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38화 (337/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8)

황지호가 존경하는 존재들은 짐작이 갔다.

천신, 신인 그리고 은호.

그중에서도 은휘관 밑에 잠들어 있을 만한 이라면 하나뿐이다.

‘상위 존재인 천신은 이 세계에 없을 거고 신인인 공청훤은 인간이 되었어. 그렇다면…….’

예전에 나는 황지호와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은호는 죽었어?

―아니. 단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은휘관의 지하에 있는 건 깊은 잠에 빠졌다는 은호겠지.’

은호의 존재를 기리기 위해 ‘은(銀)’ 자가 붙은 호족의 신역의 이름은 은광구가 되었고 그 위에 세운 학교의 이름은 은광고라고 이름이 붙었다.

또 은광고 내에서도 ‘은’ 자가 들어간 건물이 많았다.

황명호 이사장이 집무를 보는 은휘관.

적호가 은밀한 일을 처리하는 은영관.

백호가 수련하는 은련관.

은광고의 건물 중에는 호연관이나 상인관처럼 ‘은’ 자가 들어가지 않는 건물이 있긴 하지만, 호족들이 사용하는 건물에는 하나 같이 ‘은’ 자가 들어갔다.

은호의 존재는 개천신화에 남지는 않았으나 호족들은 여전히 은호를 아끼고 있었다.

‘그 신화 속의 은호가 성헌이를 깨우는 힌트라고……?’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엮기에는 단서가 적었다.

떠오르는 거라곤 천성헌을 만나기 전 천동하가 했던 말 정도였다.

―그래. 내 동생에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고 했단 것 기억나?

―감금 증후군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다르다고 하셨죠.

―그래, 동생이 보이는 이능파의 양상은 진족의 ‘깊은 잠’과 몹시 닮아 있거든. 나는 진족의 ‘깊은 잠’을 깨우기 위한 연구에 협력하고 있어.

천성헌은 깊은 잠에 빠진 것과 유사한 이능파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은호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초상우주가 직접 은호가 깊은 잠에 든 곳을 지목했으니 둘은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거다.

‘유사한 점을 하나 찾았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결론 내릴 수 없는데…….’

가설을 몇 가지 세웠지만, 단서가 적었다.

게다가 기록에도 남지 않은 은호에 관한 단서를 모으는 건 쉽지 않을 거다.

유일하게 단서를 모을 만한 곳이 있다면, 직접 은호와 같은 시대를 보낸 호랑이들뿐일 거다.

일단 눈앞의 황지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은호는 어떤 진족이었어?”

“……조의신, 지금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황지호가 걱정 반, 어처구니없음 반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보면 이상하긴 할 거다.

갑자기 학교 선배의 동생 상대로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다가 천익산으로 뛰어가 은휘관의 지하에 뭐가 있냐고 묻고 호족의 옛 수장에 관해 묻다니.

나 같아도 수상하다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이 노친네가 나를 수상하게 여기고 뒷조사를 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냥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뒷수습은 내일의 나에게 부탁하면 될 거다.

“나는 괜찮아. 은호에 관해서 말해 줘. 인물상, 성격, 수장이 된 계기,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등 아무거나 괜찮아.”

“조의신, 은호에 관해 숨기려는 건 아니지만 지금 네 상태는…….”

내가 말을 번복할 기세가 없자 황지호가 미간을 좁히며 내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황지호가 마음먹고 힘을 주면 내 어깨가 가루가 될 텐데, 아직 멀쩡한 걸 보니 힘을 가감하는 걸 잊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건 아닌 듯했다.

행동 방침을 정한 건지 한숨을 한 번 쉰 황지호가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오늘 내 저택에서 머물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겠다고 약속하면 이야기를 들려주마.”

“알았어.”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황지호가 복잡한 얼굴로 앞장섰다.

하산하며 디바이스를 조작하던 황지호가 말했다.

“에어 셔틀을 대기시켜 뒀다.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여기까지 와서 저택으로 돌아간다고?

나는 당연히 은휘관으로 향하는 줄 알았다.

은휘관이 목전인데 돌아갈 수 없었다.

“……!”

“……조의신?”

곧바로 거절하려 했으나 입을 열자마자 목에서 쇠 맛이 느껴지고 잔기침이 나왔다.

저번처럼 심하진 않지만 어쨌든 피를 토하긴 한 것 같았다.

나는 잠시 입을 막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에 말했다.

“……은휘관 지하에 가고 싶은데.”

“방금 피를 토할 뻔한 주제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입 밖으로 피를 토하진 않아도 호랑이의 후각을 속일 수는 없었나 보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황지호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열었다.

