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42화 (341/925)

55. 스테일메이트리스 (12)

황명호 대저택.

황지호는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즐거운지 처음 은호를 만난 대련에 관해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가끔 적호가 한마디씩 거들곤 했는데, 대부분 황지호가 얼마나 처웃고 김칫국을 잘 들이켰는지에 관한 부가 설명이었다.

그에 맞서 황지호가 적호가 한 험한 말을 재현하기도 했다.

“네? 적호 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적호 님은 저희에게도 늘 말을 높이시는걸요!”

“에이, 적호 님께서 설마 그렇게까지 말씀하셨겠어요?”

은호의 후예들은 믿을 수 없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전에 백호군이 김신록을 공격해 기절시켰을 때, 적호가 욕을 하는 것을 본 순간 나도 저런 감상을 느꼈으니 깊이 공감이 갔다.

‘그때 욕하는 걸 못 봤으면 저 노친네가 과장해서 말하는 중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렇게 따지면 아들에 관한 부분에선 여전히 그 굉장한 성격은 여전한 것 같다.

하지만 김신록은 적호의 젊은 시절의 말버릇을 듣고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얼굴을 했다.

“……?”

김신록은 알쏭달쏭한 얼굴로 적호와 황지호를 번갈아 봤다.

곧 자신이 황지호의 말을 잘못 이해했거나 노친네가 친우를 놀려 먹는다고 과장해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하는지 멋대로 납득하고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은호의 후예들과 김신록의 반응을 본 황지호가 아주 흡족해하는 얼굴로 처웃었다.

“하하하하! 말버릇만으로 따지면 우리 중에서 적호가 제일 많이 변했지! 적호는 입이 험하고 사고뭉치인 것으로 유명했다.”

“황호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늘 툭하면 저리 웃어 대서 청호의 빈축을 샀죠.”

적호가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황지호의 말은 정말로 모두 사실인가 보다.

부정하는 대신 한마디 덧붙여 황지호를 공격하는 게 옛 성격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

“……황호 님은 처음 뵈었을 때 무서웠는데 이제는 잘 웃으시죠.”

“황호 님은 원래 그랬던 거구나!”

“아, 청호 님 이야기는 청호 님의 제자분들로부터 몇 번 들었어요! 다른 호족 분들이 사고를 치고 오면 늘 청호 님께서 은호 님을 도와 수습하셨다고요.”

청호 이야기가 나오자 김신록도 몇 마디 말을 더했다.

“제가 태어나기 전의 일은 잘 모릅니다만, 제 스승이셨던 청호 님께서 늘 바쁘셨던 건 기억납니다.”

“청호가 은호를 많이 도왔지. 그때의 나는 은호가 수장의 자리를 떠넘길까 봐 호족의 일을 멀리했다.”

노친네는 옛날에도 플마고 속 이사장처럼 일을 안 했나 보다.

그때는 수장이 아니었긴 했지만.

“황호가 일을 멀리한답시고 사고를 쳤다가 은호와 청호의 손이 많이 번거로워졌습니다. 황호는 평소에는 비교적 얌전하게 굴다가 일을 시키려 들면 장난질을 하나씩 치곤 했죠.”

“하하하하! 그래도 내 장난질에는 늘 네가 어울려 주지 않았느냐! 청호는 철저하게 은호의 편을 들었고, 백호도 제 동생을 귀찮게 하는 일은 피하려 했으니까.”

황지호와 적호는 사고를 치고, 청호와 은호가 수습하고 백호군은 한발 물러서 있었나 보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백호군은 노친네와 어울려 제 동생을 괴롭히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치던 장난질은 헛된 발악이었죠. 결국 당신은 은호의 뜻대로 호족의 일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적호의 말에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은호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수를 뒀으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 무거운 책임을 질지 잘 알고 있었지.”

“은호 님이 어떻게 하셨는데요?”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말하기는 조금 복잡하군. 비유하자면, 그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황지호가 문득 나를 봤다.

