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동생 (10)
은광구 안이라서 그런 건지 올무와 동행한 백호군도 있었고, 이만한 호족들이 모여서 그런지 외출이 금지된 은호의 후예들도 이 자리에 있었다.
신화계 호족, 전설계 호족, 호족의 후예, 호족의 신수 그리고 말도 몇 마디 못 해 본 다른 호족도 보였다.
‘저기 있는 건 청호의 제자들이고, 저건 누군지 모르겠는데…….’
아는 호랑이들을 발견했으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전원 손에 검은 리본이 매달린 하얀 국화꽃 한 송이가 들려 있던 탓이다.
‘설마 우리 가족에게 헌화하러 온 걸까?’
호족은 내 뒷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으니 우리 가족의 기일을 아는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설마 시간을 들여 조의를 표하러 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한두 명도 아니고 이렇게 다 같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저 호랑이들이 정말로 전부 우리 가족을 조문하러 온 거라면 이전 세계의 1주기보다 조문객이 훨씬 많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가장 앞에 서 있던 황지호가 내 쪽으로 와 쐐기를 박았다.
“은인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러 왔다. 조문을 가겠노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확인을 안 하더군. 조문해도 괜찮겠나?”
교복을 입고 있는 황지호가 저 호족들의 대표라니 실감은 안 났지만, 어쨌든 호족의 수장이 조문을 온 거라고 확언했다.
괜찮다고 답하고 가족들의 조문을 와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어쩐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바로 대답을 못 하자 입을 못 여는 이유를 황지호가 멋대로 짐작하고 안심시키듯 말했다.
“‘눈’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도록. 더미를 만들어 신경을 분산시켜 두고, 일부 지역은 통신을 마비시켜서 ‘눈’을 차단시켜 뒀다.”
“길게 있기는 어렵겠지만요. 그 용이 주변에서 정찰 중입니다. 이상이 감지되면 바로 흩어질 예정입니다.”
황지호는 내가 마족의 ‘눈’ 앞에서 호족과의 관계성을 드러내는 걸 꺼려 했었다.
그런데 그 용은 용제건을 말하는 건가?
김신록의 말대로라면 용제건이 호족의 단체 조문을 위해 수고해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황지호의 시선이 내 품에 있는 국화 꽃다발로 향했다.
“꽃이 많으면 네가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꽃다발을 보니 내 생각이 잘못된 것 같군. 다음에는 화환을 보내야겠어.”
“봉안당에 따라 꽃바구니나 화환은 접수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이쪽에서 교섭하면 되겠지. 은인이 가족에게 꽃을 많이 올리고 싶어 한다면 힘을 빌려줘야 하지 않겠나.”
황지호는 처웃을 기세였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웃지 않고 적호와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비록 호랑이들은 하얀 국화꽃을 한 송이씩만 들고 있었으나 조문하러 온 호랑이 수가 많다 보니 꽃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이번 1주기엔 우리 가족들이 꽃을 많이 받겠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 사정이 나아져 그럭저럭 구색을 갖춰 국화꽃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아니었다.
지난 세계의 1주기에는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봉안당을 방문했다가 국화꽃이 생각보다 비싸 낭패를 볼 뻔한 기억이 났다.
“…….”
백호군의 한 손에 국화가, 다른 한 손에는 국화 한 송이를 입에 물고 있는 올무의 리드가 잡혀 있었다.
평소처럼 한마디도 없었지만, 어쩐지 표정이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호랑이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평소에도 말을 높이는 적호와 김신록도 있었고 낯선 호랑이들이 많아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죠.”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호랑이들을 안심시켜 주려고 최대한 평정을 가장해 말했다.
이 말을 하고 나니 삽시간에 조용해져서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싶을 정도였다.
“조의신, 너는…….”
황지호가 말을 하다 말았다.
머릿속에서 서너 번 내가 한 말을 반복해 보다가 문제가 없다는 걸 확신한 후에야 앞장서서 봉안당 안으로 들어갔다.
침울한 얼굴을 한 호랑이들은 헌화를 마치고 봉안당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황지호였다.
“내년에 다시 헌화하러 와도 괜찮겠나?”
그거야 당연히 괜찮다.
만약 나한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가족에게 꽃을 올릴 사람이 없을 텐데, 호랑이들이 와 준다면 가족에게도 좋은 일일 거다.
“그래, 고마워.”
“내년에는 봉안당으로 함께 가도록 하지.”
