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57화 (356/925)

57. 무대의 위 (8)

방송을 중단한다.

만약 그런 일이 터진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 봤다.

플레이리스트는 이미 많은 안티가 존재한다.

피해가 있건 없건,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플레이리스트에 나온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절박한지는 모든 시청자가 잘 알아. 그리고 안티들은 그 점을 근거로 그 절박했던 방송을 중단할 만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떠들겠지.’

수많은 안티는 그 ‘무언가’가 단순히 안전만을 위해서였다고 생각해 주고 넘어갈 리가 없었다.

최악의 사정을 가정해 보기로 했다.

‘피해가 있었고, 이를 은폐했다고 의혹을 제기할 가능성이 있어.’

통신이 끊긴 상황이니, 현장의 모습을 전할 방법도 없다.

게다가 여기는 방송국이다.

기록기기의 영상을 나중에 공개하더라도 이를 조작할 능력이 충분히 있는 곳이다.

해명을 위해 수사 기관에 기록기기에 조작한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받는 데에는 몇 달이 걸릴 거다.

그 몇 달 뒤에는 이미 수많은 음모론에 시달린 출연자, 바닥으로 떨어진 화제성과 왜곡된 루머를 사실로 기억하는 대중들 그리고 승리한 악플러들만 남을 것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었지만, 현실에 유사한 사례가 여러 개 있어서 무조건 허황된 생각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웠다.

“……이계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플레이어 출연진이 비난받지 않을까요? 그냥 방송 중단하고 플레이어들이 다 공략이나 하고 에너미에 대처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최지나 뒤에 있던 스태프가 벌벌 떨며 말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게 어지간히 촬영 속행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최지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뱉은 후 차분하게 말했다.

말은 길었지만, 발음도 억양도 분명한 게 플레이어 대표 논객다운 말투였다.

“제가 시사 프로에 출연한 이후로 방금 조명 감독님 하신 말씀과 같은 논지의 댓글을 받았습니다. 방송 촬영 시간에 근방에서 이계가 발생했는데 넌 무엇을 했냐면서 꼴 보기 싫으니 당장 방송을 때려치우라는 악플이었죠.”

“악플이긴, 맞는 말로 들리는데요? 방송에 나오는 게 꼴 보기 싫어질 만하죠. 플레이어라면 무엇보다 이계 공략을 우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조명 감독의 갑작스러운 일갈에 주변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인간은 위기 상황에 닥치면 본성이 드러난다는데 딱 그 말대로인 것 같았다.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어처구니없어하고, 일반인 스태프, 방청객 중에서는 일부는 당황하고 일부는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여기 있는 사람들이 현재 여론을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그날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까?”

“피해는 없었습니다. 프로 플레이어 팀에 의해 피해 없이 이계 공략이 완료된 사례였어요.”

제갈재걸의 질문에 최지나가 그렇게 답하자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아우성쳤다.

“헐, 아무도 안 다쳤는데 그딴 악플이 달렸다고요?”

“방패는 많을수록 안전하잖아. 방패를 더 늘리고 싶었나 보네.”

“플레이어가 인간이 아니라 방패로 보이는 건 확실한 듯.”

“그냥 인생의 패배자가 악플을 달고 싶었던 거 아님?”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대놓고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조명 감독을 노려보며 말하자 제갈재걸이 말렸다.

조명 감독은 최지나에게 소리를 질렀지만, 반박당하는 건 마음에 안 드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더 이상 다수의 플레이어를 적으로 돌리면 좋지 않다는 걸 알 만큼은 똑똑한지 입을 다물었다.

너무 늦은 것 같긴 했지만.

“마음에 안 드는군.”

황지호가 조명 감독의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저 조명 감독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플레이어 관련한 프로그램에서 스태프를 맡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최지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소리를 지른 조명 감독을 바라봤다.

시사 프로에서 플레이어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자칭 전문가들과 논쟁을 벌여 온 논객다운 여유였다.

“하지만, 그 악플 덕에 플레이어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필요성을 더 크게 느꼈습니다.”

조명 감독은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최지나를 노려봤다.

‘이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슈니까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도 있어. 하지만 저건…….’

