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오류 (3)
토족의 신역.
수장의 심복 옥토윤을 필두로 모든 토족이 플레이어 협회와의 기술 교류 건으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늘어져 있는 존재가 있었다.
토족의 수장 옥토연이었다.
“아, 심심하다.”
옥토연은 계피 가루와 밤소를 아낌없이 넣은 밤단자를 입에 밀어 넣으며 집무실 소파 위를 굴러다녔다.
평소라면 뒹굴거리며 야구도 봤겠지만, 한국시리즈 최종 우승 팀이 결정되는 오늘 경기는 영 볼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옥토연이 응원하는 희대의 망팀 TC 나이츠는 일찌감치 가을야구에 떨어졌는데, 누구는 우승해서 우승컵을 들 걸 생각하니 배알이 꼴렸기 때문이다.
성대하게 치러질 남의 집 잔치를 생각하니 울컥해져 디바이스에다 대고 아무에게나 징징거리기로 했다.
디바이스의 통화 목록을 여니 최상단에 ‘황호’라는 단어가 보였다.
‘……황호가 이상한 소리를 했던 거 같은데.’
어젯밤, 옥토연은 황호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최근 황호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일방적으로 읽고 씹히는 일이 잦았는데, 황호가 통화를 걸 정도면 급한 일이겠다 싶어서 냉큼 받았다.
하지만 통화의 내용은 그리 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왜 윤회의 굴레에 관해 물은 거지?’
삶과 죽음.
그 경계선은 수레바퀴가 구르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를 윤회의 굴레라 칭한다.
수천 년을 산 달토끼 옥토연은 그 경계, 윤회의 굴레를 셀 수 없이 오갔다.
굶주린 노인을 위해 제 몸을 불사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다.
그러나 옥토연이 소신공양(燒身供養)한 굶주린 노인의 정체는 제석천이었고, 옥토연을 달에 새겨진 회토(懷兎)로 봉했다.
그 결과, 옥토연에게 있어 죽음이란 끝이 아닌 과정이 되었다.
―그래서, 깊은 잠에 빠진 진족은 윤회의 굴레로 향하는 게 아닌가?
어쩐지 한밤중에 말을 길게 하는 게 귀찮아 옥토연이 윤회의 굴레에 관해 대충 설명하고 있자니 황호가 질문을 던졌다.
옥토연은 황호가 당연한 걸 묻는 게 이상했지만, 일단 답했다.
―당연하지. 깊은 잠에 빠졌다는 건 단순히 혼이 육체를 떠났다는 걸 의미하잖아. 육신과 혼이 멀쩡한 상태로 분리만 되었으니 죽은 게 아닌데 거길 왜 가.
―그렇다면 떠난 혼은 윤회의 굴레를 거치지 않는다는 거로군.
―만약 그랬으면 내가 은호를 데려왔겠지!
옥토연은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잠든 진족의 혼이 윤회의 굴레로 향한다면, 옥토연은 진작에 자신의 육신을 태워 윤회의 굴레로 가서 은호를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황호는 옥토연을 의심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우리의 후예를 숨긴 네 말을 믿으라고?
―그럼 뭐 어쩌라고? 믿지 않을 거면 묻지를 말든지!
―의심을 사기 싫다면 그 윤회의 굴레가 작동하는 원리에 관해 더 자세히 말해 보도록.
옥토연은 씩씩거리며 흥분한 어조로 길게 윤회의 굴레에 관해 설명했다.
황호한테 놀아났다는 걸 깨달은 건 거의 설명을 다 마쳤을 때였다.
―윤회의 굴레를 지키는 파수꾼은 그러니까…… 아, 내가 왜 너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해! 이제 더 말할 거 없어! 말 안 해!
―나도 더 들을 게 없군. 수고했다. 이만 끊지.
황호는 그사이에 원하는 정보를 다 빼낸 건지 전화를 가볍게 끊었다.
옥토연은 어젯밤 일이 떠오르니 다시 울화통이 터졌다.
“같은 호족인데 이 나쁜 놈은 은호랑 왜 이렇게 다른 거야!”
