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36화 (335/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6)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도 기보 상단에 적힌 이름은 ‘조의신’이었다.

천동하는 천성헌이 조의신의 팬이라는 걸 알고 있고,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는 이복동생에게 질 나쁜 장난을 칠 인물도 아니었다.

이 기보는 진짜임이 분명했다.

‘의신이 형이 다시 체스를 두기 시작했어!’

그 기쁨이 뇌파와 이능파에도 반영이 된 건지 천성헌의 신체에 연결된 전극을 통해 파장을 기록하는 모니터에서 ‘삣’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천동하가 모니터를 확인하고 엷은 미소를 지은 걸 보니 자신의 상태가 좋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기쁨이 천성헌의 머릿속을 지배했으나 점차 의문이 피어올랐다.

‘왜 의신이 형이 다시 체스를 하려 한 거지? 혹시 정신 공격을 하는 에너미와 관계가 있는 걸까?’

게임 내용을 되짚어 본 천성헌은 조의신의 의도를 짐작했다.

새삼 이 세계가 얼마나 험악한 세계인지 실감이 났으나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한부 판정을 받아 제 장례식을 스스로 준비하던 조의신의 상황을 고려하면 낯선 위협에 맞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니 천성헌은 제 우상이 체스판 앞에 다시 선 걸 순수하게 기뻐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보가 지나치게 짧은데. 스콜라 메이트? 상대는 초보자였나?’

눈을 크게 뜨고 기보를 살피던 천성헌이 4수 만에 끝난 기보를 보고 아쉬워했다.

기보에 조의신의 이름이 쓰여 있긴 했으나, 그 내용물은 조의신의 대국답지 않았다.

스콜라 메이트를 당한 상대는 플마고의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인 마진승이었는데, 플마고 광팬이었던 조의신의 성격을 고려하면 뭔가 이상했다.

체스 초보자인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수를 보여 주고 생각할 기회를 주는 대신 잔인하게 스콜라 메이트로 4수 만에 끝내 버리다니.

‘……스콜라 메이트를 둬야 할 이유가 있었나?’

그 의문은 기보 옆에 표시된 대국 시간을 보니 더욱 깊어졌다.

고작 4수 만에 끝난 것치곤 대국 시간이 지나치게 길었다.

천성헌이 표정도 바꾸지 못하고 눈을 연신 깜빡이자 천동하가 그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홀로그램을 몇 개 더 띄웠다.

“기보는 하나 더 있어. 일정 문제로 하루 두 번 대전을 치렀으니까. 스테일메이트 측에서 공개한 중계 영상도 같이 보여 줄게. 아, 스테일메이트는 우리 학교 체스 소모임 이름이야.”

스테일메이트?

스테일메이트리스가 가장 싫어하는 게 그거 아닌가.

그 학교 체스 소모임은 왜 이름이 그 모양인가.

천성헌은 불만스럽게 생각했으나 어쨌든 조의신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무대와 중계 영상을 제공하는 건 기껍게 여기기로 했다.

영상 속 조의신은 교복에 명찰을 잔뜩 단 여학생, 2학년 0반 연가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손이 느려. 형답지 않게 수도 얕아. 아직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한 건 아니구나.’

손이 점점 느려지던 조의신은 어느 순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장고가 필요할 만큼 꼬인 국면도 아닌데, 조의신은 배터리가 다 한 것처럼 멈춰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조의신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카메라도 한순간 조의신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러자 화면에 박스석에서 응원하고 있는 학생들이 비쳤다.

홀로그램으로 조의신 이름을 띄우고 있는 게, 조의신을 응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도 형을 따르는 애들이 많구나. 게임 속에선 1학년 0반은 출석을 거의 안 했는데, 그래도 몇 명 있네. ……어?’

천성헌은 조의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이 전부 플레이어블 캐릭터나 NPC임을 알아챘다.

이들 중 다수가 현시점에서는 학교에 등교하지 않을 인물이라는 것도 떠올렸다.

김유리와 한이를 제외하면 게임 속에선 아직 등장하지 않는 인물들이었다.

