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22화 (321/925)

54. 동생 (2)

플마고 속 유상훈은 이름도 나오지 않은 채 은광고 실기 시험 당시 유상희의 죽은 동생이라고 간접적으로만 언급되었다.

그래도 유상희가 동생 유상훈을 얼마나 아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유상희는 유상훈의 복수를 위해 귀한 가호와 광림을 버리고 고등학교 3학년 생활과 그 이후의 미래도 버렸으니까.

‘애초에 유상희가 목표로 했던 복수가 가능할 리가 없는데.’

플레이어블 캐릭터 유상희의 지상 목표는 마수종 에너미의 절멸이었다.

유상희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와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계약해 대(對)마수 최종 병기로 거듭났다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계가 발생할 때마다, 혹은 진족에 의해 이 세계로 오는 에너미의 숫자를 생각하면 유상희의 복수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 의미도 없고 아무 기약 없는 복수를 혼자서 시도할 만큼 유상희는 유상훈을 아꼈다.

그런 동생의 목숨 빚을 지게 했다면 TC 연구소가 유상희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상훈이 그날 죽었다면 TC 연구소가 유상훈의 목숨 빚 운운하는 건 의미가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현재 유상훈은 한국 최고의 이능 특목고 간의 스포츠 교류전에서 MVP를 차지할 만큼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그런 유상훈을 볼 때마다 유상희는 TC 연구소에 진 유상훈의 목숨 빚이 떠올랐을 거다.

“TC 연구소가 유상훈의 목숨 빚을 이용해서 유상희 선배님께 무슨 제안을 한 거구나.”

“그래. 유상희가 고민이 많은 것 같더군.”

초등학생 버전의 황지호는 마치 예전부터 유상희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는 태도를 보였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고민하는 걸 나는 눈치채지 못했는데, 설마 저놈은 알아챘던 건가!

“……내가 묻기 전부터 유상희 선배님과 TC 연구소에 관해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내 질문에 어린 황지호가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황지호는 알고 있었단 말인가!

유상희가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겪는 단순한 진로 문제라고 여겨 깊게 고찰하지 않았는데, 내가 얼마나 생각이 짧았는지 실감이 났다.

“수련회가 끝난 후 부상자들을 황명은광병원의 플레이어 전용관에 입원시켰을 때, 학생들의 치료를 위해 유상희를 부른 적이 있다. 그때, 황명호 이사장의 모습으로 접근했다.”

“……그랬었어?”

“그래, TC와의 문제에 관해 내가 도와줄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유상희는 적호를 치료해 주지 않았느냐. 호족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

황지호가 유상희에게 그런 말도 했다는데, 대체 난 그동안 뭘 한 거지.

그런데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저놈은 왜 말을 하지 않았는가.

유상희가 아직도 고민하는 걸 보면 결국 해결이 안 된 것 아닌가, 그럼 더더욱 나한테 알려 줘야 했던 것 아닌가.

싫은 소리가 나올 뻔했으나, 어린 모습을 한 황지호를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자책하는 건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TC 연구소의 제안에 바로 응하지 않고 고민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내키지 않는 제안이라는 거겠지.’

그 제안은 아마 도시후가 말했던 TC 연구소의 새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을 거다.

일단 황지호로부터 TC 연구소가 했다는 제안에 관해 캐내기로 했다.

“TC 연구소가 유상희 선배님께 어떤 제안을 한 거야?”

“TC 연구소가 하는 새 프로젝트에 유상희를 넣을 생각인 것 같더군.”

황지호가 어지럽게 떠 있던 홀로그램을 모두 지우고 단 하나의 문서를 허공에 띄웠다.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

프로젝트명을 본 순간 경악했다.

나를 경악하게 한 단어는 ‘인공’이었다.

‘상위 존재를 사람의 힘으로 강림시키겠다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 상위 존재는 인간계에 관한 간섭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상위 존재가 인간계에 간섭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로, 이 세계에 항시 존재하는 인간, 후예, 진족을 통해 간섭하는 방법이 있다.

