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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49화 (348/925)

56. 오류 (6)

은호는 황호의 추측을 부정하지 않았다.

“의신이 형은 자신을 잘 드러내는 사람이 아닌데, 거기까지 알아내다니.”

황호는 은호의 말에 몹시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까지는 가설만 세웠을 뿐이었으나 너와 조의신이 나눈 대화, 또 네가 한 말로 확신했다. 스테일메이트리스는 그 세계에서 조의신이 받은 이명인가?”

“비슷한 거예요. 그 세계에는 이능이 존재하지 않아요. 의신이 형은 체스 기사였는데…….”

은호는 말꼬리를 흐리다 어두운 얼굴로 말을 바꿨다.

황호는 그 모습이 조금 마음에 걸렸으나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은호를 추궁할 수 없어 가만히 기다렸다.

“……의신이 형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지내셨죠? 몸은 아픈 곳은 없나요?”

“많은 일이 있었다. 은인의 안위는 신경 쓰고 있으나 은인이 자신을 챙길 줄 모르니 늘 걱정이다.”

“의신이 형을 은인이라고 부르시는군요. 은인이라고 부르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황호는 조의신이 해 온 일들을 요약해 설명했다.

황호가 한 요약 중에는 은호의 후예에 관한 설명은 빠져 있었으나 조의신이 호족의 은인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일들도 있었나요? 몰랐던 일들이 굉장히 많네요.”

“너도 조의신과 함께 이 세계를 관찰한 게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너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조의신만큼은 알지 못한다고 했지.”

“……저에게는 시간이 많이 없었어요. 자칫하다간 이 세계에 오지 못할 뻔했죠.”

또 은호가 어두운 얼굴을 했다.

“의신이 형은 이 세계를 관찰할 때 텍스트, 영상 무엇 하나 허투루 여기지 않고 하나하나 머리에 새겼어요. 관찰하지 않아도 될 것을 관찰하고, 다시 해도 되지 않을 것을 다시 했어요.”

은호의 어두운 표정에 이어 ‘다시 하다’라는 말이 황호의 마음에 걸렸다.

조의신이 사용하는 스킬의 일종이 ‘리플레이’ 아니었던가.

은호의 말이 계속되었다.

“저는 이 세계에 오기 위해 의신이 형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최단 시간으로, 필요 최소한의 과제를 해결했어요. 스토리도 스킵이 가능한 상황에선 넘어가 버리고, 스킵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음 공략법을 미리 읽으며 다음을 대비했죠.”

“공략이라니, 게임 같은 말이군.”

“정확한 표현이에요. 그 세계에서 이 세계는 게임의 형태로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조의신과 게임.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잘 어울렸다.

체스를 두듯 다음 수를 떠올리며 게임을 할 조의신의 모습이 선했다.

“무엇보다 천은하의 신체가 아닌 은호의 신체를 택하면서 저는 이 세계로 넘어온 관찰자, 플레이어들이 얻는 혜택을 전부 잃었어요.”

“그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은호로 깨어난 이유가 있나?”

“제가 천은하의 신체로 일어났다면, 많은 호족들은 제가 은호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예요.”

은호는 온화하게 황호를 보며 웃었다.

“또, 저를 오래도록 기다려 주신 친우들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어요. 동하 형이나 의신이 형이 제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지만요.”

은호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황호는 그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짐작했다.

황호는 화제를 바꿀 겸, 조금 신경 쓰였던 것을 묻기로 했다.

“그런데 너는 조의신을 꼬박꼬박 형이라고 부르는군. 학교에서 선후배로 만난 건가? 초등학교?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인가?”

황호는 조의신을 당연히 미성년자로 여기고 그렇게 물었다.

이어지는 은호의 대답은 황호를 경악하게 했다.

“의신이 형은 대학교 다닐 때 선후배로 만났어요.”

“……조의신이 그 세계에서 성인이었나?”

“네.”

“어른스럽다고는 생각했지만 성인일 줄이야.”

황호는 다소 놀랐으나 조의신을 대하는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조의신이 몇 살이든 인간인 이상 자신보다 한참 연하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오히려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제가 성인이라는 생각에 더 무리를 하는 건가? 그래 봐야 지금은 열일곱이고, 17세가 아닌 170세라고 해도 나보다 한참 어리다는 사실은 여전하건만.”