‘저기 키가 작은 남학생, 맹효돈인가? 쟤는 2학년에 구출되고 허공에 좀 떠 있는 사월세음은 3학년에 구출되었던 것 같은데. 의신이 형이 구한 거구나. 그리고 남은 한 명은…….’

천성헌은 의미심장하게 웃는 중인 눈이 곱상한 남학생을 바라봤다.

‘신화계 호족이 왜 저기에 있지?’

NPC인 신화계 호족 황호.

주인공이 1학년일 때는 은광고의 이사장으로서 언급만 되다가 2학년으로 진급하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진족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워낙 변덕스러운 행보를 보였기에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긴 했으나 천성헌은 늘 그게 마음에 걸렸다.

플마고에는 등장하는 캐릭터가 많고 이들을 둘러싼 서사 구조도 복잡했다.

그러다 보니 깊게 다루어지지 않는 사소한 요소들이 존재했는데, 황호의 퇴장 역시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왜 계속 신경 쓰이는 걸까. 호족 캐릭터들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가?’

천성헌은 플마고에 나오는 캐릭터들 중 호족들이 마음에 들었다.

적호가 플마고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때 사망하자 저도 모르게 화면을 꺼 버렸을 정도였다.

천성헌은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서 주연 격인 백호도, NPC 중에선 사망한 적호와 행방이 묘연해진 황호도 마음에 들었다.

‘황호가 의신이 형과 같은 반이라면 별일 없지 않을까?’

그리고 조의신의 대국을 본 그날 밤, 천성헌은 꿈을 꿨다.

늘 그랬듯 눈을 가린 누군가가 나오는 꿈이었다.

그 누군가는 언제나처럼 가엾고 불쌍한 것을 보는 듯한 얼굴로 천성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전과 다른 게 하나 있긴 했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더 선명하게 보여. 꿈을 꾸는 빈도도 늘었어.’

천성헌은 늘 같은 꿈을 꿨으나 꿈을 자주 꾸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세계에선 거의 매일 같이 누군가를 꿈에서 보게 되었다.

또 그 누군가의 표정와 형체는 예전보다 더욱 뚜렷해졌다.

천성헌은 저 존재를 이 세계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로 했다.

‘눈을 가리고 꿈에 등장하는 누군가. 이 세계에서 그럴 만한 존재는…….’

신 혹은 상위 존재라고 불리는 것.

보통 그들의 신격은 눈을 통해 증명되는데, 그 신격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정신력이 약한 인간은 금방 미쳐 버린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상위 존재는 눈을 가리고 현계에 간섭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당신은 상위 존재인가요?”

천성헌의 물음에 눈을 가린 누군가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보육원을 떠나는 날 그에게 죄에 관해 속삭일 때 이후로 처음 보인 반응이었다.

“왜 제 꿈에 오신 건가요? 제가 지은 죄와 관계가 있는 건가요?”

상위 존재는 반응하지 않았다.

천성헌은 질문을 바꾸었다.

“지금 제 몸에 일어난 일과 제가 지은 죄 사이에 관계가 있는 건가요?”

상위 존재의 입술이 작게 열렸다가 닫히길 반복했다.

마치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대답하기 모호한 질문이었나?’

천성헌은 그 이후에도 상위 존재를 마주칠 때마다 질문을 던졌으나 답변을 얻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날 단서를 찾지 못한 채로 시간이 점점 흐르는 사이, 조의신은 체스 대회 결승에 올라 스테일메이트를 시도하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상대로 우승했다.

그에 비해 천성헌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어 그의 꿈이었던 조의신과의 대국이 묘연했다.

그래도 천성헌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일어날 가능성이 제로였다면 그 미지의 존재가 나를 여기에 부르지 않았을 거야. 방법이 있겠지.’

천성헌은 천동하가 전하는 소식을 통해 이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들으며 조의신이 뒤에서 어떻게 활약했을지를 예상해 봤다.

거기에 만약 자신이 일어나면 어떻게 도울지도 시뮬레이션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천성헌은 정신을 바쁘게 움직이며 이 세계에 관해 배우고 적응했다.

