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37화 (336/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7)

왜냐는 질문에 천성헌은 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천성헌이 답할 때까지 기다려 봤으나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거구나.’

현재 천성헌의 의사소통 방식이 제한되어 있긴 했으나 대답할 의사가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힌트를 줬을 거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나를 스테일메이트리스라고 부른 것처럼.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사가 전해졌다고 생각한 건지 천성헌이 눈을 떴다.

천성헌은 가만히 이쪽을 봤다.

‘그때도 결국 성헌이는 끝까지 먼저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천성헌은 겉보기엔 그저 온화해 보이지만 고집이 세고 입이 무거웠다.

천성헌이 말을 안 한다면 내가 직접 알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를 두고 천성헌의 집안이 벌인 일들과 천성헌이 한 일을 내가 직접 알아내야 했던 것처럼.

‘……폐암에 관해서 한마디도 안 하다가 유서를 남긴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 나는 성헌이한테 대답을 강요할 입장이 아니야.’

옛 생각을 하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머리가 식은 후에야 이쪽을 응시하는 황지호와 천동하가 보였다.

노친네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있는 자리에서 더 틈을 보이고 실수를 할 순 없었다.

전극과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천성헌을 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건 여전했지만, 다음 수를 생각하려 애썼다.

‘……진정하자. 성헌이가 여기까지 온 경위와 이렇게 된 원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나야. 내가 수를 두지 않으면 성헌이는 계속 여기에 있어야 해!’

이야기는 천성헌이 병상에서 일어나 직접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들으면 된다.

더 이상 아무 수도 둘 수 없는 상태로 판을 끝내는 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아닌가.

스테일메이트리스라고 부르는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그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 줘야 할 때다.

“의신아, 내 동생이랑 아는 사이였어?”

“네, 여기에 이런 상태로 있는지는 몰랐어요.”

“그래서 내 동생이 널 부르는 걸 꺼려 했나…….”

천동하는 괴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천성헌에게 했던 말은 어딘가 이상했는데, 감금 증후군에 걸린 동생과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천동하는 아직 위화감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동하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저번에 동생분이 플레이어라고 하셨죠. 어떤 이능을 쓰나요?”

“아직 17세가 아니라 광림은 못 써. 스킬은 전부 파악했는데, 나와 비슷한 계열인 것 같아.”

스킬을 전부 파악했는데 특이 사항을 발견하지 못하다니.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이 두 가지는 플마고 세계에 없던 스킬이다.

‘만물사용’은 드물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긴 하고 ‘운명력’은 예전에 황지호가 해석한 고서에서 추상적으로 언급된 정도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스킬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긴 하다.

그래도 내 스킬은 조금도 천동하와 비슷한 계열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즉, 천성헌은 나와 비슷한 계열의 스킬을 소지한 게 아니다.

‘광림을 못 쓰는 상태라 비슷하긴 하지만 나와 다른 게 분명해.’

아직 단서가 부족했다.

나는 플마고 최종장을 클리어한 직후 이 세계에 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적합성 심사.

정보 개변.

차원 동기화 및 전이.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그 상황을 되돌려 봤으나 천성헌이 저렇게 된 이유나 그를 일으킬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안 돼. 힌트가 아직 적어.’

나는 내가 둘 수 있는 수를 하나 떠올렸다.

그 수는 유용하긴 했으나 리스크도 상당했다.

나는 그 리스크를 고려해 날짜를 셈했다.

‘어쩌면 플레이리스트 방청에 못 갈 수도 있겠는데.’

그래도 둘 수 있는 수는 두기로 했다.

*    *    *

황명호 대저택.

아침 일찍 봉안당에 헌화하러 갔던 호족들이 모두 귀가했다.

백호와 은호의 후예들 그리고 신수는 일찍 황명호 대저택으로 돌아왔으나 적호와 김신록은 봉안당에서 시간을 보내다 오느라 가장 늦게 저택에 도착했다.

‘우리와 조의신밖에 조문을 오지 않았다니. 조의신이 제 가족의 기일을 널리 알리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이건 좀 씁쓸하군.’

행여 조의신의 가족들의 지인들이 오면 김신록의 교사 신분을 이용해 조의신 대신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눌 예정이었다.

그러나 망을 보던 용제건이 마지막으로 헌화할 때까지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봉안당에 헌화하러 온 이들은 적지 않았으나 조의신의 가족들에게 꽃을 올린 건 호족들과 조의신뿐이었다.