신앙이 깊은 신도를 대상으로 신이 일시적으로 신도의 몸을 빌리는 ‘빙의’.

꿈을 통해 목소리를 전하는 ‘계시’.

양자의 상호 동의하에 맺어지는 ‘가호’.

일방적으로 이을 수 있는 ‘광림’이 그 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엄밀히 따지면 강림이 아니야. 상위 존재가 이 세계에 온전히 내려오는 게 아니니까.’

둘째로, 상위 존재가 자신의 힘만으로 이 세계에 간섭하는 방법도 있다.

상위 존재의 힘을 이 세계에 내려 객체에 변화를 일으키는 ‘기적’ 혹은 ‘재앙’.

그리고 직접 이 세계에 상위 존재가 내려오는 ‘강림’이 그러했다.

‘하지만 기적, 재앙 특히 강림은 상위 존재가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가 커. 온전한 힘이 이 세계에서 작용한다는 보장도 없고 자칫하다간 존재 자체가 영원히 세계에서 지워질 수도 있어.’

그렇기에 아무리 호전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신이라 해도 직접 인간계에 기적과 재앙을 쉽게 일으키고 오랜 시간 강림하려 들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이계 충돌이 일어난 이후, 상위 존재의 강림은 몇 차례 관측되긴 했으나 사례도 적었고 강림 시간도 짧았다.

최근의 강림 사례는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권제인이 단독 콘서트를 할 때였다.

권제인의 앙코르 무대 도중에 무사이 아홉 자매, 뮤즈 중 테르포시코레와 에우테르페, 칼리오페가 1분간 강림해 춤을 추고 사라진 게 그 사례였다.

상위 존재가 이 세계에 직접 강림하는 건 그만큼 드물고 귀한 일이었다.

“아케아와 네메시스, 두 여신이 유상희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 유명한 일이지. 이들은 유상희를 이용해 두 여신을 이 세계에 강림시킬 생각이다.”

유상희는 ‘복수의 상위 존재와의 인연과 광림에 관한 연구’라는 타이틀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곳에 아케아와 네메시스가 언급되었는데, 순전히 이는 이 세계의 광림 연구 발전을 위해 발표한 논문이었다.

두 여신을 이 세계로 끌어오기 위함이 아니었다.

“유상희가 아케아를 강림시키는 걸 꺼려 하자 그게 싫으면 네메시스라도 부르라더군. TC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광오하고 분수를 모른다.”

“……왜 그런 짓을 하려는 거지?”

“그것까진 캐내지 못했다. 유상희는 일종의 ‘실험 대상’이다. 진정 부르고 싶은 상위 존재는 아케아나 네메시스가 아닌 다른 존재겠지.”

그 말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상위 존재를 이 세계에 부른다고……?’

흑막의 행보와 최후에 벌인 짓을 생각하면 TC와 흑막이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아직 확신은 없지만, 이 ‘인공 강림 프로젝트’와 게임 속 4대 그룹 암투 시나리오와 흑막이 남긴 행적 중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호족은 어쩌다가 이 프로젝트 문건을 확보한 거지? 그저 유상희를 위해 여기까지 캐낸 건가?’

내 의문이 얼굴에 묻어 나왔는지 어린 황지호가 먼저 물었다.

“우리가 이 문서를 어떻게, 왜 손에 넣었는지 궁금한 건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는데 술술 입을 열었다.

“TC 그룹의 옛 이름을 알고 있나?”

“우리말 이름이었다는 건 알고 있어.”

“그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바꾸게 뒤에서 움직인 게 우리 호족이다.”

호족이 그런 짓을 했었나?

4대 그룹 암투 시나리오는 주수혁의 고등학생 시절 때 터졌지만, 그 불화의 씨앗은 이미 옛날에 뿌려진 모양이다.

