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오류 (2)
“왜, 내 동생을 여기에…….”
전력으로 달려온 천동하가 숨을 몰아쉬었다.
천동하는 당황스러움과 경계심이 섞인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천동하의 시선은 천성헌을 데리고 있는 적호, 그 옆의 백호군을 지나쳐 김신록 앞에서 멈췄다.
“……김신록 선생님, 어떻게 된 거죠?”
천동하가 고등학생인 나와 황지호, 모르는 존재인 적호나 백호군 대신 어른이자 아는 얼굴인 김신록에게 말을 거는 건 당연한 일이긴 했을 거다.
그러나 김신록이 호족의 수장과 제 아버지 앞에서 입을 열 리가 만무했다.
‘김신록이 학생을 아끼긴 해도 호족을 우선시하겠지.’
예상한 대로 김신록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상황을 주시했다.
김신록이 입을 열 기미가 없자 이번엔 화살이 황지호와 내 쪽으로 향했다.
황지호는 눈을 반짝이며 천동하를 보고 있었다.
천동하의 우수한 광림에 흥미가 돋았나 보다.
“연구소에 출근하자마자 갑자기 그동안 제출한 보고서를 재검토하라는 지시가 와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네 짓이야?”
“잘 알아챘군. 더미를 준비했는데 어떻게 간파했지?”
황지호가 천동하에게 노친네 같은 말투를 썼다!
동생을 납치하다 걸려서 그런 건지 천동하 앞에서 고등학생 흉내를 내는 건 때려치우기로 한 것 같다.
천동하는 황지호가 반말을 던지자 의아해하면서도 이 상황 자체보다 의아하지는 않은지 굳이 지적하지는 않고 넘어갔다.
“동생이 눈을 깜빡이는 속도가 지나치게 규칙적이라서 어렵지 않게 가짜라는 걸 알아봤어. 평소에는 읽고 있는 텍스트 문단에 맞춰서 불규칙하게 움직였으니까.”
평상시 천성헌이 눈을 깜빡이는 패턴을 통해 황지호가 준비한 더미를 간파했구나.
그런데 황지호가 시킨 일을 하면서 천리안을 통해 이를 파악한 건가?
형으로서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과 플레이어로서의 뛰어난 관찰력이 엿보이는 게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광림을 발동해 주변을 살폈어. 그랬더니 붉은 안개 덩어리가 연구동을 벗어나 은휘관 쪽으로 움직이길래 여기로 온 거야. 그 붉은 안개의 움직임이 멈춘 건 은휘관 앞이었어. 역시나 안개 속에 내 동생이 있었지.”
‘건곤(乾坤)을 품은 눈’은 적호의 적연 속에 있는 내용물까지는 보지 못하더라도 적연의 존재 자체는 파악할 수 있나 보다.
천동하의 설명에 적호와 김신록이 나란히 놀란 표정을 지었는데, 저러고 있으니 두 호족이 혈연관계라는 게 여실히 느껴질 만큼 비슷하게 보였다.
천동하는 김신록을 보고 잠깐 입을 뻐끔거리는 게, 김신록에게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래도 천동하는 동생을 우선시했다.
“의미 없는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인지 설명해 줘. 대답에 따라 협회에 알리고 대처할 거야.”
천동하가 말을 마치자 황지호가 내 쪽을 흘끗 봤다.
이 타이밍에 황지호가 나를 본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내가 아는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천동하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를 확인하려 하는 게 분명하다.
‘천동하는 끝까지 흑막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어. 플마고 속 행적을 고려하면 신뢰할 만해. 알리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지만, 호족의 사정에 말려들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또, 호족 쪽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에도 황지호의 시선이 내 쪽을 향해 있었다.
‘내 의견을 물었다는 건 망설이고 있다는 거겠지. 정체를 밝히는 것까지 고려하는 중인 거야.’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황지호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우선 이 몸의 정체를 밝히는 게 좋겠군. 뭐, 적극적으로 숨긴 건 아니지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반 애들 앞에서 황지호가 말하는 꼴을 보면 숨길 마음이 없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저렇게 말하면 어떻게 알아듣겠나?
