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32화 (331/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2)

천성헌은 조의신과 만나기 전부터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스테일메이트리스(Stalemateless).

체스에서 더 이상 둘 수 있는 수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스테일메이트’.

조의신은 그 스테일메이트를 극히 혐오하는 신예 체스 기사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항상 냉정해 보일 정도로 담담한 태도를 보이는 조의신이 유일하게 호전성을 드러내는 키워드가 스테일메이트였다.

어느 날 스테일메이트리스는 불행한 사고로 재기 불능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잊혔으나 천성헌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체스를 계속했으면 스테일메이트리스가 은퇴하기 전에 대국할 수 있었을 텐데.’

특정 분야에서 어린 천재가 등장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 한동안 그 분야가 유행한다.

정부는 그 분야에서 또 다른 천재를 육성하기 위해서, 기업은 투자 가치를 발견해 투자한다.

부모는 제 아이의 천재성을 믿거나 천재를 육성한 부모가 되기 위해 아이를 그 분야로 밀어 버린다.

한편, 순수하게 그 신동을 동경하여 도전하는 아이도 적지 않은데, 천성헌이 그런 타입이었다.

보육원 출신인 천성헌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홀로 룰을 익히고, 방송을 보며 기보를 익혀 대회에 출전했다.

조의신과 대진표가 겹친 적도 없었고, 조의신과 대국을 할 만큼 위로 올라가진 못했지만 경험을 쌓아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이번 대국은 아까웠어.

―성헌이가 중학생이 될 때면 그 체스 신동하고 결승전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천성헌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그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져 태어나서 처음 보는 친아버지 밑에 입적하게 되었던 탓이다.

천성헌은 자신이 이름만 들으면 아는 재벌가의 서자라는 건 상상도 못 했으나 몇 차례에 걸친 DNA 테스트 결과는 한결같았다.

보육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그 밤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천성헌은 꿈을 자주 꾸지 않았으나 늘 같은 꿈을 꿨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네가 지은 죄가 이리도 무겁구나.

늘 천성헌의 꿈에선 눈을 가린 누군가가 등장했다.

언제나 측은한 얼굴로 천성헌을 내려다보다가 사라지곤 하는데, 그날은 입을 열어 천성헌에게 속삭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

―제가 죄를 지은 적이 있나요?

―…….

천성헌이 몇 번이나 질문했으나, 눈을 가린 누군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꿈에서 나온 건 누구인지,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꿈을 꾼 다음 날부터 시작된 생활은 정말 그가 죄를 지어 벌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롭게 생긴 가족들은 천성헌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러면서도 교육 담당 비서를 통해 천성헌의 자유를 제한했는데, 체스를 그만두게 한 게 그러했다.

―못 배운 애니까 한창 배울 게 많은데 체스는 무슨.

천성헌이 체스를 계속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표하자 천성헌의 새어머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대하고, 친아버지는 침묵했다.

천성헌은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 집안에선 천성헌의 존재를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손이 귀한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 승마 중 낙마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대가 끊기게 생긴 것을 계기로 천성헌을 불러들인 것이다.

‘정말 이제는 체스를 두지 못하겠구나.’

체스 기보를 살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으나 천성헌의 이름을 걸고 대회에 출전하는 건 불가능해졌다.

또 몇 년 뒤, 조의신이 불행한 사고를 계기로 체스계에서 은퇴를 선언하였다.

그렇게 스테일메이트리스 조의신은 점점 먼 사람이 되었다.

꿈을 접고 시작한 재벌가 서자 노릇에도 익숙해졌을 때, 조의신을 만나게 되었다.

그를 처음 본 건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스테일메이트리스다……!’

천성헌은 조의신을 한눈에 알아봤다.

조의신은 인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대학교 선배 조의신은 천성헌이 기억하고 있던 중학생 스테일메이트리스와 달리 키도 컸고,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던 굵은 테의 보호 안경이 없어져 얼굴이 드러난 탓이다.

‘안경을 안 썼네. 시력이 나쁜 건 아니었구나. 아니, 렌즈일 가능성도 있나?’

