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54화 (353/925)

57. 무대의 위 (5)

은광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 2학년 0반 정해온.

이름보다 ‘독고미로의 홈마’로 더 널리 알려진 정해온은 본래 학업이나 플레이어가 되는 것에 큰 뜻이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이돌에 열중하던 정해온은 제 인생을 아이돌 덕질에 걸었다.

정해온은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안방에서 덕질하는 것을 넘어 팬 사인회와 공개 방송, 사전 녹화 등을 뛰고 각종 음악 프로 문자 투표, 음원 스트리밍 총공을 주도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자식의 진로에 관해 비교적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해온의 인생이 10대 시절에 연예인에 의해 결정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정해온의 부모가 제안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공부는 하고 해라.

―장래에 대해 어느 정도 신경 쓰는 게 좋겠구나.

―설마 고등학교를 안 가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을 거지?

―해온이는 플레이어잖아. 그래, 플레이어 특목고를 준비해 보는 건 어때?

정해온은 덕질에 쏟아야 할 황금 같은 시간을 공부에 날리는 걸 아쉽게 여겼지만, 부모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팬으로서의 활동하는 데에는 돈이 들기에 부모님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부모님에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정해온은 생각했다.

‘고등학생 시절부터 플레이어로 활약하면 돈을 벌 수 있어. 플레이어 특목고로 가자! 내 돌에게 쓸 돈을 내 손으로 버는 것도 괜찮네.’

그렇게 다짐한 정해온은 미친 듯이 공부하고 플레이어로서의 실력을 쌓기 위해 휴덕을 선언했다.

수험 준비로 휴덕을 선언한 정해온을 두고 공식 카페에서는 ‘저러다가 금방 돌아오겠지.’, ‘내가 봤을 땐 1주일 간다.’, ‘내일 닉 바꾸고 또 달리고 있을 듯.’ 하고 의견을 냈다.

그러나 정해온은 독하게 제 말을 지켰다.

오후 공식 행사엔 ‘올출’ 하던 정해온이 모든 팬 활동을 접고 학교, 학원, 독서실, 체육관을 전전한 결과 무사히 은광고에 합격하게 되었다.

비록 어마어마한 팬질 경력과 그걸 자기소개서에 빠짐없이 쓰고 면접에서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패기에 0반 행이 결정되었으나, 어쨌든 한국 최고 명문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합격의 기쁨을 누린 그날, 사건이 터졌다.

―유명 아이돌 A모 씨가 음주 운전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A모 씨는 지난주 경찰의 음주 단속에 적발되어…….

―당시 A모 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 .25%로, 이는 면허 취소 수준인 0 .10%를 훨씬 넘은 수준이었습니다.

정해온은 충격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충격보다는 팬심이 강했다.

옛날에 음주 운전으로 걸린 연예인들도 아직 활동하고 있으니, 법적인 처벌을 받고 충분히 자숙하고 반성한 다음에 돌아오면 된다는 게 정해온의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실드를 쳐 볼 생각이었지만, 사고를 친 멤버의 혈중 알코올 농도가 지나치게 높았고 여론이 좋지 않았다.

정해온은 실드를 치기 위해 음주 운전 관련 사고를 조사해 봤는데, 오히려 음주 운전의 폐해가 얼마나 끔찍한지 더 잘 알게 되어 오히려 팬심이 식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건은 단순한 음주 운전 적발 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 전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된 A씨가 소속된 유명 아이돌 그룹 멤버가 뺑소니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당시 A모 씨는 멤버들의 뺑소니 사건 현장 조작에 가담한 게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경찰에서는 해당 아이돌 그룹 멤버 전원을 대상으로 엄중히 수사할 방침임을 밝혔습니다.

그 A모 씨가 단순히 음주 운전을 한 게 아니라 사실 뺑소니를 치고 도망치던 중이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이 사건 현장을 조작하려던 게 드러나며 한반도가 그 아이돌 이야기로 뒤집어졌다.

정해온의 첫 우상은 그렇게 땅으로 추락하고 연예계에서 퇴출되어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합격의 기쁨을 누려야 할 시기에 심력을 소모한 정해온은 화병으로 드러누웠다.

그 화는 은광고 입학식이 시작할 때쯤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만, 분노가 사라지니 의욕도 함께 사라져 학교에 가는 걸 때려치웠다.