“무슨 짓을 했어?”

“T와 C의 이혼 사건에서 C 쪽에 힘을 실어 줬지. 마침 C는 외국인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이기도 해서 이름을 바꾸게 압력을 넣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름이길래 황지호가 저리도 TC 그룹의 옛 이름을 싫어했단 말인가.

“TC 그룹의 옛 이름은 도천 그룹이다. 하늘과 천신을 낮추어 보는 교만한 말이지.”

‘도천’ 자체는 큰물이 하늘에까지 차서 넘친다는 좋은 말이긴 한데,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도 있으니 천신을 섬기는 호족이라면 저렇게 반응할 법했다.

‘T와 C는 각각 창립자 부부의 성에서 따왔다고 했지. T가 도씨를 칭했으니 C는 천씨를 칭하는 거구나.’

어린 황지호가 내용과 상황에 맞지 않는 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천씨 파벌이 이혼 사건 때 우리 쪽에 신세를 많이 졌지. 또, 그 과정에서 잠입시킨 이들과 확보한 정보 입수 루트가 적지 않다. 우리의 힘과 천씨의 힘을 모두 이용할 수 있으니 TC 내부 정보를 얻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TC 그룹이 콩가루로 이름난 건 잘 알았지만, 호랑이 손바닥 위에 굴려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도씨 중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도원우도 있는데 조금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여기에 온 이유는 유상희 때문이지? 우리에겐 얼마든지 그녀를 도울 힘이 있다. 이 오만한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그 말대로 프로젝트를 무산시키는 방법은 몇 가지 있겠지만, 그런 짓을 하면 황명 그룹이 확보한 정보 입수 루트가 막히고 말 것이다.

이 극비 프로젝트가 무산된다면 TC 그룹 측에서 정보 보안 체계를 다시 세울 테니까.

‘이 한 수는 4대 그룹 암투를 대비해 남겨 두고 싶어.’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아니, 일단 지켜보자.”

“당장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군.”

유상희의 고민을 얼른 불식시키고 싶은 마음은 컸으나 앞으로의 일도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 일에는 황명 재단 외에도 든든한 아군이 하나 더 있었다.

“대신 감시를 붙여 줬으면 하는 인물이 있어. 강한 플레이어니까 주의해서 관찰해 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고.”

“말해 보도록.”

“도원우 선배님.”

“……누구를 뒤에 붙일지 고심할 필요가 있겠군.”

은광고 만년 수석 학생회장 도원우의 실력을 잘 아는지 어린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이번 일에 관해 이야기를 한참 나눴다.

어린 황지호가 빙수를 또 한 그릇 비운 후에야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아, 적호와 김신록은 당분간 너와 마주치지 않게 할 거다. 너나 김신록이나 무리할 게 눈에 선해서 말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저택에서 두 부자의 모습이 안 보인다 싶었더니, 나와 못 만나게 하려고 자리를 비우게 했나 보다.

아직 김신록은 적호에게 아버지라고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던데 이 기회에 둘이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

아, 내가 있으면 둘이 저택에 있기 힘들 테니 더 방문을 자제해야겠다.

“이 저택은 넓다. 동선을 엇갈리게 하는 건 어렵지 않다. 괜히 이곳에 오지 않을 핑계로 삼을 생각은 하지 말도록.”

어린 모습을 한 호랑이에게 생각을 읽혔다.

“……그런데 너 왜 그 모습이야?”

“아, 그러고 보니 이 모습으로 할 말이 있었지.”

어린 황지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뭐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묻고 싶을 만큼 해맑은 얼굴이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성국언의 비서, 전무영이 이 몸이 이 모습으로 다니는 초등학교 교실에 잠입한 적이 있다고 말한 것 기억나나?”

고개를 끄덕이자 어린 황지호가 폭탄선언을 했다.

“성국언이 이 몸에게 접촉해 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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