나를 보고 뭐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체스로 비유해 볼까. 은호는 자신마저 체스 피스로 삼아 수를 두는 듯했어. 그러니 은호의 의도를 알고도 그 수를 받아치기가 매우 힘들었다.”

자신마저 체스 피스로 삼아 수를 두는 듯한 타입.

그 말을 들으니 호랑이들이 겪은 일만큼 오래된 일은 아니었지만, 나도 옛일이 떠올랐다.

친한 후배가 자기 자신을 체스 피스로 삼아 제 집안을 무너뜨린 일이 그랬다.

황지호가 묘사하는 은호의 말투도, 초상우주가 제시한 힌트도 모두 그 후배를 연상하게 했다.

그 생각에 목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는데, 황지호가 때마침 백호은침을 한 잔 더 따라 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럼 다시 그날의 이야기를 해 볼까? 적호가 백호에게 무참히 패하고, 그 백호는 은호에게 한창 잔소리를 들은 이후의 일이다.”

“당신이 저보다 더 처절하게 은호에게 패배하던 순간을 말하는 거군요.”

“하하하! 나는 너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둘 다 결승, 우승 운운하다가 도중에 거하게 고꾸라진 꼴을 생각하면 그게 그건 거 같은데.

두 호랑이 다 비슷해 보였으나 묘한 자존심 대결이 시작되었다.

황지호와 적호는 누가 더 심하게 졌는지 묘사하기 시작했는데, 내가 봤을 땐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두 호랑이가 경쟁이 붙은 바람에 묘사가 더 자세하게 변하고 생생해진 덕에 말리지는 않았다.

나는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어떻게 천신 앞에서 우승했는지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다.

그러면서도 내 머릿속에선 어떤 가설이 계속 굳어지고 있었다.

‘……내가 세운 가설이 맞을지도 몰라.’

호랑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단서를 더 찾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 속, 백호군의 무기도 만든 놀라운 솜씨를 가진 온화한 은호.

내 기억 속, 손재주 좋고 싹싹한 내 후배.

그 둘이 계속 겹쳐져 떠올랐다.

*    *    *

천신의 빛이 내려온 대련장.

황호의 급소를 노리는 무기는 하나같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은호가 직접 만들었다는 모든 무기는 철바늘로 세공한 것처럼 정교하고 범상치 않은 예기를 띄고 있었다.

‘기(氣)를 움직여 결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모를까, 봉술만으로 저것들을 전부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의 사용이 막힌 점을 불합리하게 여길 수도 있으나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눈앞의 은호 역시 기를 다룰 줄 아는 것 같은데, 만약 그가 기를 이용했다면 또 다른 신묘한 수로 황호를 사로잡았을 게 분명했다.

이 이상으로 싸우는 건 무익했다.

무너진 대련장 위로 수백 개의 무기에 겨누어진 황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졌다.”

황호의 패배 선언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황호는 파죽지세로 다른 호족을 쓰러뜨리고 올라와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하며 올라온 은호와 마주쳤다.

전력은 누가 봐도 황호가 위였으나 이긴 것은 은호였다.

이 의외의 승리에 관중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파아아아……!

곧 천신의 빛이 은호의 머리 위에 내려왔다.

승리를 치하하는 빛을 두른 은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황호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치게 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황호는 그 말에 조금 욱했지만, 지금은 은호가 설계한 함정을 관찰하느라 눈을 반짝이기 바빴다.

대련을 시작한 이후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은호는 한 발 걸어 나와 제가 설치한 함정을 하나하나 제거해, 덫에 걸린 호랑이 꼴이 된 황호를 풀어줬다.

포박에 풀린 황호가 함정을 만져 보고 은호를 살피며 쉼 없이 물었다.

“다섯을 세는 동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내가 양보한 5초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대련 시작 전, 은호는 어떤 제안을 해 왔다.

황호가 5초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5초 후부터 대련이 끝나는 순간까지 은호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게 그 제안이었다.

몹시 미심쩍게 들리는 말이었으나, 대체 은호가 어떤 수를 둘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던 황호는 그 제안을 덥석 응했다.

그리고 무참히 덫에 걸려 패했다.