그렇게 정해온의 덕질은 끝났고, 은광고에 들어온 목표도 끝났다.

처음에는 등교는 물론이고 시험도 치지 않았으나 담임과 반장의 열렬한 설득으로 시험은 치고 유급은 면하기로 마음먹었다.

‘제갈 쌤하고 금찬이만 아니면 그냥 자퇴했을 텐데.’

정해온은 아주 가끔은 2학년 0반 아이들과 어울리며 무기력하지만 그럭저럭 0반 다운 은광고 학생의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영상이 정해온의 팬심에 다시 불을 지폈다.

바로 독고미로의 버스킹 영상이었다.

정해온은 독고미로의 덕질을 시작하며 다시 삶의 의욕을 찾았다.

플레이어로서의 활동도 재개했는데, 오로지 독고미로의 모습을 담기 위해 좋은 카메라를 지르는 등의 덕질에 필요한 비용을 대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신나게 덕질을 하던 중, 정해온은 불현듯 불안해졌다.

‘……다시 그런 사건이 생기면 어쩌지?’

정해온은 또 덕질하는 대상이 수습 불가능한 사고를 칠까 봐 두려웠다.

정해온이 왜 그렇게 맛이 갔는지 그 이유를 잘 아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미로에 관해선 내가 알아보겠음! 나도 미로 좋아하는데, 팬심을 담아 과거 행적을 조사해 보마!

금찬솔이 정해온을 위해 독고미로에 관해 조사해 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조사는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미로에 관해 뭔가 이것저것 삭제되어 있는 것 같은데? 미로 초등학교 동창이나 은사 중에 뭔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린 사람도 많고…….

이는 황명 그룹이 개입한 결과였으나 금찬솔과 정해온이 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금찬솔은 독고미로를 볼 때마다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는 듯했다.

―자꾸 마음에 걸리는데…… 뭐지……?

―특히 최근 나온 이 사진 볼 때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독고미로가 한국시리즈에서 애국가를 부르던 날.

독고미로는 그녀 쪽으로 날아온 파울 볼을 풀 스윙해 멀리 날려 버렸다.

그 장면은 야구 중계 방송과 정해온의 카메라에 아주 잘 찍혔는데, 그걸 보고 난 후 금찬솔의 기시감은 더욱 커진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고미로의 과거에 관련된 인물을 하나 찾았다.

―미로 초등학교 시절 단체 사진 입수함! 초등학교 때 갔던 체험학습장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었어!

어린 독고미로가 같은 반 아이에 섞여 있었다.

칼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와 꼭 붙어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몹시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 아이에 관한 금찬솔의 부가 설명이 있었다.

―걔는 지금 우리 학교 1학년 0반 후배님인 ‘한이’임! 초등학교 동창이었나 봐.

한이가 찍힌 것을 계기로 은광한빛보육원 쪽을 알아봤더니, 독고미로가 어린 시절부터 자주 보육원을 드나들며 아이들과 놀아 주는 등의 봉사 활동을 한 경위가 드러났다.

독고미로가 인성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걸 확신한 정해온은 안심하고 더욱 열심히 덕질을 했다.

여전히 뭔가 이상하다 느끼긴 했다.

‘늘 내가 어디에서 찍고 있는지 아는 것 같은데. 일종의 이능인 걸까?’

플레이리스트 파이널 라운드가 열리는 날.

멀리서 독고미로의 연습 장면을 찍으려던 정해온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미로가 연습할 때는 너무 방해하면 안 돼. 사진은 나중에 찍자.”

말을 건 이는 여래훈이었다.

정해온은 팬이기도 했으나 독고미로의 학교 선배이기도 했기에 예전에 독고미로의 소개로 여래훈과 말을 튼 적이 있었다.

“……이만큼 떨어져 있는 데도 방해가 되나요?”

“응.”

여래훈은 부드럽게 말했다.

그 대답을 들은 정해온은 의문을 품었다.

‘카메라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건 알았지만 방해가 될 정도라고? 왜? 시선을 감지하는 이능이 있으면 시선에 어느 정도 익숙해야 하지 않나?’

독고미로의 과거사를 캐며 알게 된 건, 독고미로의 사진이 매우 적다는 점이었다.

‘사진이 찍히는 게 싫으면 아이돌이 되기 싫었을 텐데.’