조명 감독의 얼굴은 지금 딱히 받아칠 말은 없지만,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한마디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조명 감독은 최지나와 생산적인 논쟁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플레이어들을 전장으로 내몰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거라 설득이 불가능했다.

최지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저는 이계 공략도 완벽히 끝낸다는 전제를 붙였습니다. 이계 공략으로 인한 사상자 발생, 방송 중단 등의 피해를 제로로 만들면 비난의 목소리는 최소로 줄일 수 있어요.”

“……정말 그럴까요?”

“피해가 없는 상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대중의 설득력을 얻기 힘들어요. 그때 저한테 달린 악플도 추천보다 비추천을 더 많이 받았거든요.”

플레이어는 전국민의 15% 정도다.

이런 비율 속에서 최지나에게 달린 악플에 비추천이 더 찍혔다는 건, 일반인도 저 악플이 마음에 들지 않아 비추천을 눌렀을 가능성이 컸다.

“미로가 계속 무대의 위에 섰으면 좋겠어.”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한이가 입을 열었다.

한이와 함께 무기 없이 싸울 수 없는 우리 반 아이들, 민그린, 사월세음, 맹효돈도 적극적으로 한이의 말에 찬동했다.

“나도……!”

“저도요! 이계 공략은 우리가 하면 돼요. 촬영을 계속해 주세요!”

“이계 발생은 지하에서만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냐? 에너미를 못 올라가게 하면 되잖아.”

고용주의 입장을 따르겠다는 프로 플레이어 팀에 소속한 이들을 제외한 모든 플레이어가 촬영 속행을 지지했다.

스태프 사이에선 말이 갈렸는데, 좀처럼 결정을 하지 못했다.

최지나가 ‘처음 촬영 속행을 부탁드린 건 저예요. 문제가 생기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라고 발언하자 촬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미로는? 이 사실 알아?”

“모를걸. 일단 사전 녹화 끝날 때까진 말 안 할 것 같아.”

“미로가 이 스튜디오로 들어오면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을 건가 봐.”

스튜디오 밖으로 이동할 때, 사용하지 않는 기자재와 박스 더미를 분주히 나르는 게 보였다.

여래훈의 결계가 있는데도 마음이 안 놓이나 보다.

“야.”

나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황지호에게 아이템 카드 더미를 내밀었다.

내 아이템창에 들어 있던 것들이다.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지?”

“내가 늦거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 수도 있잖아. 에너미가 지하를 벗어날 것 같으면 무기를 배부해. 구조를 보니까 지하 1층에 소품실이 있어서 저지선은 지하 2층까지로 한정해야 해.”

“……염준열과 합류해 이쪽으로 온다고 하지 않았나? 마치 합류가 불가능하다고 상정한 듯한 말이로군.”

황지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황지호가 나를 추궁할 시간은 없었다.

황지호는 아이템 카드들을 받아 들며 말했다.

“내 분신이 부른 지원이 근처에 당도했다. 바로 결계와 방화벽을 부수고 지하와 네가 있는 쪽으로 보내지.”

나와 용제건은 위층으로, 그 외 전력은 아래층으로 향했다.

엄밀히 따지면 전력으로 분류할 수 있는 최지나와 여래훈은 스튜디오에 남긴 했지만.

“준열이 위치는? 사전 녹화가 끝날 때쯤 스튜디오로 온다는 건 들었는데.”

“여기에서 두 층 위에 있는 녹음실 근처 대기실이에요. 출연자들이 사전 녹화를 하는 사이에 오늘 방영분에 들어갈 나레이션을 녹음할 예정이었을 거예요.”

엘리베이터는 안전을 위해 가동이 중지된 탓에 계단으로 이동해야 했기에 계단이 있는 비상구까지 달려야 했다.

이동 중에 대피소로 지정된 스튜디오로 향하는 직원들과 연예인들을 마주쳤는데,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퇴근 시간이 지난 탓에 내근하는 직원이 별로 없고, 야간 촬영과 편집을 위해 남은 이들밖에 없는 탓인 듯했다.

그리고 위층에 다다랐을 때,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카드모스가 죽이는 건 오로지 용뿐이야. 일반인은 스킬이나 아이템으로 이 구역에서 멀어지게 했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용제건이 달리려 했다.

