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50화 (349/925)

57. 무대의 위 (1)

오늘, 어렸을 때부터 품은 독고미로의 꿈이 이루어질지의 여부가 결정된다.

몇 시간 뒤부터 플레이리스트의 마지막 촬영이 시작된다.

이 마지막 생방송을 통해 플레이리스트 우승자가 결정되고, 우승자는 국내 유수의 엔터테인먼트를 통한 데뷔가 확정된다.

대기실에서 혼자 연습하던 독고미로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도전해야 해……!’

오디션 프로그램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한 최후의 생존자라면 보통 화제성이 보장되므로 우승을 하지 않더라도 데뷔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플레이리스트 출연자는 달랐다.

전원 ‘플레이어’이기 때문이다.

플레이리스트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대중에게 주목받는 중이고 긍정적인 평가가 많다고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아직도 발생하는 이계, 에너미의 숫자에 비해 플레이어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런 프로그램을 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게 의견의 내용이었다.

그래서 툭하면 시청자 의견 게시판과 플레이리스트 관련 기사는 악플과 키배로 도배가 되는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플레이리스트가 종영된 후, 출연한 플레이어가 연예계에 데뷔하는 것도 일종의 도박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 플레이어를 데뷔시키겠다고 하는 기획사는 현재 하나였고, 그 기획사가 준비한 자리는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남은 플레이어는 셋.

지난번엔 독고미로가 시청자 투표 1위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이중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건 여래훈이었다.

‘래훈이 오빠가 얼마나 무대와 노래를 좋아하고, 잘 부르는지 알아. 그래도 양보할 수 없어.’

무대의 위에 서는 아이돌.

이 꿈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독고미로의 꿈을 지지하는 가족들이 많은 배려를 해 줬고, 꿈을 붙잡고 있기 위해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그 꿈을 붙잡는 동시에 초등학교 시절 사귄 유일한 친구를 지킨답시고 밀어내야 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한이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한 게 많았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한이를 밀어냈다가 주변을 맴도는 꼴이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한이를 밀어내면서까지 붙잡고 있던 꿈을 어느 정도 이루고 나면 그때 있던 일들을 전부 말하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러면 내 꿈을 어느 정도 이뤘을 때 말하는 게 좋을까?’

플레이리스트 출연이 확정되면, 플레이리스트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하면, 최후의 3인 중 하나가 되면.

이런 식으로 자신이 세운 기준은 ‘플레이리스트에서 우승하고, 데뷔하고 나면’으로 바뀌었다.

데뷔는 고작 시작일 뿐인데도, 그 정도로 꿈을 이뤄 두지 않으면 친구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여기에서 우승하더라도 한이한테 그때 있던 일을 내가 말할 수 있을까?’

독고미로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지만, 독고미로는 밖에 카메라가 있음을 알아챘다.

희미한 기계음과 독고미로 담당 촬영 스태프의 발걸음 소리 등이 판단의 근거였다.

독고미로는 거울을 보며 빠르게 머리를 정리하고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자 협찬받은 의상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염준열과 승복 차림의 여래훈이 등장했다.

염준열은 반듯한 게 그림으로 그린 듯한 시상식 MC 같은 모습이었는데, 여래훈은 신곡 컨셉에 맞는 의상을 아직 가봉 중인지 평상시 입는 승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스태프들이 거리를 두고 진을 치고 있었는데, 촬영 전 자연스럽게 출연진들이 교류하는 장면을 찍고 싶은 듯했다.

카메라를 앞에 두고 독고미로가 조금 굳어 있을 때였다.

“그럼, 잠깐 미로와 이야기하고 있을게요.”

염준열이 스태프에게 그렇게 말한 후, 조용히 대기실 문을 닫아 버렸다.

대기실 안에는 독고미로, 염준열, 여래훈 셋뿐이었다.

“미로야, 오늘 대본 확인했어?”

“아…… 네! 저, 관객들과도 이야기하는 장면 말하는 거죠?”

“그 장면 말인데, 조금 바뀔 수도 있어.”

염준열은 다소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최후의 생존자들 전원 개인적으로 초대한 응원단들이 있어서. 작가님이 그 응원단과 출연자들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 초대한 응원단.

순간, 자신이 초대한 1학년 0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런 의도로 부른 게 아닌데…….’

탈락 1순위로 꼽히던 독고미로가 여기까지 온 원동력이 된 은광고 버스킹 영상을 기획한 1학년 0반 아이들이 왔다면 화제가 될 거다.

유명인들도 많으니 인터뷰를 하면 더더욱 그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독고미로는 그런 목적을 갖고 아이들을 부른 게 아니었다.

독고미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로 의견부터 들어 보려고 왔어.”

염준열은 독고미로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여래훈도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내장사에서 신세 진 대사님과 시주님들이 오셨어. 물어보니까 인터뷰하는 건 상관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미로가 안 하는데 내가 하면 좀 그렇잖아?”

염준열과 여래훈이 독고미로를 배려해 주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독고미로 혼자 안 하겠다고 하면 분위기가 묘해지겠지만, 여래훈도 난색을 표하고 염준열이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하면 거절하기 쉬워질 것이다.

“애들한테 물어볼게요.”

“그래. 나중에 나랑 래훈이 형한테 먼저 말해 줘.”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일이 아닌데, 뭘.”

서로 건투를 빌며 대기실을 나서려 할 때였다.

“저번에 애국가 부르러 야구장 갔을 때 본 친구들이 오는 거지?”

“……네, 그렇다고 들었어요.”

불쑥 질문을 던진 여래훈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도 인사하러 가도 될까?”

*    *    *

황명호 대저택을 나서니 수업도, 부 활동도 끝나 있었다.