옥토연은 다정하고 사려 깊은 은호를 떠올렸다.
토족과 호족이 아직까지 동맹 관계로 남아 있는 건 오로지 은호 덕이었다.
―지난 사냥 때 모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허수아비입니다.
―이걸 나한테 왜 줘?
―토족들은 정월에 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을 열며 소신공양을 재현한다고 들었어요. 당신이 몸을 태우는 대신, 당신의 옷을 입힌 이 허수아비를 태우는 게 어떨까요?
손재주 좋은 은호가 직접 만들었다는 허수아비는 옥토연과 체구는 물론 외양이 비슷하고 태우기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고 미려했다.
일단 옥토연은 넙죽 그 허수아비를 받아들였으나 툴툴거리며 말했다.
―……난 제석천님께 회토의 가호를 받은 토끼인데? 죽어도 안 죽으니까 상관없어.
―되살아난다고 해서 고통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이 불필요하게 고통을 받는 걸 원치 않아요.
그런 대화를 나눈 이후, 은호는 정월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 보내 옥토연은 매년 불타 죽는 일을 면했다.
은호는 짐승 가죽이 귀해지는 시기에도 빠짐없이 옥토연을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어 보내고 다른 토족에게도 은혜를 베풀었다.
거친 성정의 호족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토족들은 많았으나, 모든 토족들은 은호를 존경하고 따랐다.
그래서 은호가 무거운 부탁을 할 때도 토족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이 아이를 호족들이 모르게 숨겨 줬으면 합니다.
은호는 새하얀 배냇저고리로 감싼 작은 아이를 옥토연에게 내밀며 부탁했다.
호족의 수장이 호족들 모르게 어떤 아이를 숨겨 달라고 한다.
내막을 알 수 없지만, 보통 부탁이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옥토연은 토족의 수장으로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받아들였다.
―알았어. 은호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 이 아이는 앞으로 호족 몰래 토족이 맡을게. 그런데 얘가 누군지 물어봐도 돼?
어느 때나 침착한 모습을 보이던 은호는 그 순간은 몹시 고통스러워 보였다.
―이 아이는…… 제 후예예요.
은호의 후예라는 말에 옥토연이 기겁했다.
―호족의 후예를 왜 숨겨? 애 어머니는 누구야?
―……인간의 무녀입니다. 아이를 낳던 중,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 음…… 은호,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존재가 될지 저보다 잘 아는 주제에 한마디도 안 한 배신자가 어찌 되든 상관없습니다.
‘어머니’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은호의 얼굴이 분노, 연민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었다.
은호가 그리 격한 반응을 보일 줄은 몰라 옥토연이 당황했다.
―제가 천기(天機)를 읽을 수 있다는 거 알죠?
옥토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는 싸움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하늘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읽고 이를 이용해 수를 쓰는 재주가 있었다.
―저는 호족의 수장의 아이가 이 땅을 수호할 전사가 되리라는 미래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예지를 받은 인간의 무녀와 이 아이를 가졌습니다.
―뭐? 대체 언제 그런 예지를 받은 거야!
―1년 전에요. 숨겨서 미안해요. 아이를 지키기 위해 호족에게도 알리지 못했어요.
최근 인간의 무녀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은호의 아이를 가졌었다고?
옥토연을 경악하게 하는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한 달 전, 이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새로 예지를 받았습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지만요.
―……어떤 예지?
―제 형님과 친우들은 이 아이를 지키다 죽게 될 거예요. 전 그 미래를 바꿀 겁니다.
은호는 덤덤히 말했지만, 옥토연은 그렇지 못했다.
호족들이 이 아이를 지키다 죽는다는 미래도 경악스럽지만, 더 경악스러운 건 은호가 하려는 짓이었다.
―천기를 읽은 자가 그에 따르지 않는 건 중죄 아니야? 이 아이는 이 땅을 수호할 전사가 된다면서! 그래도 괜찮아?
―이 땅은 다른 방법으로 지킬 거예요.
은호는 차가운 눈으로 아이를 내려다봤다.
