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스테일메이트리스 (1)
“또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는군.”
조의신의 가족의 기일을 앞둔 전날, 조의신은 황호의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이고 그때마다 황호는 답답해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일단 가면 되겠군요. 조문하러 가겠다고 한 황호의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는 있어도 조의신의 눈앞에서 신수나 후예들이 조문하고 싶다고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찻잔을 기울이던 황호가 눈살을 찌푸렸지만 적호가 맞는 말만을 했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조문객을 정하도록 하지. 우선 은호의 후예들과 신수는 뺄 수 없겠군.”
“저와 제 아들은 갈 겁니다. 백호는 어떻습니까? 은광구 안이니 문제없을 겁니다.”
“가겠다.”
왕왕!
황명호 대저택에 머무르는 이들은 모두 헌화하러 가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또, 황호가 분신을 부려 조의신을 아는 이들에게 말을 전하자 대부분 반드시 가겠다고 답했다.
“가겠다는 이들이 많군. 좀 추려야 할 것 같은데. 토족도 부르면 올 것 같지만 빼야겠군.”
“추도하는 자리를 시끄럽게 할 수는 없죠. 말하지 맙시다.”
나중에 옥토연이나 옥토윤이 알게 되면 방방 뛰며 화를 낼 게 분명했으나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은인의 가족을 추도하는 자리에 은호의 후예들을 숨긴 괘씸한 토끼들을 부르느니 나중에 좀 귀찮은 게 낫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 자리에 은호의 후예들이 있었다면 몰래 옥토연을 부르기라도 했겠지만, 후예들은 내일을 대비해 일찍 잠든 상태였다.
“아, 청호의 제자들은 반드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조의신이 청호를 찾아내 준 데다 그 덕에 스승께 무엄한 짓을 한 인간들에게 복수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 은혜를 늘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 그 넷은 부르는 게 좋겠지.”
백호를 제외한 호족들이 김신록이 준비한 배곶감차를 한 잔 더 마시고 추도객 리스트를 확정 지었을 때였다.
김신록이 디바이스를 보다 얼굴을 흐렸다.
적호가 아들의 얼굴이 어둡게 변한 것을 놓치지 않고 다정하게 물었다.
“아들아, 왜 그러느냐.”
“……조의신 군의 기숙사 방 조명이 계속 켜져 있습니다. 아직 잠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김신록은 지익회 고문으로서 기숙사 소등 현황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김신록의 대답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황호가 차를 몇 모금 더 마신 뒤에 입을 열었다.
“가족을 보낸 지 이제야 1년이 됐다. 조의신 같은 성품을 가진 이가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가족을 잃은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지.”
“……그렇죠. 가족을 잃으면 어떨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황호는 제 은인을 떠올렸다.
혼자인 게 익숙해 보이지 않는데, 내버려 두면 오늘 같은 날에도 혼자 헌화하고 와서 방 안에 홀로 있을 게 뻔했다.
조의신은 제 몸이나 정신을 보호하는 일을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황호는 조의신이 선 안의 타인에게 다정하게 굴어도 저 자신에겐 냉정하게 굴어 최선의 수를 두는 것을 대견하게 여겼으나 그게 내키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가족의 기일을 알려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하지는 않겠지. 혼자 감내하려고 할 게 뻔하군. 조의신을 은인이라고 칭하는 우리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다.’
다음 날.
호족들은 모두 조의신이 기숙사 밖을 나서기 30분 전에 봉안당 앞에 모였다.
아마 꽃집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기숙사를 나설 거라는 게 황호의 예측이었는데, 조의신은 예상한 시간대로 봉안당에 도착했다.
“은인의 가족에게 조의를 표하러 왔다. 조문을 가겠노라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확인을 안 하더군. 조문해도 괜찮겠나?”
국화 꽃다발을 품에 가득 안은 조의신이 말없이 호랑이들을 봤다.
조의신은 한참을 대답을 안 하다가 감사하다고 말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들어가죠.”
조의신의 표정을 보고 황호를 비롯한 호족들이 말을 잃었다.
고작 열일곱 살에 불과한 소년이 가족의 1주기에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무표정 뒤로 무거운 슬픔과 그 슬픔을 오롯이 홀로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조의신, 너는······.”
정말 그것으로 괜찮은가?
황호는 결국 그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대신 다음에도 헌화하러 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적군.’
조의신은 청호와 신인을 그리워하는 호족들을 위해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초월적인 무언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 조의신은 호족들에게 가족들을 위해 꽃 한 송이 놓아 달라는 부탁조차도 하지 않았다.
늘 그가 하는 부탁은 자신의 선 안에 있는 누군가를 위한 것들뿐이었다.
황호는 조의신이 천단수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질문도.
―……성헌이는 잘 지내?
초월적인 무언가가 아니면 답할 수 없는 질문이기에 조의신은 그 자리에서 물었을 것이다.
황호와 적호가 아무리 애써도 ‘성헌’이라는 인물에 관해선 알아낼 수 없었다.
그 ‘성헌’의 안부를 알아내어 은인의 근심을 덜어 주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그 이름이 다시 나오고 있었다.
“성헌아…….”
조의신과 동행한 연구소 지하.
조의신은 가족들에게 꽃을 올릴 때 짓던 표정을 하고 눈을 감은 천동하의 동생을 부르고 있었다.
* * *
이 세계에서 나는 스테일메이트리스가 아니었다.