*    *    *

은휘관의 지하.

황호가 설계하고 보강한 결계 안, 누군가가 기둥 뒤에 숨어 지상과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누군가가 밑으로 내려온다는 신호였다.

엘리베이터 패널 위는 숫자가 표시되는 대신 이능파의 밀도가 표시되었는데, 그 밀도를 확인해 보니 이곳으로 향하는 존재는 둘로 추측되었다.

그중 하나는 강력한 이능파를 띠고 있어 신화계 호족인 듯했다.

엘리베이터 패널을 응시하는 존재는 지금 여기로 오는 것이 황호와 조의신이라고 생각했다.

땡!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당도해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이 열린 순간 등장한 건…….

“…….”

크르르……!

문이 열리고 등장한 건 황호와 조의신이 아닌 백호와 호족의 신수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잠복해 있는 존재를 눈치채고 그 존재가 숨어 있는 기둥 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산령, 여기에는 어떻게 온 거지?”

백호는 그렇게 말하며 호족의 신수의 목에서 리드를 풀어줬는데, 마치 전투 준비라도 하는 태도 같았다.

산령은 벌벌 떨면서 백호의 앞으로 나갔다.

산령은 백호가 얼마나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덕에 기체 덩어리 같았던 산령이 빠르게 영기를 되찾아 추석에 계량 한복을 입을 만큼 실체화하게 되었으나, 그렇다고 고통스럽던 훈련이 미화되지는 않았다.

산령은 필사적으로 변명하기 위해 손짓 발짓을 했다.

결계의 틈이 보여 놀러 왔다는 요지의 변명을 전하자 백호의 눈이 더 싸늘하게 변했다.

“황호가 내 동생이 잠든 곳의 결계를 느슨히 할 리는 없다.”

파아아……!

백호의 손에서 파운참뢰의 백아가 소환되었다.

호족의 수장이었던 백호의 동생이 형을 위해 만들고 그에게 선물한 저 아름다운 무기를 보자 산령은 오한을 느꼈다.

훈련을 할 때마다 백아에 실컷 처맞은 산령은 제발 봐달라고 싹싹 빌었다.

“조의신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더니, 이제는 내 동생을 귀찮게 할 생각인가?”

산령은 아니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대답이 미덥지 못한 건지 신수가 위협적으로 목을 울리며 지옥의 맹수가 낼 법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크르르르! 컹!

산령이 귀를 막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백호는 산령을 상대로 백아를 겨누고 물었다.

“여기에 온 이유를 말해.”

산령은 고개를 들어 백호를 봤지만 손과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답할 기색이 보이지 않자 백호가 신수를 가리켰다.

“사실대로 답하지 않으면 다음 훈련의 상대는 내가 아니라 호족의 신수가 될 것이다.”

산령이 화들짝 놀라 손을 움찔거렸다.

백호는 그래도 손이 닳도록 빌면 봐주기라도 했지만, 저 신수는 아니었다.

호족의 신수는 까탈스러운 성미에 호불호가 강했는데 최근 산령의 행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산령을 불호의 대상으로 정한 듯했다.

산령은 훈련의 상대로 차라리 백호가 낫다는 생각에 질문에 답하기로 했다.

산령은 입을 뻐끔거리며 위를 가리켰다.

위를 가리켰다가 손을 허공에 휘젓다가 귀를 가리키길 반복했다.

“……‘그것’이 너에게 여기에서 대기하라고 했나?”

산령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백호가 백아를 거두었다.

끄응?

산령을 흠씬 패 줄 것이라 생각했던 신수가 의아해하며 백호를 향해 꼬리를 살랑였다.

그러나 백호는 마음을 굳힌 듯 다시 리드를 꺼내 신수의 목에 이었다.

백호는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네가 이곳에 숨어든 건 차후 황호에게 말하겠다. 그리고…….”

안심하던 산령에게 날벼락이 떨어졌다.

“내 동생의 후예들이 네게 시식을 시키려 하더군. 이만 돌아가라.”

*    *    *

황명호 대저택.

은호의 이야기를 미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

나는 천익산에서 황지호를 설득하는 데에 실패했다.

황지호는 강경하게 나를 끌고 황명호 대저택으로 돌아갔다.

“흠, 이 정도면 이능파를 다스리고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질 것 같군.”

에어 셔틀 안에서 이능파를 흘려 나를 살핀 황지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불만스럽긴 했으나 어쨌든 은호의 이야기를 들어 천성헌을 깨울 단서를 잡을 생각에 참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만전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서둘러 둔 수가 나중에 내 목을 칠 수도 있으니 지금은 참기로 했다.

