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스테일메이트리스 (13)
천신의 아들이란 말에 천신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호족과 웅족이 반응해 반사적으로 예를 갖추었다.
천신의 아들, 신인은 제일 빠르게 무릎을 꿇은 은호를 향해 걸어가 몸소 그를 일으키며 다정하게 말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 주세요. 여러분께 은혜를 내린 건 제가 아닌 제 아버지입니다.”
신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예의를 표하던 이들이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과 풍백, 우사, 운사를 관찰했다.
하나같이 준수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인이었다.
모두가 선함이 묻어나는 신인의 얼굴과 옥이 부딪쳐 울리는 듯한 목소리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알고 있는 자도 있는 듯하나 정식으로 제 일행을 소개하겠습니다.”
신인은 자신이 데려온 이들을 소개했다.
똑같이 생긴 풍백과 우사는 쌍둥이 형제라고 했는데, 언뜻 보기엔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똑같이 생긴 이가 둘이나 있군.”
황호의 말에 대련 중에 그를 흠씬 두들겨 패 속이 풀린 청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까 나와 대련한 호족 중에도 똑같이 생긴 이가 있었어. 연이어 같은 호족을 상대하는 기분이 들던데.”
“아, 그러고 보니 그런 호족도 있었군.”
풍백과 우사 뒤로 소개한 것은 운사였다.
운사는 서로 몹시 닮은 풍백과 우사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막 신격이 올라 풍백과 우사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된 운사입니다.”
운사는 좌중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황호는 짧은 평가를 내렸다.
‘풍백과 우사가 지나치게 닮은 탓인가, 운사는 그들과 동떨어져 보이는군. 굳이 따지면 신인과 닮았어.’
소개를 마친 신인은 은호의 옆에 서 있는 백호를 보며 말했다.
“이 땅에 뿌리를 내린 호족 최고의 무재에게 영광을. 그 무(武)를 아낌없이 발휘해 이 땅을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신인의 축사가 끝나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뜩였다.
아주 잠깐 열린 하늘 사이로 무명천 더미가 영묘한 기운을 일렁이며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하늘로부터 무명천 더미를 받아 든 신인이 그 내용물을 확인하자 웃으며 백호에게 내밀었다.
그 무명천 안에 있는 것은 대검이었다.
백호의 무위를 보고 감탄한 천신이 선물을 내린 것이다.
“내게는 손재주 좋은 동생이 선물한 대검이 있다.”
백호가 두 번이나 사양했으나 은호가 옆에서 고개를 젓자 세 번째 권유는 받아들였다.
대검 모양을 한 무명천 더미가 백호의 두 손에 올라간 순간 무명천이 공기 중에 녹아 사라지고 그 내용물이 드러났다.
백호의 이름에 어울리는 새하얀 대검이었다.
대검이 띤 기운에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 영롱한 빛과 함께 백호의 손바닥 위로 스며드는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천신으로부터 직접 목소리를 들은 신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백호에게 이미 애검이 있다는 것을 듣고도 그 대검은 백호를 택했습니다. 지금 제 자리가 없는 걸 그 대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필요한 순간이 오면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신인의 말과 함께 천신이 주관한 대련은 끝이 나 구경꾼들은 모두 제 갈 길을 갔다.
그러나 호족은 흩어지지 않았다.
천신의 뜻대로 무리 지어 살게 된 것이다.
웅족이 그랬던 것처럼 호족의 우두머리는 우승자인 백호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백호가 그 자리를 사양해 우두머리 자리에는 은호가 앉게 되었다.
무력은 약하다고 하나 뒤에 백호가 있고 황호를 이길 정도로 지혜로운 은호가 우두머리가 되는 걸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비록 은호가 우두머리가 되는 걸 반대하는 이는 없었지만, 시비를 거는 이는 있었다.
“은호, 한가하면 나와 재대련하는 게 어떻겠나? 마침 이 몸은 바쁘지 않다.”
은호의 집무실에 쳐들어온 황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황호의 시비에 은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했다.
“잘 오셨습니다, 황호 님. 마침 차를 달이는 중이었어요. 곧 오실 때가 된 것 같아 황호 님 몫도 준비했습니다.”
황호는 백호와 청호가 없을 때를 노려 은호에게 대련을 청하곤 했는데, 아무리 도발해도 지금처럼 은호는 부드럽게 차를 대접하며 넘어갔다.
늘 은호의 말솜씨에 넘어가 결국 한 번도 대련다운 대련을 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일을 떠맡고 있었다.
차에 무슨 술수를 쓴 건지 몰라도 은호가 권하는 대로 차를 마시고 나면 어느샌가 대련 이야기가 쏙 들어가곤 했다.
황호는 불만스러우면서도 어느새인가 은호가 내놓는 차 맛에 길들여져 저도 모르게 차를 즐기게 되었다.
“오늘은 신인께서 찾아오실 겁니다. 황호 님이 함께해 주셨으면 해요.”
은호의 제안에 황호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황호는 대답을 미룰 겸,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최근 들어 신인이 한반도에 자주 오는군. 신인은 천신과 인간의 혼혈이다. 하늘과 땅을 오가는 데에 다소 제약이 적다고 해도 조만간 한계가 올 텐데, 그러면 더 이상 이 땅에 오지 않겠지.’
호족이 이 땅에서 무리 짓고 자리를 잡는 사이, 신인은 풍백과 우사, 운사와 함께 한반도를 자주 방문해 호족과 교류했다.
특히 호족 중에서도 청호와 아주 가깝게 지냈는데, 청호가 고안한 무술 ‘태호권’을 함께 연구하는 중이라 했다.
그래도 황호는 이를 회의적으로 여겼다.
신인은 호족도, 인간도 아니기에 언젠가 이 땅을 떠나리라 생각했다.
