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56화 (355/925)

57. 무대의 위 (7)

무기 아이템 카드가 실체화되지 않는 것 외에도 문제가 더 있었다.

“……이상해. 경보가 안 울려.”

“네? 경보요?”

“저 정도 이능파가 실내에서 터지면 경보가 울려야 해. 미세한 이능파는 못 잡아도 이 수준이면 당연히 감지가 됐을 텐데.”

정해온은 방송국을 학교보다 더 자주 오고 간 덕에 보안 규정에 관해 잘 아는 듯했다.

“플레이어는 무기 없이 발동 가능한 이능이나 광림이 있잖아. 그래서 방송국 전체에 이능파 감지 경보 시스템이 전개되어 있어. 무기는 이능파를 쓰지 않아도 쓸 수 있으니 카드에 표식을 남겨서 감시하는 거고.”

정해온은 플레이어 경비를 가리켰다.

플레이어 경비는 프로 플레이어답게 바로 아이템을 실체화해 대응하려 했는데, 그의 아이템 카드도 실체화가 안 되는 듯했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들은 설명에 따르면, 본래 스티커의 역할은 실체화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무기의 실체화 시 경보가 울리는 것이다.

경비 플레이어의 무기가 실체화될 만한 상황이 닥쳤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저 사람들 무기에도 스티커를 붙여 뒀나 보다.

이 일을 벌인 누군가는 방송국 보안 시스템에 관해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스티커를 부착한 아이템 카드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스티커를 부착하지 않은 다른 카드는 실체화가 가능했습니다.”

“모든 카드의 실체화 기능이 봉인된 게 아니라 스티커가 붙은 카드에만 문제가 생긴 거구나.”

목우람의 손엔 막 실체화한 듯한 황동 브러쉬가 들려 있었다.

저 아이템은 무기가 아니라 이계 금속 표면을 세척 할 때 쓰는 도구인데, 왜 들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목우람은 평소에 저걸 들고 다녔나 보다.

황지호가 학교에서 지급한 R급 ‘초보 봉술사의 철봉’ 위에 붙은 스티커를 살펴보며 말했다.

“꽤 잘 만들었군. 억지로 스티커를 벗기려 들면 아이템 카드가 손상되는 구조다. 아이템 카드를 버리기 싫으면 억지로 떼는 건 그만…….”

지지직!

불길한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금찬왕찬이 아이템 카드의 스티커를 억지로 뜯어내고 이능파를 불어넣고 있었다.

카드가 잠시 이능파로 반짝였지만, 이내 빛을 잃었다.

“어, 뭐임! 실체화가 안 됨!”

“카드는 웬만한 물리적 손상에는 파괴가 안 되지 않음? TV에서 실험할 때 보니까 덤프트럭이 위를 깔고 가도 멀쩡하더만!”

황지호가 말하기가 무섭게 아이템 카드를 버린 놈들이 나타났다.

들고 다니는 아이템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몇 개는 실험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나 보다.

“뭐, 맨손으로도 싸울 수 있으니까 상관없어.”

“나도.”

“하하하하! 이 몸도 마찬가지다.”

“안 물어봤는데.”

명백한 이상 사태에서도 반 아이들은 비교적 침착했다.

무기가 없으면 싸우기 힘든 아이들은 여전히 당황한 것 같았으나 우리 반에는 무기 없이 싸울 수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맨손 격투의 경우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으면 위력도 떨어지고 부상당할 가능성이 커지긴 했지만, 싸우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면 지금 싸울 수 있는 건 원래 물리 공격이 특기가 아니라는 황지호랑…….’

1학년 0반 중에 현재 싸울 수 있는 건 나, 황지호, 한이, 맹효돈, 사월세음, 민그린.

한이와 민그린은 보호대 없이 싸우는 게 처음인 것 같지만, 무기 아이템이 없으면 싸우기 힘들어 보이는 김유리와 권레나, 목우람에 비해 전력이 될 거다.

공간술을 쓰는 용제건, 언령으로 이능을 발휘하는 제갈재걸은 문제없다.

2학년 0반은 아이템 카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수선을 부리는 게 전멸인 것 같지만.

그래도 전력은 차고 넘쳤다.

‘여차하면 아이템창에서 소지한 무기 아이템을 나눠 주면 돼.’

환몽 경매, 파이트 클럽을 처리했을 때 수거한 아이템 카드들이 아이템창에 쌓여 있었다.