천동하는 워낙 머리가 좋으니 저 말을 근거로 머릿속에서 가설을 세우고 있긴 하겠지만.
“‘황명 그룹의 주요 구성원은 인간이 아니다.’, 이 소문은 재계와 연이 있는 너도 들어 봤겠지.”
“들어 봤어. 인간 사회에는 진족과 후예가 섞여 있잖아. 황명 그룹도 그런 거겠지. 우리 학교 교사 중에도 용제건 선생님이 계시는 것처럼.”
“은광고 교사 중에 용제건이 있는 것과 비할 수준이 아니다.”
파아아……!
황지호의 눈과 머리카락이 황금색으로 물들었다.
맹수의 것처럼 변한 눈동자에서 마력이 이글거렸다.
“황명 그룹의 관계자로 알려진 이들 중 황씨 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호족이거나 그 관계자다. 참고로 말하면, 네가 만난 황명 그룹의 황씨는 모두 호족이었다.”
“……!”
천동하가 황지호의 말을 이해하고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정확히 따지면 황명 그룹 일가 중, 황씨 성을 쓰는 호족은 전부 황지호와 그 분신들일 텐데.
황지호도, 그 분신도 호족이니 틀린 말은 아니긴 했다.
“그럼 너도…… 이사장님도…… 저번에 본 그분도…….”
천동하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황명 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황지호의 분신을 더 봤나 보다.
황지호는 천동하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 전부 호족이다. 지금 네 앞에 있는 존재 중 인간은 조의신 하나뿐이다.”
천동하와 눈이 마주쳤다.
천동하는 ‘그럼 왜 인간인 의신이는 여기에 있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천동하는 그런 의문을 접어 두고 황지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지금 천동하의 머릿속의 최우선 순위는 동생인 듯했다.
“근대사를 돌아봤을 때, 호족은 인간사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지. ……왜 갑자기 호족이 내 동생을 납치한 거야? 내 동생이 보이는 증상과 호족이 관계가 있어?”
황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황지호도 답을 모르기 때문일 거다.
“은휘관의 지하에는 어느 호족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은광고 괴담 중에 은휘관 지하와 관련된 괴담이 있는데.”
“이사진이 은휘관 지하에서 매달 초혼식을 열어 시체 부활을 시도한다는 것 말인가? 뭐, 비슷한 짓을 해 그 호족을 깨우려고 한 적이 있었지.”
이 순간, 학교 이사장에 의해 은광고 괴담의 정체가 하나 밝혀졌다.
그때 괴담 취재를 할 때 황지호가 괴담을 보다가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냐며 헛소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장난으로 한 소리가 아니었나 보다.
“깊은 잠에 빠진 호족과 내 동생이 관계가 있나 보네.”
황지호는 천동하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네가 네 동생을 발견해 보호하지 않았다면 가능성이 하나 사라졌겠지.”
적호가 부리는 붉은 안개에 감싸인 상태로 허공에 떠 있는 천성헌이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황지호는 눈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천성헌을 보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지금 네 동생을 이 자리에서 내줄 수는 없다. 그 대신 동행하도록 하지.”
천동하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무슨 수를 써서 제 동생을 빼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따라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듯했다.
결국 천동하는 천성헌의 의견을 물었다.
“……네 생각은 어때? 이곳의 지하로 가고 싶어?”
눈 하나 움직이지 않고 상황을 주시하던 천성헌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반응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알았어.”
천동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표정에서는 불안함, 의문 등이 섞여 있었으나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형으로서 대처하겠다는 결의도 느껴졌다.
“그럼 가지.”
황지호가 발걸음을 떼자 적호와 김신록이 그 뒤를 따랐다.
천동하는 천성헌 바로 곁에 서서 이동했는데, 백호군은 뒤에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뒤늦게 이동했다.
* * *
은휘관 내부.
오늘은 비서도 이곳에 없는지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대리석에서 싸늘한 기운이 올라와 괜히 은휘관이 더 적막하게 느껴졌다.