해가 짧아진 덕에 이미 일몰 시각이 지나 인공조명이 학교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반 아이들과 플레이리스트 촬영을 보러 가겠다는 약속을 아슬아슬하게 지킬 수 있긴 했지만, 미리 가서 아이들 간식을 사 주고 응원 소품을 함께 만들려던 계획이 깨졌다.

‘나가는 것도 고생했지.’

은호를 비롯한 호랑이들은 내가 나가는 걸 영 마땅치 않아 했다.

예전부터 했던 약속이고, 3일이나 학교를 빠졌으니 우리 반 아이들과 선생님을 안심시켜 주고 싶다고 어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황지호가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 약속은 못 지켰을 거다.

“하하하하!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계속 감시할 거다. 오늘은 무리하지 말도록.”

내가 어떤 눈으로 쳐다봤길래 저런 소릴 하는 건가.

황지호가 처웃는 소릴 들으며 약속 장소를 향했다.

갑자기 황지호가 처웃는 걸 뚝 중단했을 때, 반 아이들이 건물 벽 뒤에 옹기종기 몰려 서 있는 게 보였다.

“……너희들 뭐 해?”

“의신아, 안녕하세요! 몸은 괜찮아요? 그런데 지금은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나갈 타이밍을 놓쳤어…… 어떡하지?”

“쉿!”

사월세음을 필두로 반 아이들이 한껏 낮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아이들 대부분이 당황스러워 보였는데,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낮추고 있다기보다는 어찌할 줄을 몰라 일단은 소리를 죽였다는 느낌이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반 아이가 조용히 하라고 했으니 입을 다물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권레나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남은 한 손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멀리 떨어진 곳에 누군가가 둘 서 있는 게 보였다.

‘어, 저건……!’

그중 하나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라 금방 알아봤다.

의식적으로 실눈을 뜨고,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은 우리 반 부담임.

용제건이었다.

“용제건 선생님, 예전부터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그런데 용제건 선생님이 바쁘신 분이다 보니 이야기할 기회가 없어서…….”

“응, 말해 봐.”

그 앞에 서 있는 건 2학년 0반 소속 연가람이었다.

연가람은 손에 봉투를 하나 들고 있었다.

해가 진 시각, 한산한 은광고 교정.

준수한 외모의 용족의 총아와 한국 최고 명문고 연극부의 에이스가 마주 보고 있었다.

마치 순정 만화의 한 장면 같았다.

비록 한쪽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면 몹시 깨는 용족이었고, 다른 한쪽은 은광고 사상 최강최악의 악동들이 넘쳐 나는 2학년 0반 소속이긴 했지만.

“어떡해……! 우리가 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반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얼굴이 푸르게 변했다가 붉게 변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연가람이 종이봉투를 용제건에게 내밀었다.

“헐.”

“그냥, 다음 장면은 보지 말고 가면 안 돼?”

“일단 용쌤도 오늘 같이 방송 보러 가기로 했잖아.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용제건이 실눈을 조금 떠 봉투를 내려다봤다.

봉투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용제건이 물었다.

“……이게 뭐야?”

“뭐긴요.”

연가람이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개명 허가 신청서예요.”

우리 반 아이들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다양한 상상을 했겠지만, 그중에 개명 허가 신청서는 없었을 거다.

용제건도 어이가 없는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런 우리를 내버려 두고 연가람이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갈재걸 선생님의 ‘재걸’과 용제건의 ‘제건’의 발음이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빠르게 말하면 차이가 별로 안 나요. 자주 이름을 바꾸는 진족도 있다는데 이참에 바꾸는 게 어떠세요?”

“하하하, 하하하하하!”

결국 듣고 있던 노친네가 거하게 터졌다.

연가람은 처웃는 소리를 배경으로 개명의 유익함에 관해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용제건은 자신한테 이런 말을 하는 아이가 있다는 게 신기한지 실눈을 평소보다 더 크게 뜨며 이를 관찰했다.

그때, 양옆에 금찬솔과 왕찬솔을 낀 제갈재걸이 등장했다.

금찬왕찬 콤비가 용제건을 보다 오만상을 쓰는 게 보였다.

“앗, 아직 안 끝났네!”

“시간을 더 끌었어야 했는데!”

제갈재걸이 저 개명 권유를 못 보게 하려고 수작을 부렸나 보다.

제갈재걸은 두 사람의 태도와 연가람을 응시하다 물었다.

“용제건 선생님? 가람이랑 무슨 일 있나요?”

“하하하하하!”

“아, 누가 저 새끼 좀 그만 처웃으라고 해라.”

“제가 하겠습니다. 그만 처웃으십시오.”

“하하하하하하하!”

곧 자초지종을 알게 된 제갈재걸이 연가람과 금찬왕찬을 꾸짖고 용제건에게 사과했다.

용제건은 황당하긴 해도 화가 나지는 않은 듯 괜찮다며 웃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세상엔 재미있는 일이 많다니까.”

“……용제건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아. 이야깃거리가 늘었는걸. 아, 미리 말해 둘게. 난 이 이름이 마음에 드니까 안 바꿀 거야. 제갈재걸 선생님은 어때?”

“……어떻다니요?”

“제자들이 나와 이름이 비슷해서 싫어하잖아. 개명할 생각 없어?”

용제건은 연가람에게 받았던 봉투를 제갈재걸에게 내밀었다.

제갈재걸의 꾸중을 듣고 의기소침한 척하던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곧바로 고개를 쳐들고 반박했다.

“우리 제갈 쌤 이름이 어디가 어때서욧!”

“저희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제갈 쌤과 비슷한 모든 이름들뿐이에욧!”

“그만하렴! 아직도 반성하지 않았구나!”

“하하하하하!”

출발 전부터 분위기가 개판이 되었다.

방송국에 도착한 후에도 사건이 계속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5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