학교에서 배부한 아이템은 그냥 카드 홀스터에 넣고 다녔지만, 과정이 어쨌든 도품인 카드들은 아이템창에 두고 다녔기에 상보심금파와 마찬가지로 보안 검색대에서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템창으로 향하려는 손을 눌렀다.

‘지금은 무기 없이 싸울 수 없는 플레이어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이 올 가능성이 있어! 비장의 수로 남겨 둬야 해.’

상대는 무기 아이템 카드의 실체화를 봉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는 건 무기 없이 전장에 던져지는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

황지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내 쪽을 보면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이템 카드를 배부한다는 수는 보류하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수에 당황했지만, 아직 받아칠 수가 없는 건 아니야. 일단 상황 파악을 분명히 하자.’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건곤(乾坤)을 품은 눈’을 사용합니다.〉

광림을 전개해 방송국 전역을 살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건물에 창문과 문 아랑곳할 것 없이 차단벽이 내려갔고 견고한 결계가 전개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건…….

‘염준열의 대기실 앞쪽, 용족이 공격받고 있어! 그리고 지금 공격을 하고 있는 건……!’

상대는 플마고 게임 속에 등장하는 용족으로, 용을 죽이는 데에 특화된 신화적 영웅 ‘카드모스’였다.

그는 인간이었을 때 신의 핏줄을 타고난 용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죽였고, 영웅적인 삶 마지막 무렵에는 여신인 아내와 함께 용이 되었다고 한다.

즉, 카드모스는 용이되 용살(龍殺)의 전설을 가진 존재니 용족과 용족의 후예의 완벽한 카운터적인 존재다.

‘아직 카드모스가 등장할 타이밍이 아니었는데 벌써 그 수를 쓰다니!’

신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필멸자로 꼽히던 이 존재가 플마고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건 염준열이 사망한 이후다.

붉은 사자와 용족의 연합이 국회의사당을 습격했을 때, 최전선에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전설을 유감없이 현대에서 보여 줬다.

카드모스에게는 용을 죽였다는 일화가 있기에 용족이 그에 대항하기는 어려웠으나 전장은 한반도였고, 이 땅에서의 지명도와 지력을 끌어다 쓰는 능력은 청룡이 한 수 위였기에 균형이 유지되었다.

그 균형은 용왕신의 무녀가 배신한 후에야 깨졌다.

‘염준열을 노리고 있어. 아직 용족이 버티고 있지만 도우러 가야 해!’

수를 생각해 내기 전, 내 시야에 무언가가 잡혔다.

지하 주차장에서 폭발과 함께 주차된 차들이 이능파에 의해 구겨진 캔처럼 찌그러지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굉음과 함께 차들이 파괴되고 땅이 갈라지는 게 분명했다.

무참하게 파헤쳐진 바닥 사이로 무언가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계의 입구였다.

“전력은 충분한 것 같군. 우선 상황 파악을…….”

“지하 주차장 쪽에 이계가 발생했습니다! 지원을 요청드립니다.”

경비를 담당하는 프로 플레이어 팀 멤버였다.

전조 없이 이계가 발생한 데다 무기 아이템을 사용할 수 없으니 그들만으로는 대책이 서질 않나 보다.

제갈재걸은 그 요청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용제건 선생님, 아이들을 부탁해도 될까요?”

“부탁하다니요! 저희도 가서 싸울래요!”

“맞아요! 그리고 갑자기 무기를 못 쓰는 것도 이상한데 이계라니요, 뭔가 이상해요!”

“못된 놈들이 선생님을 노리는 거면 어떡해요?”

“너희들은 무기가 없으니 안 된다. 다른 분들의 대피를 도우렴.”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징징거리긴 했으나 지금 자신들이 짐이라는 걸 알고 생각보다 빨리 물러났다.

“나는 준열이한테 가 보고 싶어. 뭔가 이상해.”

용제건은 어두운 표정으로 대기실 쪽을 봤다.

대응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기습을 당했다고 하나 상대는 여러 피스를 노린 과감한 수를 두었고, 그 수에 노릴 허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상대가 모르는 피스들이 여러 개 있었다.

나는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우리 반 아이들도 이계 공략에 참가하게 해 주세요.”

“걱정 안 해도 된다. 이계 하나쯤이야 학생 손을 빌리지 않아도 돼. 우리 쪽에도 무기 없이 싸울 수 있는 플레이어도 있고, ‘남옥시인’이 함께해 주면…….”