은광고 소속의 플레이어가 누군가가 시켜서 경연 프로그램에 나온 것도 아닐 텐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마침 오늘 방청객 중에는 독고미로의 옛 모습을 알고 있는 소꿉친구, ‘한이’가 와 있었다.

또, 뭔가를 눈치챈 듯한 여래훈도 이 자리에 있었다.

*    *    *

여래훈은 우리 쪽을 쓱 둘러본 후 인사했다.

“안녕, 저번에 야구장에서 본 친구들이 아니네.”

“오늘은 2학년 선배님들도 오셔서…… 와, 다 기억하고 계세요?”

“응, 나 사람 얼굴하고 이름 잘 외워.”

“예전에 불교 방송에 ‘내장산의 성자’ 특집 봤어요! 신도 이름 다 외우는 장면이 나왔는데요, 딱 한 번 마주친 분 얼굴도 다 기억하시던데요.”

방송을 봤다는 사월세음의 증언에 ‘오오오’ 하는 작은 환성이 퍼져 나갔다.

여래훈은 정말 야구장에서 봤던 아이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있던 송대석, 목우람, 권레나, 민그린 넷이 안 보인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유명 플레이어이자 승려로 많은 신도를 만났고, 최근엔 연예계에 몸담으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을 텐데 잠깐 스쳐 간 아이들을 다 기억하다니.

‘기억력이 좋다는 건 알았지만 실제로 보니까 대단하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다웠다.

여래훈은 독고미로의 경쟁자라는 이유로 대놓고 경계심을 보이는 2학년 0반 선배놈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통성명을 했는데, 그 관대한 모습도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그런데 독고미로의 홈마는 소개를 안 하네. 이미 여래훈과 아는 사이인가?’

내 예상대로 독고미로의 홈마와 여래훈은 서로 면식이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의 관계성에 관해 추측하고자 관찰하고 있을 때였다.

‘한이 쪽이 신경 쓰이나?’

독고미로의 홈마가 한이 쪽을 유독 신경 쓰는 게 느껴졌다.

한이가 독고미로의 소꿉친구라는 걸 알아서 그런 건가?

내가 생각을 이어 가기 전에 여래훈이 독고미로의 홈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미로의 선배가 응원하러 온 거구나. 해온이랑 같은 반이야?”

여래훈의 말에 금찬왕찬이 대놓고 경계하며 홈마를 봤다.

“정해온 씨, 미로의 홈마로서의 본분을 잊은 건 아님?”

“적하고 친하게 지내면 어떡함?”

“적이라니! 무례한 말은 그만하렴! 죄송합니다…….”

“오늘 찍은 사진 안 준다!”

제갈재걸에 이어 정해온이 정색하며 말하자 금찬솔과 왕찬솔이 바로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상황이 수습되었다.

“의상팀에서 래훈이랑 미로 찾고 있어! 의상 나왔나 봐!”

김유리의 인터뷰도 끝나 다 같이 인사를 마쳤을 때쯤 스태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둘은 오늘 방송 잘 봐 달라는 인사와 함께 물러갔는데, 점점 방송 시간이 다가온다는 실감이 들었다.

음료수를 가지러 갔던 아이들이 돌아온 직후 스태프가 말을 걸어왔다.

“은광고 학생분들이죠? 입장 부탁드립니다.”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촬영이 예정된 스튜디오로 입장할 때, 우리보다 앞서 입장하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 목에는 우리도 착용한 방청객용 명찰표를 걸고 있었는데,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게 밖에서 막 들어온 듯했다.

“내장산의 성자는 신도들이 온다고 했으니 그분 응원하러 온 건 아닌 것 같고…… 저번 경연에서 3등 한 후보 응원하러 온 분들 같은데.”

“다들 정장 입고 있네요. 그 후보분은 그냥 직장인이라고 들었는데, 협회나 공기업 같은 데에 다니나 봐요.”

“요샌 웬만한 공기업에서도 딱딱한 차림은 안 시켜. 방송을 의식해서 일부러 복장을 정하고 온 게 아님?”

“그런데 공기가 찬 게 저분들은 밖에서 인터뷰하고 왔나 봐.”

후보가 셋이라 세 후보를 응원하러 온 일반인들의 인터뷰가 반복되면 지루할 수 있으니 배경으로라도 변화를 주기 위해 밖에서 촬영하고 왔나 보다.

정장 차림의 직장인들을 흘끗 보던 권레나가 깜짝 놀란 얼굴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이 언니?”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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