“흠, 그러고 보니 네가 한 대련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지. 그 모든 대련을 치르는 동안 나와 할 대련을 대비하며 함정을 준비한 건가?”

황호가 그럴싸한 가설을 읊었다.

그러자 은호는 자세한 수법은 이야기하지 않으면서도 가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규칙은 어기지 않았어요. 황호 님도 싸우던 중에 백호 형님이 부순 바닥을 이용해 공격하기도 했으니, 서로 비슷하죠.”

“……뭔가 내키지 않긴 하지만, 그건 그렇군.”

다소 분해하던 황지호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은호를 귀찮게 하기 시작했다.

황호는 곱상한 눈을 반짝이며 대련장 밖으로 향하는 은호를 쫓아갔다.

“다시 싸우자. 재대련을 요청한다!”

은호는 모호하게 웃기만 할 뿐, 황호가 원하는 답변을 주지 않았다.

어떻게든 수락을 받으려고 더더욱 귀찮게 굴었는데, 마침 대련을 마치고 온 백호와 청호가 이를 발견했다.

백호를 본 황호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마침 잘됐군. 백호, 나와 대련하자! 이 몸은 기를 다루는 게 특기지만, 천신께서 제안한 규칙대로 체술만을 이용해 싸워 주마.”

“제안하는 주제에 말투가 오만하군.”

백호가 은호와 황호 사이를 가로막으며 서늘한 눈으로 황호를 노려봤다.

“내 동생도 이기지 못한 주제에 나와 싸우려 들다니.”

백호가 목검을 들려 했으나, 그 전에 청호가 나섰다.

청호는 백호보다 빠른 손놀림으로 목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백호, 은호의 말을 잊었어? 여기에는 눈이 많아.”

“……그렇다고 해서 저놈을 그냥 놔두기는 싫다.”

“내가 할게. 이대로 두면 은호를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의 말씨름을 지켜보던 황호가 바로 끼어들었다.

백호는 자신을 상대해 줄 생각인 듯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네가 쓰는 체술도 흥미롭긴 해. 그래도 난 지금 은호나 백호와 싸우고 싶은데.”

청호가 어이없어하며 한마디 하기 전에 은호가 먼저 나섰다.

“좋습니다. 황호 님이 오늘 청호 님을 이기시면, 제가 다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은호의 제안에 황호는 눈을 반짝이며 만족했다.

청호와도 싸우고 은호와도 재대련할 생각에 들떴던 탓이다.

물론 이 생각은 청호와의 대련에서 참패한 후 완전히 꺾였다.

패배자 황호가 ‘하하하하! 이번엔 졌군. 다음엔 지지 않을 거다!’라는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하고 물러나려 할 때, 은호가 그를 붙잡았다.

“저와 백호 형님이 결승을 치를 예정이에요, 보러 가시죠.”

“……안 싸울 예정 아닌가? 은호 네가 백호와 싸울 것 같지는 않은데.”

“네, 싸우진 않을 예정이에요.”

그럼 무슨 재미로 보고 가란 말인가.

황호가 심드렁한 얼굴을 하자 은호가 달래듯 말했다.

“제 짐작대로라면, 오늘 귀하신 분이 하늘에서 올 거예요.”

“혹시 천신이……?”

“천신께서 내려오려면 하늘이 열려야 하는데, 오늘은 날이 아니에요. 다른 분이 오실 겁니다.

은호의 설득에 낚여 ‘귀하신 분’의 얼굴을 보기 위해 황호는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결승에서 은호가 기권하여 백호의 우승이 결정되었을 때, 하늘에서 ‘귀하신 분’이 내려왔다.

“제 어버이께서는 직접 목소리를 전하기 어려우셔서 제가 내려왔습니다.”

천신의 대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뒤에는 대리인 외에도 셋이 더 서 있었는데, 하나같이 신령한 기운을 띄고 있는 게 예사 존재가 아닌 듯했다.

그들을 본 은호가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다.

“천신의 아드님과 풍백, 우사, 운사 님을 뵙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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