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동생 (9)
비정기 오찬회가 처음 열렸을 때, 주최자는 적극적으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아이들은 주최자인 호사가 진족이 유괴된 아이들을 구해 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그의 무용담을 경청했다.
호사가 진족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식 복 없는 설움을 달랬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다 한들,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앞에서는 아양을 떨지만 뒤에서는 다른 아이들을 이간질하고, 납치 자작극까지 벌이면서 호사가 진족의 호의를 얻으려 한 아이가 있었다.
완전히 호사가 진족을 제 편으로 만들 심산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갈팡질팡하던 호사가 진족이었으나 끝내 아이의 음모를 완전히 밝혀내고 오찬회에서 내쫓았다.
그 사건 이후로 호사가 진족은 오찬회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꺼렸다.
―내가 너무 속없이 굴어서 이런 놈이 꼬인 건가?
―앞으론 뒤에서 너희들이 이야기하는 것만 들을 거다. 알아서 놀다 가라.
주최자는 오찬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는 게 지금의 비정기 오찬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오늘, 주최자의 등장으로 비정기 오찬회는 평소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가면을 썼다고는 하나 주최자가 등장한 건 처음이었다.
당연히 주최자가 오찬회의 초대객 중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딱!
고등학생의 모습을 한 황호가 손가락을 튀기자 황금색의 결계가 형성되어 주변과 소리가 차단되었다.
“대놓고 오랜만이라고 운운할 줄이야.”
황호가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호사가 귀족이 가면 뒤에서 낄낄거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본 걸 오랜만에 봤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냐?”
“그걸 저 아이들 앞에서 한 게 문제다.”
“큰 문제는 아니네. 황명 그룹 쪽에서 고등학생 하나가 오늘 온다기에 설마 했더니 너일 줄이야! 배신자는 안 찾고 뭐 하냐? 고등학생 흉내는 재밌어?”
“후예 복이 없어 남의 자식과 노닥이는 너와 달리 이 몸은 바쁘게 황명 그룹을 이끌고 있지. 후일을 위해 사교 활동을 하는 중이시다.”
황호의 말에 호사가 귀족이 울컥한 듯했으나 아직까진 오랜만에 지인을 만난 반가움이 큰지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하여튼, 저 아이들 앞에서 내 정체를 밝히려는 행위는 그만둬라.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만, 이런 자리에서 네놈의 말실수로 드러나는 건 사양하고 싶군.”
“귀찮군. 인간 세계에 섞일 필요 없이 나처럼 한발 물러나 있으면 그런 수고로움도 없을 것을. 이참에 인간인 척 구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자꾸 헛소리를 하면 네 정체를 만천하에 알려 진정 귀찮은 게 무엇인지 알려 주마.”
황호는 가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호사가 진족이 착용한 가면은 일견 눈 부분이 뚫려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눈가에 움푹 파인 부분 뒤에 검은 천이 덧대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눈을 가리고 있는 중이었다.
황호는 상대의 정체와 가면의 상태를 연관지어 생각했다.
‘또 신격이 올랐나 보군. 각종 매체에서 여러 작품으로 재해석, 재창조되니 인지도가 상승해서 그런 건가?’
저 호사가 진족은 비록 한반도에 기원을 둔 진족은 아니라고 하나 해가 갈수록 인지도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또, 이계 충돌 이후 신위(神位)가 떨어질 법한 죄도 범하지 않은 데다 오히려 뒤에서 알게 모르게 선행을 하고 있으니 신격이 오르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본래는 신의 자리에 있어야 할 몸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저 호사가 진족은 위대하고 전설적인 모험을 마친 존재로, 그의 일대기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부 지역에서는 신으로 숭상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상위 존재 자리를 마다하고 진족으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12지의 일각으로 동맹을 맺어 한반도에 머물고 있다는 것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호사가 진족이 황호의 엄포에 입을 다물자 황호가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기 어렵군. 대화는 나중이다, 제천대성.”