스테일메이트리스는 다소 예민한 성격으로 조명과 사진을 찍을 때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아픈 게 싫다며 시력 보호용 안경도 착용하고 있었는데 조의신은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모습만 보면 체스 신동 시절을 연상하기 어려웠으나, 스테일메이트리스의 팬이었던 천성헌은 곧바로 그를 알아봤다.

조의신이 더는 체스를 둘 수 없다는 것도 알아도 그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말을 걸 타이밍을 못 잡겠네.’

과외 아르바이트와 공부로 늘 바빠 보이는 조의신은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과 수석 조의신은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친절했고, 특히 후배들을 아껴서 누가 보이면 캔 커피 같은 음료수를 하나씩 사 주곤 해 인기가 좋았다.

서자라곤 하지만 어쨌든 재벌가의 일원인 천성헌을 제 인맥에 넣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아 천성헌의 주변에도 늘 사람이 많았고, 천성헌은 조의신을 방해하기 싫어 적당히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진상의 전역 기념 술자리를 계기로 조의신과 말을 트게 되었다.

—그날 조교님 부르신 게 조의신 선배님이라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조의신이 부른 조교들 덕에 천성헌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자연스럽게 그와 말을 걸 수 있었다.

—해병대 출신 선배가 떠올라서 술 사 달라고 부탁한 건데.

조의신은 그렇게 둘러댔지만, 천성헌은 그에게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고 형이라고 부르며 그를 따랐다.

조의신과 천성헌은 과가 같은 것을 제외하면 공통분모가 거의 없었으나, 천성헌은 조의신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의신이 형, 지금 하는 거 스마트폰 게임이죠? 무슨 게임 하세요?

―어…… 플마고.

천성헌은 게임에 관해 잘 몰랐지만 플마고에 관해선 알았다.

공중파 뉴스로도 몇 번 회자될 만큼 전설적으로 망한 국민망겜 아닌가.

그걸 조의신이 하고 있다고?

―재밌어요? 저도 해 볼까요?

―……재미가 없는 건 아니야.

조의신은 아주 조심스럽게 플마고에 관해 소개했고, 천성헌은 바로 플레이해 봤다.

게임을 잘 모르는 천성헌은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에서 조의신이 처음 플레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넋 놓고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곧 모든 캐릭터가 전멸당해 화면이 붉게 물들고, 절망 어린 표정의 캐릭터들 위로 선택지가 떠올랐다.

[1 . 튜토리얼을 마치고 계속 진행한다.]

[2 . 리플레이한다.]

천성헌은 한숨을 쉬며 화면을 닫았다.

‘정말 망겜 소리 들을 만하구나.’

천성헌은 가끔 플마고를 플레이하긴 했으나, 조의신만큼 열심히 플레이하진 못했다.

플마고를 통해 좀 더 조의신과 친해지는 건 불가능했으나, 대학 생활을 같이 보내다 보니 점점 친해졌다.

천성헌은 조의신과 친해진 후에 아주 가끔 체스에 관한 화제를 입에 올리곤 했다.

처음 조의신은 체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몹시 꺼려 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조의신이 체스판을 마주하진 못해도 체스에 관해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고, 가끔은 조의신이 먼저 체스를 대화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변해 가는 그를 보며 천성헌은 꿈을 하나 품게 되었다.

‘의신이 형이 언젠가 체스를 다시 시작하고, 그럼 내가 계열사 몇 개를 물려받은 이후에 회사 이름으로 의신이 형을 후원하고, 가끔 의신이 형과 체스를 두고…….’

어느 날 갑자기 재벌가에 들어가고 스테일메이트리스가 은퇴하며 그와 견주는 체스 기사가 되겠다는 천성헌의 꿈은 날아갔다.

그래도 가장 존경하던 체스 기사가 다시 체스를 시작하고 그걸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면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

‘의신이 형이 그냥 취미로라도 체스를 다시 둬 줬으면 좋겠다.’

스테일메이트리스가 다시 체스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딱히 조의신이 다시 프로 체스 기사의 길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스테일메이트는 아니야.’