용제건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용제건 선생님, 가면 안 돼요. 그대로 가면 죽게 될 거예요. 염준열 선배님도요.”

“……!”

용제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준열이가 위기에 처했나 보구나. 같이 있던 용은 어떻게 됐지?”

순간 ‘건곤(乾坤)을 품은 눈’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용족이 비추어졌다.

카드모스는 눈앞의 용보다 대기실 문 너머에 있는 염준열을 우선시하는 건지 용족의 숨통을 끊는 것보다 문을 먼저 부수려 들었다.

나는 자세한 설명 대신 고개를 한 번 저었는데, 내 뜻을 이해한 용제건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제안할 게 있어요.”

용제건은 내 제안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 몰랐지만 이에 따르기로 했다.

용제건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고,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에 쉽게 승낙을 받아 낼 수 있었다.

*    *    *

적벽괴도를 스승으로 삼기 전까지, 염준열에게는 스승이 둘 있었다.

하나는 방랑벽이 있는 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염방열이었다.

그가 후예였기 때문에 스승이 둘이 되었다.

―웬만한 무재(武才)가 아닌 이상 후예를 제자로 삼기는 어렵지. 후예와는 대련도 하기 어려우니까 지도하기가 까다로워.

―염방열이 자기 아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기도 했으니 잘됐네!

염준열은 후예로서의 제 능력과 입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두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적벽괴도를 제 스승으로 삼았다.

그 결과, 지금 염준열은 살아 있었다.

후예가 피가 이어진 진족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만약의 사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배웠다.

그리고 세 번째 스승으로부터는 두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못했던 것을 전수받았다.

‘스승님이 지시한 대로 기척을 감추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이미 잡혔을 거야. 아마 죽었겠지.’

대기실 문이 부수어진 순간, 염준열의 경호를 맡은 용족은 마지막 기력으로 습격자의 발목을 잡았다.

그 틈을 타 염준열은 기척을 감추고 도망쳤다.

중상을 입은 용족을 두고 달아나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염준열은 자신이 있어 봤자 시체가 하나 더 늘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누나……! 반드시 살아남아서 다른 분들을 불러올게요!’

플레이리스트 촬영을 위해 방송국을 자주 드나들고, 방송국에서도 틈틈이 기척을 감추는 연습을 해 독고미로와 용족의 눈을 피하려 했었다.

그때 연습이 도움이 되어 염준열은 미궁처럼 얽혀 있는 플로어에서 무사히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아래층에는 제건이 형하고 제갈재걸 선생님이 계셔. 그리고 1학년 0반에는 호족의 수장이 있잖아!’

염준열을 쫓는 자는 강력한 진족이었으나, 대항할 존재들도 이에 못지않았다.

염준열이 마침내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비상구에 도달했을 때였다.

비상구 너머에 시안색의 머리카락을 드러낸 용제건과 은광고 교복 차림에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인물이 보였다.

‘제건이 형이다! 그 옆에 있는 건…….’

가면을 고쳐 쓰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러자 가면이 똑똑히 보였다.

적벽괴도가 쓰고 다니던 까마귀 가면이었다.

‘스승님……? 왜 여기에?’

의문은 곧 반가움과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제 스승이 여기에 있으니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때였다.

“용의 이빨이여, 네 동족을 꿰뚫어라.”

습격자의 목소리와 함께 바람을 찢는 소리가 울렸다.

콰드드득! 퍼억!

용제건의 등과 어깨에 팔뚝만 한 용의 이빨이 박혔다.

그의 근처에 옥빛의 공간이 깨져 있는 게 보였는데, 그 순간 즉시 반응했는데도 쉽게 공간이 꿰뚫린 것 같았다.

마치 용의 힘을 완전히 무시한 불합리한 파괴력이었다.

용제건의 옥빛 머리카락을 물들인 피가 선명했다.

염준열은 비명과 흐트러진 숨을 밖에 보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제건이 형……! 어……?’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정작 용의 이빨에 몸이 꿰뚫린 용제건은 웃고 있었다.

어쩐지 염준열의 스승이 지을 법한 수상한 웃음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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