 오늘의 간식은 밤 빙수였는데, 얼린 우유를 잘게 간 후 밤 소스를 뿌린 게 입에 맞는지 어린 모습의 황지호가 아주 잘 먹었기 때문이었다.

‘내 동생들도 간식을 저렇게 잘 먹었는데.’

나한테는 동생이 둘 있었다.

둘은 이란성 쌍둥이로, 얼굴도 닮지 않았고 성별도 달랐다.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아이가 둘이나 늘어 집안 사정이 조금 빠듯해져 어린 시절에는 맏이로서 동생들에게 많은 걸 양보해야 했다.

내 의식주와 취미와 관련된 물품 중, 동생들이 손대지 않는 건 체스 세트 정도밖에 없었다.

‘그때 고작 간식 갖고 왜 그렇게 화를 냈을까.’

어린 마음에 동생들이 내 몫을 뺏어 먹으면 분한 마음이 든 적도 있었다.

늦게까지 기보를 보는 나를 위해 부모님이 동네 제과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롤케이크, 카스텔라 같은 간식을 자주 사 오셨는데, 잠시 한눈을 팔면 동생들이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다 먹어 버리곤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하는 동생들에게 한 마디도 안 하고 등을 돌리고 며칠 동안은 제대로 말도 안 붙였었다.

동생들한테 그렇게 굴 만큼 맛있고 귀한 음식도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내 것도 먹을래?”

이 말에 눈을 조금 크게 뜨다가 눈을 휘며 웃었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괜찮다. 내 몫으로 더 주문하도록 하지. 왜 안 먹고 있지? 입에 안 맞나?”

“그냥 아직 안 먹은 건데.”

“……혹시 이 계절에 빙수는 별로였나? 오늘은 볕이 좋아서 찬 음식을 준비했는데 만약을 대비해 따뜻한 음료도 준비해 뒀다. 다른 메뉴도 있으니 주문하도록.”

초등학생의 모습이긴 하지만 평소 황지호가 쓰는 말투로 말하고 있으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저 말투를 들으니 황지호와 동생을 겹쳐 보는 게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생각되어 스푼을 움직였다.

“아니야, 먹을게.”

“이 몸이 엄선한 옥광밤으로 만든 빙수다. 당도와 식감이 매우 우수하지. 천천히 음미해 보도록.”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뽐내듯 말하는 게 좀 그랬지만, 먹어 보니 정말 맛있었다.

내가 반쯤 그릇을 비웠을 때, 이미 두 그릇을 전부 먹은 어린 황지호가 본론을 꺼냈다.

“유상훈이 유상희의 동생이란 건 조의신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야 당연히 둘이 남매 관계란 건 알고 있다.

유상희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고, 유상훈은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난 인물이다.

“유상훈의 병에 관해선 얼마나 알고 있지?”

“……어렸을 때 좋아하는 농구를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았다는 건 아는데.”

“그렇군…….”

설마 이번 일에 유상훈도 관계가 있는 건가?

초등학생 모습의 황지호는 홀로그램을 전개해 차트를 띄웠다.

최상단에 적혀 있는 이름은 ‘유상훈’으로, 언뜻 보기엔 평범한 의료 기록이었다.

그럼에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게 다 유상훈의 진료 기록인 건가?’

전개되는 홀로그램은 빠르게 늘어났다.

수백 장에 달하는 진료 기록이 유상훈이 병마와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유상훈이 이능을 각성한 게 1년만 늦었어도 아마 죽었을 거다.”

섬뜩한 이야기였다.

유상희가 치유와 관련된 이능을 갖고 있지만, 스킬의 경우, 회복 아이템과 마찬가지로 이능을 가진 자에게만 제대로 발동한다.

광림은 상위 존재의 권능을 빌린 덕인지 일반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세계에는 초등학생의 광림의 폭주, 김유리의 아버지가 일으켰던 사건으로 인해 일명 ‘서구초법’이 존재한다.

17세 미만 플레이어의 광림은 철저하게 금지되니, 어린 시절 유상희는 동생이 죽어 가는 걸 지켜봐야 했을 거다.

“유상훈이 앓고 있는 기병은 현대 의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건 아마 그가 타고난 이능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큰데…… 뭐,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어쨌든 유상훈이 기한 내로 이능을 각성하지 못했다면 죽었을 거란 사실이 중요하다.”

홀로그램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유상희가 이능 센터에 다녔을 때의 기록이었다.

이능 센터는 17세 미만의 예비 플레이어 중, 강력한 이능을 타고난 이들을 교육하는 곳으로 플레이어 협회를 중심으로 여러 이능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었다.

유상희가 소속된 반을 담당한 연구소는 여럿이었는데, 이중 TC 연구소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유상희가 유상훈과 함께 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잖아?’

유상훈의 출입 기록 중 비고란에 유상훈을 동반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날짜를 잘 봐라. 그리고 이 기록을 보도록.”

다음으로 보여 준 기록에는 유상훈이 각성한 시기가 나와 있었다.

유상희와 이능 센터를 방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유상훈이 이능을 각성했다.

‘TC 연구소와 유상희의 관계에 관해 물었을 뿐인데, 황지호가 유상훈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뭐지?’

언뜻 보기엔 황지호가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 같았지만, 내가 여기에 온 근본적인 이유를 떠올리니 답이 나왔다.

“유상훈이 이능을 각성한 시기와 TC 연구소가 관련이 있어?”

어린 황지호가 만족스러워하며 웃었다.

“그래. 유상희가 TC 연구소에 동생 목숨 빚을 졌지.”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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