‘이곳의 이복형은 믿을 만한 인물이고, 나를 깨우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까 몸은 언젠가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사이에 나는 정신을 단련하자.’

몇 번이나 이송을 거듭한 끝에 천동하가 일한다는 연구소에 오게 되었다.

연구소는 병원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소독약 냄새 대신 오랜만에 커피 냄새를 맡는 게 그중 하나였다.

“……네가 있는 방에는 외부 음료 반입을 금지했는데, 대체 누구야.”

천동하가 연구원이 두고 간 종이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종이컵에는 다 식은 믹스 커피가 담겨 있었다.

‘그냥 뒀으면 좋겠다.’

이곳에 오기 전, 그리 넓지 않은 고시원 식당에서 조의신과 마시던 믹스 커피가 생각났다.

재벌가의 사교 모임이던 다과회에서 마시던 차보다 더 마음 편하고 맛있게 느껴지던 추억의 음료였다.

종이컵을 치우려는 천동하를 향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천동하는 등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는 연구소에 있을 때면 언제나 그의 이능인 천리안을 통해 천성헌을 보고 있었기에 바로 그의 의사를 알아챘다.

“아니야? 싫어? 음…….”

천동하가 제 손에 들려 있는 종이컵을 보다 말했다.

“커피 좋아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천성헌은 차를 좋아했다.

차 맛 자체도 즐겼고 차를 마시고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

그리고 믹스 커피도 그 차의 범위에 들어갔다.

“그래. 지금 네 상태로는 커피를 마시는 건 어렵지만, 커피 향 방향제를 두는 것 정도는 가능해. 아, 나도 이거 자주 마실게.”

천동하는 이복동생의 기호품을 안 게 기쁜 건지 그 이후로 자주 믹스 커피를 마시곤 했다.

천성헌은 직접 내용물을 마실 순 없었으나 간접적으로 향을 즐기는 것 정도는 가능해졌다.

“오늘은 의신이랑 만나서 체스를 뒀어. 얼마 전에 연락처를 교환했거든.”

어느 날, 천동하가 조의신을 직접 만난 후 대국에 관해 이야기했다.

기보를 보여 주며 설명하던 그가 말했다.

“체스를 오래 두면 손이 식는 것 같았어. 네 판을 두고 2승씩 가져갔는데 더 두려고 하더라. 그래서 네 핑계를 대면서 그만두게 했지.”

핑계?

어떤 핑계를 말하는 거지?

“내 동생이 네 팬이라고 했어. 네 몸 상태를 알고도 대국을 더 하려 했다는 걸 알면 화낼 거라고.”

천동하가 자신에 관해 조의신에게 말한 건 조금 미묘하긴 했으나, 그를 무리시키지 않을 핑계로 삼은 거라면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의신은 자신이 여기에 왔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할 테니, 천동하의 동생으로 자신을 연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너에 대해 말하니까 네가 은광고에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잠시 말을 멈춘 천동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신이랑 만나 볼래? 여기로 부를게.”

천성헌은 갈등했다.

그러나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조의신과 만나 봤자 짐만 된다고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였다.

‘도움이 되고 싶어서, 잘못을 빌고 싶어서 왔는데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못 해.’

눈을 두 번 깜빡였다.

천동하는 천성헌의 의견을 존중해 줬다.

“……그래. 혹시 마음이 바뀌면 눈을 세 번 깜빡여. 아니면 모스 부호로 말해도 되고.”

천성헌은 자신이 조의신을 부르기 위해 눈을 깜빡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의지로 조의신과 만날 때는 이 감금 증후군이 나은 이후가 될 테니까.

그렇다면 눈을 깜빡이는 대신 제 발로 조의신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조의신이 자신을 찾아왔다.

딱딱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조의신의 표정을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였다.

‘내가 그 천성헌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와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천성헌은 조의신에게 가짜 취급을 받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천성헌은 길게 눈을 깜빡였다.

스테일메이트리스를 부르기 위해서.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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