호사가 진족의 정체는 원족(猿族)의 수장, 하늘과도 같이 높은 대성자라는 뜻의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손오공이었다.
제천대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황호가 결계를 풀었다.
파아아……!
결계를 풀자 황금의 이능파가 흩어졌다.
이능파 입자 사이로 사람이 늘어나 있는 게 보였는데, 그중에는 강력한 이능파를 감지하고 달려온 유력 인사 자제들의 경호원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주수혁의 경호원, 김철도 있었다.
대부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호사가 진족, 비정기 오찬회의 주최자 제천대성을 보고 있었으나 김철은 호사가 진족이 아닌 황호를 보고 있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군.’
주오 그룹에서 은광고와 사관학교의 스포츠 교류전 개막식에서 벽사의 춤을 춘 학생의 정체를 캐려 했다.
그것을 안 황호는 역으로 주오 그룹에서 이를 지시한 인물에 대해서 파헤쳤는데, 그 정체가 김철이었다.
백호의 정체는 감췄으나, 벽사의 춤을 춘 인물이 호적상 황명 그룹의 이사장 황명호와 친척 관계라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1학년 0반 소속의 황지호와 백호가 관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을 거다.
‘우리의 정체를 알아냈다 해도 주오 그룹이 황명 그룹과 척을 지고 싶지 않은 한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겠지. 문제는 ‘이유’다. 왜 우리에 대해서 캐는지 알아내고 싶은데.’
황호는 황지호의 얼굴로 김철을 똑바로 보며 웃었다.
짝!
그때, 제천대성이 박수를 짧게 쳤다.
손바닥을 마주하며 이능파를 터뜨렸는지 장내의 모든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순간 제천대성을 향했다.
“자리에 앉자.”
그 말에 오찬회가 시작되었다.
이 자리에는 은광고에 소속한 학생들이 많아 1학년 0반의 처웃는 돌아이에 관해 아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황호에게 말을 걸어 황호가 주최자와 아는 사이냐고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겠다 싶어 물러났으나 금찬솔과 왕찬솔은 다소 끈질겼다.
“황지호 후배님, 아까 대체 뭐였음?”
“주최자님이 아까 오랜만이라고 했잖아. 아는 사이야?”
“하하하하!”
“아오, 후배님이 처웃기만 하고 대답을 안 하시네.”
“하하하하하!”
파란 속에서 비정기 오찬회가 끝났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오찬회장.
이목을 끄는 걸 피하기 위해 회장을 한 번 떴던 황호는 다시 이 자리에 돌아왔다.
오찬회장 안에서 기다리던 제천대성이 돌아온 황호를 보고 턱짓을 해 자신의 건너편을 가리켰다.
제천대성은 가면을 벗고 있었다.
얼굴 전체를 가린 가면이 사라지자, 머리를 감싼 금색의 긴고아와 같은 색의 안대가 보였다.
비록 눈은 가렸으나 가려지지 않은 이목구비가 과연 미후왕(美猴王)이라고 불릴 만큼 빼어났다.
“무슨 일로 모습을 드러냈지? 인사를 하기 위해서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성격이 급하네. 진짜 바쁜가 봐?”
“이 몸은 바쁘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도 안 바쁜 건 아니라고.”
바로 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으나, 결국 이런저런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나누다 본론에 들어갔다.
“협력해 줬으면 하는 게 있다. 힘을 빌려주면 은혜는 갚지.”
“지금 호족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닐 텐데. 힘을 빌려달라고?”
황호는 제천대성과 인연이 있는 저팔계, 저강렵을 떠올렸다.
경계하는 황호를 본 제천대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뭐 거창한 걸 부탁하려는 건 아냐. 일이 잘 풀리면 나중에 그 배신자라는 걸 때려잡는 일에도 협력할게.”
“네가 배신자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딱히 12지 동맹을 배신해서 얻을 게 없는데. 확신이라…….”
제천대성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능파로 봉해져 내용물이 보이지 않는 부적을 황호에게 보여 줬다.