이동 중에도 은휘관과 황명 연구소가 자꾸 눈에 밟혀 몇 번이나 그쪽을 돌아보긴 했지만,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조의신의 연구소 견학이 끝났나 보군요. ……그런데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조의신 군한테서 나는군요.”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적호 부자가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비록 피를 토할 뻔한 게 방금 전의 일이긴 하지만 호랑이들 코가 지나치게 좋은 것 아닌가?

저번에 황지호가 내 손이 잘릴 뻔한 걸 알아챈 것도 그렇고, 호족의 감각은 인간보다 지나치게 뛰어난 것 같았다.

“씻고 환복하고 와라. 네 숨에서 나는 피 냄새는 가라앉았지만, 그사이에 옷에 미미하게 밴 듯하구나.”

그 말에는 따르기로 했다.

주방에서 요리 중이라는 은호의 후예들이나 산책하러 나갔다는 올무가 괜한 걱정을 할지도 모르니까.

저택에 방문할 때마다 사용하는 게스트룸에서 샤워를 마치고 옷장 안에 있는 옷을 빌렸는데, 교복 외에도 사복이 있는 게 보였다.

‘하복, 동복, 춘추복, 지정 코트까지 다 있네. 교복 말고 그냥 사복도 있잖아.’

피 냄새를 묻히고 온 적이 몇 번 있어서 아예 마련한 건가?

조금 과한 것 같긴 했지만 은호의 후예들과 올무를 위해서 호의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거실로 나오니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나의 천사와 백호, 또 까불다 혼났는지 기가 죽은 산령이 보였다.

왕왕!

이쪽으로 달려오는 올무에게 손을 뻗고 기다리고 있는데, 노친네가 산통을 깼다.

“흠, 피 냄새가 가셨군.”

왕……?

피라는 단어에 똑똑한 우리 올무가 그걸 알아듣고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산령이야 그렇다 쳐도 올무나 백호가 걱정하지 않게 씻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보람이 사라졌다.

올무에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며 달래고 있자니 황지호가 둥굴레차를 내 쪽으로 건네며 다시 말을 걸었다.

“약속대로 은호에 관해 들려주마. 김신록과 은호의 후예들도 같이 들으면 괜찮을 것 같군. 아, 그전에 나도 듣고 싶은 게 있다.”

황지호가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천동하의 동생과 ‘성헌’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군.”

“……‘성헌’ 말씀이십니까?”

‘성헌’이라는 단어에 적호가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노친네가 이전에 성헌이에 관해 물은 적이 있었다.

“천동하 선배님 동생의 이름이 ‘천성헌’ 아니야?”

“알았다면 적호를 통해 그 ‘성헌’에 관해 조사하는 수고를 들였을 필요가 없겠지. 천동하의 동생은 황명 연구소에서 맡고 있었으니까.”

이곳에선 천성헌의 이름은 다른가 보다.

‘나와 성헌이가 조금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천성헌과 나의 가장 큰 차이점.

그건 클리어한 순서다.

나는 내가 플마고의 최종장을 최초 클리어했을 거라 자부한다.

‘플마고의 최종장의 최초 클리어는 나일 게 분명해. 분량도 그렇고, 그 배드 엔딩을 보는 것도 난이도가 상당했으니까. 혹시 최초로 클리어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일지도 몰라.’

플마고의 튜토리얼에 등장해 유저가 조작하는 네 번째 수험생, ‘이름 없는 조연’은 단 한 명뿐이다.

이 세계로 오는 사람은 그 자리 대신 다른 자리를 받는 걸지도 모른다.

돌림자 따위를 맞추다 보면 이전 세계에서의 이름과 일치시키는 게 어려울 가능성도 있다.

가설이 여럿 떠올랐지만 이에 관해 고찰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 대신 아주 단순한 질문을 했다.

“천동하 선배님 동생 이름이 뭐야?”

그 말에 황지호가 미묘한 얼굴을 했다.

무슨 이름이길래 그러지?

“천동하의 집안은 손이 매우 귀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태어난 아이를 더 귀히 여기고, 격이 높은 이름을 주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했다 하는군. 천동하의 동생은 사생아인 데다 성장 중에 감금 증후군에 걸려 병원에 방치되고 말았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천동하의 집안 사정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한가 보다.

“인간은 동, 은, 금 순서로 격을 매기지 않나? 그래서 천동하의 동생 이름은…….”

황지호가 말꼬리를 흐리다 입을 열었다.

“……‘천은하’라고 한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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