아직 둘 수 있는 수는 남아 있다.

천성헌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의신과 교류를 다졌다.

스테일메이트에 관해 물은 적도 있었다.

―여태까지 형이 둔 기보를 보니까 스테일메이트가 하나도 없어요. 형이 졌던 대국 중에는 스테일메이트로 몰고 갈 수 있는 것도 있던데……. 형은 스테일메이트 싫어해요?

―어, 싫어.

―……스테일메이트리스답네요.

조의신은 스테일메이트라는 단어에 곧바로 반응했다.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천성헌이 놀랄 정도였다.

―엔드 게임이 다가올 때면 늘 스테일메이트부터 경계했어. 그리고 스테일메이트를 걸어오려는 놈이 있으면…….

조의신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박살을 내 줬어.

그렇게 말하면서 조의신이 웃었는데, 다소 수상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조의신의 그 얼굴은 과거 스테일메이트리스가 승리 직후에 짓던 표정을 연상시켰다.

수상한 얼굴인데, 이상하게도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어쩐지 안심이 되고 신뢰감이 솟았다.

‘의신이 형 옆에 있으면 안심이 돼.’

부모 없이 버려진 몸으로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재벌가에 들어가게 된 탓인지, 천성헌은 언제나 자신을 이방인처럼 느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다과회에도 그를 초대했다.

―의신이 형, 차 좋아하세요?

―그냥 그런데, 왜?

천성헌은 은박 처리된 초대장을 내밀었다.

천성헌을 입적시켜야 한다고 가장 큰 목소리를 낸 인물이 그의 할아버지였는데, 인맥을 다지고 사람을 가리는 안목을 키울 겸 정기적으로 천성헌의 이름으로 사교 모임을 열 것을 명했다.

그게 이 다과회였다.

이런 다과회에 조의신을 초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최근 천성헌이 친하게 지내는 선배, 조의신에 관해 안 집안에서 그를 직접 보고자 했다.

둘째, 차를 좋아하는 천성헌이 그에게 좋은 차를 대접하고, 또 그가 이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성헌은 머릿속에서 이유 두 가지를 정리했으나 그 이유 중 하나도 제대로 대지 못했다.

천성헌이 어물거리고 있을 때, 조의신이 곧바로 답했다.

―알았어, 갈게.

초대장을 한 번, 천성헌의 얼굴을 한 번 본 조의신은 두말없이 오겠다고 답했다.

다과회에 온 조의신은 재벌가 자제들 사이에서도 완벽한 매너를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조의신은 집안만 따지면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으나, 명문대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우수한 데다 몸가짐이 남달라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호감을 가졌다.

그래서 안심했다.

조의신이 천성헌으로 인해 피해를 볼 일은 없을 거라고.

그게 착각이란 걸 깨달은 건 이미 늦은 이후였다.

―의신이 형, 지금 과외 갈 시간 아니에요?

―어…… 오늘은 쉬게 됐어.

어느 날 갑자기 조의신은 과외 아르바이트에서 전부 잘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사요? 갑자기 살고 있던 원룸에서 나오게 됐다고요?

―어, 아직 방을 구하지 못해서 당분간 고시원에서 지내게 될 것 같아.

그 당분간은 점점 길어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건 조의신의 취직처가 낙하산으로 채워졌을 때였다.

천성헌은 낙하산에 제 이복형의 입김이 닿았다는 걸 알자 조의신의 불행의 원인이 자신임을 알았다.

하반신이 마비된 천성헌의 이복형은 천성헌을 상대로 열등감과 분노를 품고 있었으나 뒤에 조부가 버티고 있는 천성헌을 해할 용기나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조의신은 달랐다.

그의 인생을 망가뜨리면 천성헌의 속을 긁을 수도 있으나 후환은 없었다.

또, 천성헌의 조부는 뒷배 없는 조의신까지 지킬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그를 상대로 화풀이해서 손주의 마음이 풀린다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천성헌은 복수를 위해 저 자신도 체스 피스로 삼아 움직이기로 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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