“네, 의신이 형은 한참 어리신 분이니 황호 님께서 잘 챙겨 주셔야 해요.”

“알았다. 호족의 수장으로서 은인을 잘 챙기마.”

교복 차림을 한 황호가 그리 말하고, 은호는 조의신을 형이라 부르면서도 그를 어리다하는 게 다소 이상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은호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조의신을 부탁했고 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호, 쉬거라. 좀 자야 하지 않겠나?”

“잠은 충분히 잤어요. 괜찮아요. 그것보다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똑똑.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둘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황호가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하자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적호가 등장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아끼던 술을 가져왔습니다. 제 아들이 곧 안주를 준비해 올 겁니다.”

“은호는 아직 몸 상태가 만전이 아니다만, 그래…… 재회를 축하하는 반주 한 잔은 마셔도 괜찮겠지.”

“네, 은호가 왔으니 함께 마십시다. 백호도 불렀습니다.”

은호가 눈을 크게 뜨고 적호를 응시했다.

적호는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은호, 왜 그러십니까?”

“……적호가 아직 말투를 바꾸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워서요. 아드님과도 화해하신 것 같고요.”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적호가 제 아들과 화해한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해 줬군. 아, 지금 적호의 아들은 ‘김신록’이란 이름을 쓰고 은광고의 교사로 있는데…….”

이후, 적호의 아들이 합류하고 신수에게 조의신을 맡겼다는 백호도 등장했다.

백호는 여전히 별로 말을 하진 않았으나, 은호 앞에 음식을 밀어 넣고 잔을 채워 주는 게 의동생을 많이 배려하는 게 보였다.

밤이 깊도록 호족들의 술자리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잔씩 하지.”

황호의 말에 따라 호족들이 은으로 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은호의 기상을 축하하며, 그리고 재회를 이루게 해 준 은인을 기리며 건배.”

*   *   *

눈을 떠 보니 수요일 오후였다.

가족들의 기일이 일요일.

은호가 깨어나고, 내가 저택에서 머물기로 한 게 월요일.

그런데 지금 디바이스가 가리키는 요일은 수요일이었고, 현재 시각은 아침도 아닌 오후였다.

‘내가 그렇게나 잤나. 내가 3일 연속 수업을 빼먹은 건가!’

또 본의 아니게 공청훤 선생님 수업을 빠지게 된 것 같은데.

이번 건은 다른 수업도 빠졌으니 어쩔 수 없을 거다.

디바이스에는 반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보낸 메시지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 반 반장인 김유리가 걱정하는 게 눈에 띄었다.

[김유리] 의신아, 오늘 학교 안 올 거야?

[김유리] 의신아, 오늘도 결석하는 거야? 함근형 선생님도 걱정하셨어!

[김유리] 효돈이랑 세음이가 기숙사 들렀는데, 의신이가 없는 것 같다던데…….

[김유리]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ㅠ▽ㅠ

우리 반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을 걱정하게 만들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연락해 두는 건데 생각이 짧았다.

교신의 여파를 얕봤던 게 실책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나 오늘 황지호가 등교해 둘러댄 건지 다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김유리] 의신아, 지호한테 이야기 들었어!

[김유리] 지호는 오늘 오후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고 했는데, 아직 아프면 무리하지 말고 쉬어도 돼.

[김유리] 반 애들이랑 선배님들 방송국 인솔은 내가 잘 맡을게! >▽<;;

우리 반 애들만 가는 거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반 애들이 아니라 2학년 0반 선배놈들이다.

함근형 선생님이나 제갈재걸이 있다고 하지만 금찬왕찬 콤비 외에도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둘이나 있는데 김유리가 고생할 게 눈에 훤했다.

나는 곧바로 나는 괜찮으니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로 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답 메시지를 작성하려고 할 때였다.

왕왕!

“…….”

“의신이 형, 잘 잤어요? 일어나자마자 바빠 보이시네요.”

방 안에 나와 나의 천사 외에도 호랑이가 둘이나 더 있었다.

백호군과 은호였다.

“……안녕.”

“네, 저와 백호 형님은 안녕해요. 의신이 형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맥 좀 짚을게요. 좀 더 누워계세요.”

은호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다시 침대에 눕히고 내 손목을 잡았다.

내 맥을 짚고 이능파의 질을 확인하는 게 꽤 익숙해 보였다.