플레이어 경비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갈재걸을 홀로 이 사태의 원인이 존재하는 곳에 보낼 생각은 없었다.

제갈재걸이 일행에서 떨어져 지하로 향하게 하는 것도 공격을 감행한 적의 한 수일지도 모르니까.

무엇보다 지금 저 플레이어 경비가 말하는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었다.

“통찰계 이능으로 지하를 봤어요. 지금 발생한 이계는 세 개가 넘고, 크기나 외관을 봤을 때 SR급 이상으로 추정돼요. 이계 공략할 인원을 늘리지 않으면 에너미가 지하에서 방송국 쪽으로 올라올 거예요.”

내 말에 플레이어 경비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당황한 것 같았다.

“카메라에 잡힌 건 하나였는데……!”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를 노린 듯한 배치였어요. 인원 분배에 실수가 있으면 안 돼요.”

플레이어 경비도, 제갈재걸도 이 설명을 듣고 놀란 듯했으나 곧 귀를 기울였다.

비록 내가 학생이라고 하지만 일단 이명이 있는 플레이어고, 무엇보다 통찰계 이능으로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한 의견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일 거다.

“황지호, 넌 싸울 수 있는 애들을 데리고 이계 근처에서 제갈재걸 선생님과 함께 수비대로 싸워 줘. ‘지원’이 올 때까지.”

“공략을 하는 게 빠르지 않나?”

“지원은 금방 올 거잖아.”

통신은 끊겼지만 황지호의 가호는 한반도 전역으로, 아직도 분신과의 교류를 할 수 있다.

이미 황지호는 분신을 통해 방송국으로 지원을 보내고 있을 거다.

굳이 공격대로 이계에 들어가서 제갈재걸이 고립될 만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피소는 이 스튜디오로 하면 될 거예요. 여기에는 ‘내장산의 성자’가 있으니까요.”

여래훈은 이미 소식을 듣고 온 건지 비구 18물 중 하나인 청동으로 만든 석장(錫杖)을 들고 결계를 펼치는 게 보였다.

저 석장에는 결계 보조 기능만 있고 공격력은 청동으로 된 막대기 수준이기에 알람 스티커로 봉인되어 막히지 않은 듯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나는 실눈으로 스튜디오 벽 저편을 응시하는 용제건을 향해 걸으며 말했다.

“용제건 선생님과 함께 움직일게.”

“용제건과?”

황지호가 미심쩍어하는 얼굴을 했지만,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말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내 계획을 밝힐 수 없는 노릇이었고, 무엇보다 내 계획을 말하면 황지호가 반대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염준열 선배님과 합류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싶어. 합류가 일찍 끝나면 나도 지하로 갈게.”

“조의신, 너…….”

황지호의 말이 중간에 끊겼다.

“이 스튜디오 안은 안전한 거군요.”

말을 건 이는 플레이리스트의 메인 MC이자 유명 플레이어 논객인 ‘양면 거울 최지나’였다.

최지나는 애초에 공격에 능한 이능을 소유하진 않았다고 들었는데, 무기 아이템까지 봉인되니 싸울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았다.

“그럼 저희는 여기에 남아 촬영을 계속하겠습니다.”

“네? 지금 상황에서요?”

최지나는 우리를 한 번, 무대의 위를 한 번씩 번갈아 봤다.

무대 위에는 횡설수설하며 도망가야 한다고 했던 세 번째 후보가 PD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밑으로 금속 패널에 인쇄된 플레이리스트 파이널 라운드 큐시트가 굴러다니는 게 보였다.

“플레이리스트는 여전히 논란이 많아요. 방송 중 이계 공략으로 인해 촬영이 연기되거나 방송이 중단되면, 여론은 플레이어의 연예계 진출 반대로 기울어질 거예요.”

최지나는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이계의 위협이 가까이에 있다고 느낄 테니, 역시 방송은 일반인들이 하고 플레이어는 이계 공략이나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겠죠.”

“그런……!”

정해온의 비명이 들렸다.

정해온은 입을 뻐끔거리며 반박할 말을 찾았지만, 플레이리스트 애청자이기도 한 홈마는 여론을 잘 알고 있는지 입을 다물었다.

“이계 공략도,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방영도 완벽히 끝내야 해요. 안 그러면 플레이어가 무대의 위에 설 길은 다시 막힐 거예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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