나랑 같이 갈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 헌화하겠다는 마음이 고마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라면 황지호가 왜 메시지를 안 읽고 무시하냐며 한마디 했을 텐데 오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봉안당에서 호족을 배웅하고 나는 따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의신이 형, 같이 가요!”
“드라이브 겸 돌아갈 땐 저희 차에 같이 타요.”
“저희 아주 오랜만에 저택 밖으로 나왔는데요, 그냥 돌아가기 싫어요.”
“같이 저택에 가서 식사도 하면 안 될까요……?”
왕왕!
은호의 후예들과 올무가 나를 잡았다.
외출이 오랜만이었을 거고, 오랜만에 한 외출 장소가 봉안당이라니 후예들이 가엾게 느껴지고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대로 황명호 대저택에 갈 수는 없었다.
결국 주저하다가 절충안을 제시했다.
“약속이 있어서 저택에 들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은호의 후예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황지호가 나를 에어 리무진에 태웠다.
속은 기분이 들긴 했는데, 오늘 호랑이들이 보여 준 호의를 생각한다면 몇 번이고 속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 * *
호족의 차를 타고 학교로 돌아와 기숙사에 들렀다가 사복을 입고 천동하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천동하와 만나기로 한 곳은 황명 연구소였다.
황명 연구소는 엄밀히 따지면 은광고 학교 부지 밖에 위치한다.
하지만 은광고 연구 구역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있었고, 연구 구역에 소속한 학생들이나 교직원 및 연구원들은 황명 연구소의 연구 시설을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즉, 황명 연구소는 은광고 시설은 아니지만 연구 구역 소속 은광고 구성원들이 자주 이용하는 준 학교 시설인 셈이다.
‘은광구 주요 시설 안내도에 실려 있는 건 봤는데,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네.’
황명 연구소의 유리 벽면이 햇빛을 받으니 일부 색이 변해 황명 그룹 로고를 전면에 띄우고 있었다.
연구소 건물은 은휘관만큼은 아니지만 외관에도 꽤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은휘관의 디자이너에게 혹시 이 건물도 직접 디자인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그 전에 황지호가 쓸데없는 말을 했다.
“오늘 하루는 쉬는 게 어떠냐. 천동하에게는 내가 말하지.”
미리 말도 안 했는데 황지호가 내 동선을 알고 멋대로 따라왔다.
노친네가 내 일과와 위치를 캐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내가 황명 그룹 산하 연구소에 방문하는 건 당연히 알 수밖에 없으니 그러려니 했다.
“됐어.”
“그럴 줄 알았다. 옆에서 지켜보다가 괜찮지 않다고 판단하면 귀가 조치시키겠다.”
“싫다면?”
“기숙사로 귀가하기 싫다면 우리 저택에 초대하도록 하지. 후예들이 좋아하겠군.”
그건 더 싫은데.
뒷말은 하지 않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텐데, 황지호는 그저 씨익 웃었다.
멋대로 내 초대 계획을 세우나 본데, 난 오늘 일정을 마치면 바로 기숙사로 갈 거다.
“아, 어제 조금 중요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하고 싶지는 않군. 만약 이야기를 한다면 저택에서 하도록 하지.”
조금 중요한 일?
무슨 일인지 신경 쓰였지만, 황지호 뜻대로 움직이는 건 싫었다.
그래도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한데…….
“잘 생각해 봐라. 우리 저택에 오고 싶을 땐 언제든 말하도록.”
속에서 갈등하고 있자니 약속한 시각 5분 전이 되어 실험용 흰 가운을 입은 천동하가 등장했다.
천동하는 내 옆에 있는 황지호를 보고도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안녕, 지호가 온다는 얘기는 들었어. 둘 다 어서 와.”
“아는 사이세요?”
“아, 지호는 몇 번 얼굴을 봐서 알아. 예전에 우리 집이 황명 그룹 쪽에 신세 진 적이 있는 데다 연구 건도 있으니까. 가자.”
황지호와 천동하가 아는 사이였나?
플마고 속 천동하의 개인 정보를 떠올렸지만 은광고 외에는 둘 사이의 연결 고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는 공개되지 않은 정보와 사건을 통해서, 혹은 이 세계에서 황지호의 행보가 달라진 결과 둘이 엮인 걸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나중에 어쩌다가 천동하와 엮였는지 황지호에게 물어봐야겠다.
“위에 보고를 올렸더니 네가 황명 연구소에 들어오겠다면 객원 연구원으로 바로 받겠다는 답변을 받았어. 오늘 견학해 보고 생각해 봐.”