“따라와라. 너무 멀리서 걷지 말도록.”
황지호는 그렇게 말하고 앞장서서 걸었다.
황지호가 향한 곳은 이사장실이었다.
이사장실이 있는 구역은 크게 비서실, 응접실, 집무실로 나뉘어 있는데, 황지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집무실이었다.
황지호는 황명호 이사장의 명패가 올라간 책상 뒤에 멈춰서 벽에 손을 올렸다.
쿠구구……!
황지호가 벽으로 보이는 공간에 이능파를 불어넣자 문이 생겼다.
그 문 너머는 은으로 마감된 엘리베이터였다.
“이런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니……!”
천동하가 머릿속으로 대중에게 공개된 은휘관 안내도를 떠올리다가 감탄했다.
황지호가 호족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난 것 같기도 했다.
전원이 문 안으로 들어가자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은광구에 있는 시설 중에 호족과 연관된 곳은 거의 지하에 있었어.’
적호와 김신록이 죄인을 고문하는 은영관의 지하.
12지 회담을 개최한 마법진이 있는 황명호 대저택의 지하.
천성헌이 있던 황명 연구소의 지하.
그리고 지금 은호가 잠들어 있는 은휘관의 지하.
전부 지하였다.
‘지력과 관계된 거겠지?’
지력이 충만한 한반도에서도 가장 지력이 강력한 곳을 꼽는다면 바로 여기 은광구다.
진족은 지력을 끌어다 쓸 수 있으니 주요 시설을 다 지하에 둔 것 같다.
만약의 경우에 지력을 활용해 대처하기 위해서.
‘지력을 운용하는 데에는 제약이 많아. 그래도 황지호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플마고 속 황지호는 지력을 써서 싸웠을까?’
땡!
간만에 황지호를 죽이는 방법에 관해 고찰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이 열리자 무수한 수의 기둥이 보였다.
기둥은 고개를 크게 올려야 보일 만큼 높게 멀리 뻗어 나가 있었다.
그 기둥에는 하나같이 고대어가 새겨져 있었는데, 황지호가 직접 새긴 결계의 일종 같았다.
“은휘관에 지하가 있는 건 몰랐어. 이렇게 정교하게 벽에 쓰여 있는 고대어 말인데, 지력 운용 술식 아니야?”
“정답이다. 이곳에 있는 이를 지키기 위해선 이 정도 되는 결계가 필요로 했다. 기둥마다 새겨진 술식이 조금씩 다르지. 흠…….”
황지호의 목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그것과 동시에 호족들이 얼굴을 굳히고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 말고 누군가가 있는 것 같군.”
“저쪽에 뭐가 있어!”
천동하가 광림을 발동시키고 있었는지 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지호는 안광을 발동시켜 천동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황금색으로 변한 눈에 노기가 가득했다.
“산령,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냐!”
황지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목소리에 이능파가 담긴 탓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나도 곧바로 안광 스킬을 발동해 그쪽을 바라봤다.
기둥으로 가득한 지하의 중앙, 은으로 된 관에 누워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저기에 있는 게 은호인가……!’
은의 관이 차고 넘칠 만큼 긴 은발의 청년이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미미하지만 생기와 이능파가 느껴졌는데, 깨어날 기색은 통 없었다.
그리고 잠든 은호의 근처에 산령이 어른거렸다.
산령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산령이 은호의 몸 위에 뭔가 올려놓는 것 같은데. 뭐지? 나뭇가지……?’
산령은 팔뚝보다 조금 가는 나뭇가지를 은호의 몸 위에 올려 두더니 전력으로 달아났다.
여기에서 도망쳐 봤자 백호군이나 황지호에게 붙잡혀 훈련으로 굴려질 시간이 길어질 뿐일 텐데.
분노한 황지호와 백호군이 날아갈 듯한 기세로 은호에게 다가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스킬을 쓰지 않고도 은호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였다.
“저건…… 천익산에 있는 천단수의 가지 아냐?”
천동하의 말에 이어 내 머릿속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스킬 ‘운명력’이 발동했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