―전 이 아이가 죽는 날까지 제 아이로 인지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호족의 수장에게 아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셈이니, 예지는 성립하지 않게 되겠죠.
―은호…… 그럼 이 아이는 평생…….
―지금부터 이 아이가 죽는 순간까지 저를 포함한 호족을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호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아이의 이름도 안 붙여 줄 거야? 진명이 따로 있다고 해도, 일단 통용되는 이름을 붙여 줘야…….
―전 이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를 포기하고 이 아이를 버렸습니다. 제가 이름을 붙일 자격은 없습니다.
은호는 비정하게도 자신의 후예에게 이름조차 붙여 주지 않았다.
은호의 뜻대로 은호의 직계 후예는 평생 호족과 만나지 못했다.
은호는 아이를 버린 순간부터 천기를 읽는 힘을 잃었고 큰 싸움을 몇 번 거친 결과 깊은 잠에 빠졌다.
은호가 많은 대가를 치러 의형과 친우들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이 땅을 수호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만약 은호가 인간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면……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 했겠지.’
옥토윤은 쓸쓸한 얼굴로 은호의 손자, 손녀들인 은서호, 은이호, 은재호가 만들어 준 허수아비를 봤다.
집무실 한구석에는 그 셋이 만든 것에 비해 훨씬 낡고 어설픈 솜씨의 허수아비가 있었다.
‘닮은 거라곤 은발의 머리뿐이었어.’
옥토연은 자신의 딸처럼 키운 호족의 후예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 * *
운명력 스킬이 발동하자 백호군, 황지호, 적호 세 호랑이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김신록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는데, 이들이 운명력을 감지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호랑이들의 반응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이건 그때와 비슷한데.’
운명력 발동 메시지와 함께 스킬창이 떠올랐다.
파아아…….
빛무리가 스킬창에 있는 스킬 하나를 가리켰다.
빛무리가 가리키는 스킬은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이었다.
지금 상황은 한밤중에 천익산에서 겪은 일과 비슷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조의신, 설마 너…….”
황지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가 제지하기 전에 천단수의 가지에 손을 올린 후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을 사용합니다.〉
우우웅—!
뇌가 조각 나는 감각과 함께 강력한 이능파가 천단수의 가지에서 뻗어 나오며 나와 은호의 몸을 감쌌다.
바로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초상(超象)우주와의 접속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접속을 확인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평소와 어딘가 달랐다.
〈적합체를 매개로 하여 적합체 후보의 정보 충돌 오류를 수정합니다.〉
적합체 후보?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에서 천성헌의 존재가 떠올랐다.
나와 달리 천성헌은 적합체가 아닌 적합체 후보였나 보다.
〈수정이 완료될 때까지 앞으로 10초. 10…… 9…….〉
사고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카운트다운이 반도 끝나지 않았는데, 다문 입 사이로 피가 새어 나왔다.
“그만! 결계를 치겠다. 물러나라!”
눈앞에 잠시 황금빛 이능파가 어른거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붉고 푸르게 물들었다.
초상우주의 교신은 황지호의 힘으로는 간섭하기 어려운 듯했다.
〈경고, 초상(超象)우주와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과다한 의사소통은 적합체의 부하를 초래합니다.〉
경고 메시지가 울렸지만, 교신을 중단한다는 선택지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곧 길고 긴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0을 세는 대신, 시스템 메시지는 다른 말을 했다.
〈정보 충돌로 인해 발생한 오류가 수정되었습니다.〉
은호와 천성헌이 어떻게 됐는지 봐야 하는데 시야가 흐려 보이지 않았다.
몸에 힘이 풀려 내 발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바닥에 무너지지 않은 걸 보니 누군가가 부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을 통해 이능파가 쏟아지는 현상은 중단되었지만 교신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후보의 의사를 확인합니다.〉
의사?
무슨 의사를 말하는 거지?
초상우주에게 묻기 전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경고,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신체가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접속을 제한합니다.〉
교신이 끝난 직후에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
은호가 눈을 뜨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는 나, 천동하 그리고 백호군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