청호도 그렇게 여겨 신인 앞에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쓸쓸해하였고, 그 쓸쓸함을 달래 준답시고 황호와 적호가 장난을 치는 바람에 크게 다투기도 했다.
“황호 님은 아직 풍백과 우사, 운사 님과 이야기한 적이 없지요. 오늘 신인 님을 뵐 때 세 분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어떨까요?”
은호가 그리 제안했지만 황호는 딱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신인이면 모를까, 그 셋의 인상은 희미했던 탓이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풍백과 우사가 쌍둥이라는 것 정도였다.
“왜 이 몸이 그런 수고를 해야 하지?”
“곧 이 땅에 머무르고 저희와 함께하실 분들이니까요.”
은호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신인 님은 곧 이 땅에 내려와 인간을 이끌어 이 땅을 다스리고 저희와 함께하실 겁니다. 풍백 님, 우사 님, 운사 님도 신인 님의 뜻에 따를 거예요.”
황호는 그렇게 말하는 은호의 눈과 차 향이 묘하게 인상 깊었다.
그리고 은호의 말대로 신인과 그 셋은 이 땅에 머물게 되었다.
* * *
신인이 이 땅에 머물게 되었다는 말 이후로 황지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황지호의 시선은 감길 듯 말 듯한 눈으로 수마와 싸우고 있는 은호의 후예들을 보고 있었다.
은호의 후예들은 은호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황지호와 적호가 입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깊었군.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자도록.”
“……네? 아직 외적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웅족도 나오지 않았는걸요!”
“은호 님은 언제 어떻게 잠드신 거예요?”
은호의 후예들이 더 이야기해 달라고 매달렸으나 눈과 목소리에 졸음이 그득했다.
호랑이들은 칭얼거리는 은호의 후예들을 달래며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는데 잠깐 누운 채로 조잘거리던 아이들은 금방 잠들었다.
‘많이 피곤했나 보네. 오랜만에 밖에 나갔으니까 많이 들떴겠지.’
은호의 후예들은 이곳에 온 이후 저택 밖으로 나가는 게 금지된 상태였다.
그러다 우리 가족들에게 헌화를 한다고 오랜만에 나왔으니, 나온 계기가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간만의 외출에 많이 설렜을 거다.
후예들이 말하다 지쳐 잠든 모습은 마치 소풍을 다녀와 소풍 얘기를 실컷 하다가 졸던 내 동생들을 연상시켰다.
은호의 후예들이 잠든 걸 확인한 황지호가 이번엔 내 쪽으로 왔다.
“너도 그만 자도록.”
아직 은호에 관해 더 듣고 싶은데.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은호의 후예들도 없는 자리에서 청하기는 좀 그랬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 봐라. 대답이 길어질 것 같으면 내일 답하마.”
그 말에 여러 개 준비했던 질문을 모두 뒤로 미루고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하기로 했다.
“전에 네가 차를 마시게 된 계기가 존경하던 존재가 차를 즐기기 때문이라고 했잖아. 그게 은호야?”
황지호는 늘 차를 즐겨 마신다.
모닝 티를 거의 거르지 않고 마시고, 방문할 때마다 계절이나 그날의 상황에 맞는 차를 내오곤 했다.
예전에 황명호 대저택에서 묵고 갔을 때, 모닝 티를 마시던 황지호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언제부터 차를 마셨어?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저 가장 존경하는 존재가 차를 즐기기에 시작했던 게 떠오르는군.
그리고 방금 황지호가 한 이야기 속 은호는 늘 황지호에게 차를 대접했는데, 황지호의 묘사에 의하면 그 당시의 그는 그렇게까지 차를 즐기진 않은 것 같았다.
즉, 그가 차를 마시게 된 계기인 가장 존경하는 존재는 은호일 것이다.
“그렇다.”
황지호와 나 사이에 공통점이 생길 줄이야.
내가 다도와 테이블 매너에 관해 익힌 게 천성헌 때문인 것을 떠올리니 미묘한 기분이었다.
음료를 고르는 데에 있어 호불호는 없지만, 굳이 음료 중에 고르라면 주스나 마시던 내가 차를 즐기게 된 건 천성헌 덕이었다.
“굳이 그걸 지금 묻는다는 건 ‘성헌’이 차와 관계가 있나 보군. 네가 차에 조예가 생긴 것과 ‘성헌’이 관련이 있나?”
오늘 있던 일과 나눴던 이야기, 질문 타이밍을 고려하면 저런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을 거다.
황지호도 내 질문에 답했으니, 나도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응.”
“……그렇군.”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황지호도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듯했다.
말없이 나와 황지호가 서 있으니 멀리서 지켜보던 적호와 백호군이 한 걸음 다가왔다.
“……황호? 조의신? 주무시지 않고 뭐합니까?”
“…….”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지만, 귀 밝은 호랑이들은 나와 황지호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딱히 문제가 있는 대화 내용은 아니긴 했지만, 차 운운하면서 천성헌 이야기를 했으니 이상하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은 것뿐이다.”
황지호가 얼버무리는 것으로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등을 돌리려 할 때였다.
황지호가 질문을 던져 나를 붙잡았다.
“그럼 질문을 하나 더 하지.”
“해.”
“조의신, 스테일메이트리스는 너를 칭하는 말인가?”
황지호를 비롯한 호랑이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그래.”
내 대답에 황지호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무명의 초신성보다 훨씬 좋은 이명이다.”
왜 여기에서 무명의 초신성을 걸고넘어지는 것인가.
‘무명과 초신성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지?’
적벽괴도에 비하면 선녀 같은 이명인데.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노친네도 은호 이야기로 혼란스러우리라 생각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호랑이들과 은휘관으로 향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천성헌도 함께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