내가 대국한 기록이나 수상한 이력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체스 기사 출신 조의신이라는 설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으로 있을 뿐이다.
이 세계에 있는 내 대국 기록에는 스테일메이트가 단 하나도 없긴 했지만, 별명이 붙지 않았다.
내 대국을 생중계하던 해설 위원이 스테일메이트를 시도하는 상대 선수의 수를 분석하다가 처음으로 나를 ‘스테일메이트리스’라고 칭한 사건은 이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또, 한국에 체스 신동이 탄생했다며 들뜬 기자들이 그 단어를 퍼 날라 내 별명으로 굳힌 적도 없었다.
만약 이 세계의 조의신에게도 그런 별명이 붙어 있었다면, 교내 체스 대회 결승전에서 마지막에 염준열이 스테일메이트로 승부를 보려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테일메이트리스? 그게 무슨 뜻이지?”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단어로군. ‘stalemate’에 ‘less’를 더한 신조어인 것 같은데.”
그러니 나에 관해 조사했고, 체스에 소양이 있는 황지호와 천동하도 방금 천동하의 동생이 눈으로 말한 단어가 나를 칭한다는 것을 몰랐다.
왜 천동하의 동생이 갑자기 그 단어를 눈으로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직접 만나고도 그의 정체를 의심하자 바로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내 별명을 말한 것이다.
‘왜 성헌이가 이런 꼴로 여기에 있는 거야……!’
전 세계에 있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플마고 최종장을 클리어한 그날, 최종장 클리어 보상을 획득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내 기침이 멎지 않아 기침 소리가 밖에도 들린 건지 고시원 총무인 천성헌이 내 방을 들렀다.
그때 내 귀에는 환청으로 생각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들리고 있었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조의신’의 정보 개변과 차원 동기화 및 전이를 진행합니다. 완료까지 앞으로 10초.〉
내가 대답을 못 하고 기침을 하고 있자 천성헌이 밖에서 문을 따고 열었다.
천성헌이 문을 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의 카운트다운이 완료되어 새하얀 빛이 시야를 덮었다.
가능성을 하나하나 따져 보며 과거를 회상해 보다가 무서운 가설을 떠올렸다.
‘······설마 내가 이동할 때 성헌이도 같이 휘말린 건가?’
시스템 메시지는 ‘조의신’의 정보 개변과 차원 동기화 및 전이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만약 단순히 휘말린 것이라면 천성헌은 그날 나와 함께 13조에 실기 시험을 치던 곳으로 떨어졌어야 하지 않나?
천성헌에게는 그 정보 개변 같은 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니 천동하의 숨겨진 동생이라는 정보 조작이나 설정은 붙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냉정하게 사고를 하려 했지만, 천성헌을 앞에 두고 있으니 생각이 잘 되지 않았다.
“성헌아…….”
잠긴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천성헌이 감은 눈을 다시 뜨고 나를 봤다.
움직일 수 있는 건 눈뿐이라 표정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성헌’?”
“응?”
황지호와 천동하, 둘은 의아해하는 얼굴을 했다.
천성헌의 이름은 이 세계에서는 ‘성헌’이 아닌가 보다.
“천동하 선배님, 동생이 ‘발견되었다’고 하셨죠? 그게 언제죠?”
천동하는 방금 천성헌이 모스 부호로 전한 단어도, 또 나의 반응에도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훤히 보이는데도 천동하는 순순히 답해 주었다.
“내 동생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작년 12월이야. 내가 동생을 찾은 정확한 날짜는······.”
날짜를 듣자 벼락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천동하가 말한 날짜는 내가 이 세계에 온 날이었다.
“조의신, 네가 우리 학교 입학 실기 시험을 치르던 날이군. 그런데 방금 ‘성헌’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황지호가 뭐라 묻긴 했지만 답할 정신이 없었다.
내가 답하지 않자 황지호는 추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천성헌과 나를 관찰했다.
“……여기에 있었던 거야? 작년 그날 이후로 계속?”
내가 천성헌에게 묻자 천성헌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어떤 뜻인지 몰라서 다시 물으려고 할 때, 천동하가 첨언했다.
“동생이랑 의사소통을 할 때, 질문에 ‘예’라고 답할 때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 ‘아니오’라고 답할 때는 눈을 두 번 깜빡이기로 했어. 아마 ‘예’라고 답한 걸 텐데…….”
“몇 번 이송된 기록이 있었지. 계속 여기에 있던 건 아니다.”
천동하와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천성헌은 분명 나에게 ‘예’라고 답한 게 분명했다.
작년 그날, 입학식 사건 이후로 천성헌은 이 상태로 계속 이 세계에 있던 걸까.
이 세계에 온 직후 천동하에게 ‘발견’된 걸까.
질문이 많았지만, 중요한 것부터 묻기로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아?”
천성헌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이 세계가 플마고와 유사한 어떤 평행 세계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을 했다.
“……나와 같이 여기로 왔어?”
천성헌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나와 같이 여기에 온 것은 아니었나 보다.
숨통이 트였다.
나 때문이든, 나 때문이 아니든 천성헌이 여전히 감금 증후군 증상을 보이는 건 마찬가지인데, 내 탓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네 의지로 여기에 온 거야?”
천성헌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천성헌이 제 의지로 이 세계에 온 게 맞는 듯했다.
나와 같이 온 건 아니지만, 천성헌은 의도하여 이 세계로 온 것 같았다.
“······왜?”
이 질문에 천성헌은 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