천성헌은 심폐소생술 자격증이 있었는데, 은호는 의술을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았다.

“혹시 치유 스킬이 있어?”

“네, 현대의 스킬 레벨 기준으로 따지면 그리 높지 않지만요. 녹족의 수장을 부르는 게 좋겠지만, 지금 출장 중이라 오기 힘든가 봐요. 다음에 향록 님께 진료받는 게 어떨까요?”

“어……?”

“네, 그럼 황호 님께 말씀드릴게요.”

은호는 물 흐르듯이 나를 영약 앞에 밀어 넣었다.

부드럽고 차분하게 말하고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은호의 뜻대로 결론이 나 있었다.

‘……여기 묵고 가게 된 계기도 그랬지.’

천동하와 적호가 자리를 뜰 때 같이 기숙사로 돌아가려는 나에게 은호가 말을 걸었다.

―의신이 형이 남긴 글을 봤어요. 오늘 피를 토하신 모습을 보니 자꾸 그 글이 생각나요.

내가 남긴 글이라 하면 고시원 방에 남긴 그 유서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도 피를 토했으니 겹쳐 보였던 건가.

은호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이 많은 성격인가 보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기 전에, 은호가 선수를 쳤다.

―의신이 형은 평소에도, 그 글에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죠. 이번에도 같은 말씀을 하실 건가요?

―…….

사실 은호의 말 중에는 가지 말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는데, 말을 마칠 때는 자발적으로 저택에 남겠다는 답변을 한 후였다.

‘성헌이도 말을 잘하긴 했는데, 은호는 한 수 위인 느낌이야. 성헌이한테 천년 단위의 연륜이 갑자기 붙어서 그런 걸까.’

갑자기 몇천 살이 늘어난 후배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진맥을 마친 것 같아 몸을 일으키자 은호가 가만히 나를 보다 말했다.

“의신이 형,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저를 깨워 주셔서 고마워요.”

“……아냐, 한 게 별로 없는데.”

“한 게 없다고요? 그럼 제가 혼자 일어났나요? 아, 황호 님께 의신이 형이 호족과 은광고를 위해서 해 온 일을 들었어요. 발뺌하지 마세요.”

은호는 그렇게 말하며 쉼 없이 내 얼굴에 금칠을 했다.

듣다 보니 민망해져서 말을 돌리려고 했는데, 은호가 그냥 넘어가 주질 않았다.

“고맙다.”

옆에 계속 서서 지켜보던 백호군도 인사를 했다.

동생을 깨운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낯이 뜨거웠다.

하물며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들이 게임에서 아는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치트 플레이라고 생각하면 더 그랬다.

은호도 그걸 다 알 테니, 나는 빠르게 자백하기로 했다.

“그 게임을 플레이해서 온 거면 알 거 아니야. 나는…….”

“아, 그 말씀을 드리는 걸 잊었네요. 의신이 형, 전 의신이 형만큼 플마고를 아는 게 아니에요.”

은호는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말했다.

“전 서브 스토리, 추가 퀘스트를 조금도 플레이하지 않았어요. 메인 스토리도 스킵 가능한 부분은 전부 스킵했고, 제대로 읽은 부분이 몇 안 돼요. 시간이 없어서 의신이 형이 남긴 공략을 따라가기 바빴으니까요.”

“……내가 남긴 공략을 보고 온 거야?”

“네, 형이 남긴 공략이 없었으면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클리어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최종 장을 공략할 때도 틈틈이 공략글을 올리긴 했다.

그 글을 보는 사람이 있긴 있었구나.

“그리고 저는 초상우주가 준비한 ‘천은하’가 아닌 ‘은호’를 택했어요. 개변체도, 후보도 아닌 저에게는 의신이 형이 가진 능력도 없어요.”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후보의 의사를 확인합니다.’라는 메시지의 의미는 선택의 의미였나 보다.

“사실 저는 이 세계에 돌아올 가능성이 전무했어요. 대죄를 짓고, 또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저질러 영원히 다른 세계를 떠돌 운명이었죠. 하지만 의신이 형과 만나고 결국 이곳에 돌아오게 됐어요. 이 과정 모두가 누군가에겐 있어서 예상치 못한 오류겠죠.”

마지막 말을 덧붙이는 은호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저는 이 오류를 이용해 싸울 예정이에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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