적호는 이 사실을 단순히 씁쓸하게 여겼으나 인간 사회에 섞여 지낸 기간이 긴 김신록은 이상하게 여긴 듯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들아, 왜 그러느냐?”

“……뭔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니?”

적호의 물음에 김신록이 주저하다 말했다.

“……조의신의 가족을 찾는 이들이 없는 게 이상해요.”

김신록은 국화꽃 냄새가 밴 손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조의신의 동생들이야 아직 어리다고 하지만 부모는 다릅니다. 두 사람 다 맞벌이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했을 텐데, 1주기에 아무도 오지 않다니 이상합니다.”

“조의신은 가족을 매우 아끼는 듯했다. 그의 부모는 사회생활보다 가정을 우선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가정 밖의 사람들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다.”

적호는 최근 저택에서 아들과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저택 밖의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적어졌다.

그 생각으로 말을 꺼냈는데 여전히 김신록은 개운치 않아 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조의신 같은 아들을 키워 낸 이들을 위해 1주기에 꽃을 올리는 이가 없다니…….”

적호는 김신록을 가만히 봤다.

저와 웅녀를 반반 닮은 얼굴에는 수심과 의문이 가득했다.

‘……제 사례와 비교하는 건가.’

김신록은 이계 충돌 이후 은광고에서 신분과 얼굴을 바꿔 가며 교사를 하고 있다.

지나치게 오래 근무하면 인상이 강해질 수 있으니 보통 가짜 신분이 40대가 되기 전에 그 신분을 교체하곤 했다.

하지만 우수한 은광고인들은 그 기묘한 신분 교체를 은연중에 감지했는지, 김신록에 연관된 은광고 괴담이 하나 돌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은광고에 근무하는 교사’가 그러했는데,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고 괜히 제 아들이 신경 쓸 게 걱정되어 적호가 나서진 않은 상태였다.

‘내 아들의 옛 신분을 아직도 추모하는 졸업생이 있었지.’

적호의 아들은 좋은 교사였다.

그래서 당연히 그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제자가 적지 않았다.

김신록은 먼 옛날 첫 신분을 지울 때 제자들이 몰려와 우는 모습을 보고, 그 이후부터는 신분을 지울 때가 되면 외근을 주로 하며 아이들과 엮이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도 김신록을 기리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긴 기간 김신록을 잊지 않고 꽃을 올리는 게 성국언이었다.

“네 옛 제자는 아직도 헌화하러 오는 것 같더구나.”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리 가짜 신분이라고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김신록은 기뻐하면서도 씁쓸해했다.

두 부자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거실로 은호의 후예들이 나왔다.

방금까지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중이라 그런지 옷 여기저기에 검댕이 묻어 있었고 탄내가 났다.

“적호 님! 신록 오빠! 산령 못 봤어요?”

“산령이 요새 점점 실체를 갖춰 가잖아요. 소화 기능이 생긴 게 아닌가 해서 저희가 만든 음식을 먹여 보려 했는데…….”

“아, 오늘 메뉴는 계란간장밥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그릇을 내밀어 보였는데, 그릇 안은 어두운색 일색이었다.

간장이 들어갔다고는 하나 계란과 쌀밥이 들어가면 밝은색이 섞여 있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했다.

적호는 산령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그의 아들은 다른 생각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산령은 오늘 하루 내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령은 천익산에서 지나치게 멀어지면 좋지 않으니 저택에 두고 가기로 한 것 같은데…….”

“내가 찾으러 가마.”

거실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던 백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호의 무릎 위에 굴러다니던 신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끄응?

신수는 산령 따위는 내버려 두고 놀아 달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백호는 신수를 안아 들고 밖을 향해 걸었다.

“어? 백호 님이 그렇게까지 수고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산령에겐 그냥 맛보기만 시킬 생각이었으니까요.”

“아니다. 다녀오마.”

백호는 은호의 후예들의 만류에도 저택 밖으로 나갔다.

“백호……?”

적호는 백호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음식을 먹고 무사히 소화하기 위해 이능파를 전신에 순환시켰다.

*    *    *

천익산, 호족의 신목(神木) 천단수(天壇樹) 앞.

나는 천동하와 천성헌이 있는 황명 연구소를 뒤로하고 이곳으로 왔다.

‘예전에 이곳에서 성헌이의 안부를 물었지.’