제안했던 건 인턴 자리가 아니었나?
지금 내가 천동하나 송대석처럼 객원 연구원 자리를 제안받은 건가?
위에서 입김을 넣었을 늙은 호랑이를 떠올리며 옆을 돌아보니 황지호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조의신, 너는 은광고 입학 전부터 이명을 받은 유망한 플레이어다. 입학 후에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고 있고 에너미 토벌, 인명 구조를 비롯해 다양한 활약을 했지. 객원 연구원 자리에 부족함이 없다. 황명 연구소로선 미리 인재를 확보할 기회를 놓칠 수 없으니, 그런 제안이 간 거다.”
“그렇다는데.”
황지호와 천동하가 어쩐지 죽이 맞는 것 같아서 좀 그렇다.
생각해 보겠다는 답변을 듣고 만족한 천동하는 앞서 걸으며 황명 연구소를 안내했다.
황명 연구소의 주요 시설 소개.
외부에 발표한 논문.
논문을 응용한 신기술.
천동하의 말을 들으며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였다.
“그러면 최상층부터 아래로 내려가며 견학하자. ……응?”
버튼을 눌러도 엘리베이터가 반응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지만, 위로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장 난 건가?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멋대로 작동하는 소리가 나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지호가 운명력을 감지했는지 내 쪽을 봤다.
“……이 힘은!”
운명력은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의 궤적을 언제든지 발동시킬 준비를 하는 것 정도였다.
천동하는 광림 ‘건곤(乾坤)을 품은 눈’을 발동해 주변의 정보를 입수하는 듯했는데, 중앙 제어실을 확인했는데도 이상을 찾을 수 없는지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땡.
지하로 한참 내려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 내부에 있으면 만일의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우리 셋은 빠르게 밖으로 나왔다.
“사람을 보내지.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겠다.”
“여기는 계단이 없는 층인데. 기다려야겠네.”
천동하는 엘리베이터의 고장 혹은 외부의 공격 등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여기에는 뭐가 있죠?”
“아, 그게…….”
천동하는 대답하는 대신 황지호를 봤다.
황지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천동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동생이 있어.”
“동생이 연구소에 있나요?”
“그래. 내 동생에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했단 것 기억나?”
“감금 증후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다르다고 하셨죠.”
천동하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생이 보이는 이능파의 양상은 진족의 ‘깊은 잠’과 몹시 닮아 있거든. 나는 진족의 ‘깊은 잠’을 깨우기 위한 연구에 협력하고 있어.”
깊은 잠의 설명은 예전에 황지호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진족과 후예는 인간과 달리 혼이 불안정해 얼마든지 육신을 떠날 수 있다고 한다.
그 혼이 육신을 떠난 상태가 ‘깊은 잠’에 빠진 상태라고 한다.
‘운명력이 여기에 나를 부른 이유가 있을 거야. 천동하의 동생에게 뭐가 있는 게 분명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동생분을 만나도 될까요?”
“……예전에 내 동생에게 너를 데려오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었어. 곧바로 거절하더라. 너를 번거롭게 하기 싫었나 봐.”
주저하는 천동하를 두고 황지호가 제안했다.
“그 동생과 조의신이 관계가 있는 것 같군. 여기에 온 것도 인연인데, 가 볼까.”
그리고 어두운 복도를 한참을 걸어 이능 실험실인지 중환자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곳에 도착했다.
고대어로 새겨진 주문이 가득한 결계.
현대의 기술로 만든 생명 유지 장치.
고밀도의 이능파가 흐르는 방 안에 온갖 주술과 기기들이 가득했으나 내 눈에 들어오는 건 하나뿐이었다.
‘저기에 있는 사람은…… 설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보다 훨씬 앳되고 야위었지만 아는 얼굴이었다.
아니, 저기에 있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그 동생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내가 애써 얼굴을 딱딱히 굳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자니, 천동하의 동생이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반응한 적은 거의 없는데.”
천동하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눈을 깜빡이던 천동하의 동생이 눈을 감았다.
눈의 깜빡임을 해석하자 목이 메는 것 같았다.
예전에 나눴던 그 동생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의신이 형, 형이 체스 기사 시절 때 별명 있었다면서요.
―‘스테일메이트리스(Stalemateless)’ 맞죠?
눈의 깜빡임은 모스 부호로 어떤 영어 단어를 만들었다.
S, T, A, L, E, M, A, T, E, L, E, S, S.
스테일메이트리스(Stalemateless).
내 별명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