부적을 밀봉한 인장을 본 황호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안에 있는 건 긴고주인 것 같은데. 그걸 왜 없애지 않고 들고 다니는 거냐?”
긴고주는 긴고아를 제어하는 주문으로, 제천대성을 묶는 족쇄이자 약점이었다.
비록 봉인되었다고 하나 그 주문이 담긴 부적을 가지고 다니다니, 황호의 눈엔 제천대성이 심장을 손에 쥐고 다니는 수준으로 미친 것처럼 보였다.
“이 봉인은 관음보살께서 직접 하신 거다. 특별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옥황상제가 와도 안 열려. 그 부적을 없앨 순 있어도 안을 볼 수 없을 거다.”
“안을 볼 수 있는 조건이 어지간히 까다로운가 보군.”
“그래, 봉인이 열리는 건 내 의지에 달려 있으니까.”
제천대성이 손가락으로 인장을 짚으며 선언했다.
“나는 12지 동맹의 불가침 조약을 깬 배신자가 아니다. 만약 나와 원족이 12지 동맹을 배신한다면 그 안에 적힌 긴고주가 황호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제천대성의 손끝에서 이능파가 흘러나와 인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안광을 발동해 그 이능파의 작용을 지켜본 황호가 경악했다.
제천대성이 배신자가 아니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 무려 긴고주를 담보로 건 것이니까.
“……이렇게까지 해 놓고 거창한 걸 부탁하려는 게 아니라고?”
이 상황이 당황스럽긴 했으나 호족의 수장으로서 배신자의 처단에 제천대성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고도 생각했다.
저팔계의 상보심금파를 조의신이 거둬 저강렵의 이빨을 뽑아 버렸다고 하나 그의 천봉원수로서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또 그가 오랜 기간 인연을 맺은 제천대성을 원군으로 부를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긴고주를 손에 넣고 배신자가 될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다소의 희생을 치를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황호가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을 이어 갈 때, 제천대성이 입을 열었다.
“내게 동생이 있는 건 알고 있나?”
부탁할 건 동생에 관한 것이었나?
황호가 제천대성에 얽힌 설화를 떠올리며 말했다.
“의형제인 칠대성을 말하는 건가?”
“아니, 친형제 쪽. 나는 오 남매 중 셋째지.”
“그쪽이었나. 원나라 말 기록에 네 형제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지. 넷째인 통천대성(通天大聖)이 상위 존재 자리에 오른 건 알고 있다.”
제천대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 무지기의 행방을 찾아 줬으면 한다.”
* * *
오늘은 주말이지만 교복을 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학생의 예복은 교복으로, 조문 예절 중에서도 학생은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 교복을 입고 가족에게 헌화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침 일찍, 주말에 교복 차림을 하고 봉안당 근처 꽃집에 가니 플로리스트가 다정한 말투로 말을 걸었다.
혼자 왔냐, 일행은 없냐고 물었는데 나는 애매한 표정으로 웃어넘겼다.
꽃집을 나설 때에는 품 안에 국화꽃 다발이 네 개가 들려 있었는데, 생각보다 양이 많아 손이 부자유스러워 이동하기 어려웠다.
행인은 많지 않았는데 국화를 한아름 안고 가는 나를 한 번씩 다 쳐다보고 갔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헌화의 의미는 여러 가지다.
망자의 편안한 휴식을 기원하고 저승에서의 영생을 바라는 등이 있으나, 어쨌든 조의를 표하는 건 마찬가지다.
꽃의 양은 정해져 있지 않긴 한데, 이 세계에는 가족의 가짜 유해만 있으니 꽃이라도 많아야 조의가 전해지지 않을까?
또 예전의 세계에서는 여유가 많지 않아 꽃을 넉넉히 사지 못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어머니, 동생 둘 각각에게 꽃다발로 헌화하고 싶었다.
봉안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어……?”
봉안당 입구에 아는 사람, 아니, 아는 호랑이들이 잔뜩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