이곳에서 초상우주와 교신할 때, 나는 질문을 몇 개 던졌다.

그중 두 개가 천성헌의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이전 세계에 있는 내 후배, 천성헌. 걔는 잘 지내?

―……성헌이는 잘 지내?

초상우주가 왜 대답을 못 했는지 짐작이 갔다.

천성헌은 이전 세계에 있지도 않고, 더 이상 천성헌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러니 질문에 ‘예’, ‘아니오’로 답하기 곤란했을 거다.

‘그때 위화감을 느끼고 사고를 하거나 질문을 더 했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둔 수를 무를 수도 없으니, 다음에 두는 수로 이를 커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놈은 계속 여기에 있을 생각인가.’

교신을 시작하기 전, 나는 동행한 호랑이를 돌아봤다.

나는 혼자 천익산에 오지 않았다.

“…….”

내 옆에는 황지호가 있었다.

황지호는 연구소에서부터 계속 말없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

천단수 앞에 서서 물었다.

천동하야 동생 일이라 머리가 복잡해져 위화감을 바로 느끼지 못했다고 하지만 황지호는 달랐다.

황지호는 평소대로 머리를 굴려 나름의 결론을 냈을 게 분명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말하고 싶은 것도 많다. 지금까지의 네 행적과 오늘 네가 한 발언으로 세운 가설이 몇 개 있으니까.”

예상대로 저 노친네는 오늘 일로 단서를 여러 개 잡은 모양이다.

황지호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로 말을 계속했다.

“조의신 네가 지금부터 무모한 짓을 하리란 걸 알고 있다. 내가 말려도 듣지 않을 걸 안다. 자칫하다간 수를 둬 내 시선을 피해 무모한 짓을 할 가능성이 있지.”

“…….”

황지호가 내 속을 훤히 본 것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니 적어도 조용히 지켜보고 수습을 할 생각이다. 질문은 그 이후에 하겠다.”

“……그래.”

나는 천단수의 수피 위로 손을 올리고 스킬을 발동했다.

그러자 시스템 음이 연이어 들렸다.

〈스킬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을 사용합니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우우웅—!

천단수에서 빛이 솟아 하늘로 뻗어 나갔다.

몸과 머릿속이 텅텅 비는 듯한 감각과 동시에 황지호의 경악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 듯했다.

“그 힘이 동시에 발동하다니! 게다가 천단수가……!”

운명력이 발동하면 교신의 부담이 덜어질 거다.

지금 내가 던질 질문은 굉장히 추상적이기에 정보량이 많이 필요할 텐데, 잘된 일이었다.

정신이 공허해지는 감각에 저항하기 위해 주먹으로 수피를 한 번 크게 두드리고 말을 이었다.

“성헌이의 상황을 해결할 힌트를 줘.”

긍정과 부정.

보통 초상우주는 이 두 가지로만 답하지만, 예전에 ‘장소’를 기준으로 한 힌트를 준 적이 있다.

우기환 일당이 천익산에 설치한 함정을 뚫고 야밤에 천단수 앞에서 산령의 권유에 따라 교신을 사용한 날.

초상우주는 내 시야를 조작해 안광 스킬과 천익산을 주시하라는 힌트를 줬다.

그렇다면 이번 건도 가능할 것이다.

파아아아!

순간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실제로 이 주변이 푸르게 변한 게 아닌데, 내 시신경을 조작한 듯한 감각이었다.

‘가장 푸르게 물든 곳은…… 빛이 향하는 건…….’

은광고의 중심, 은휘관이 있는 쪽이었다.

내 시야 속에서 점멸하는 빛 덩어리가 허공에서 맴돌다 순식간에 땅으로 처박혔다.

〈경고, 초상(超象)우주와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과다한 의사소통은 적합체의 부하를 초래합니다.〉

힌트는 얻었다.

이 이상으로 기력을 소모해도 무의미해 곧바로 교신을 중단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천단수를 짚고 쓰러지듯 무너졌는데 황지호가 내 어깨를 붙잡아 지지했다.

운명력이 같이 발생한 데다 질문을 하나밖에 하지 않아서 그런지 기절하지는 않았다.

“조의신! 괜찮나? 이능파의 흐름이 엉망이군. 당장 저택으로…….”

“은휘관의 지하에 뭐가 있어?”

밑도 끝도 없는 내 질문에 황지호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망설이던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은휘관의 지하에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가 잠들어 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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