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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58화 (357/925)

57. 무대의 위 (9)

이계 충돌은 세계에 산재한 신화의 구성, 체계, 상징의 충돌을 의미하기도 했다.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상징인 존재일수록 충돌의 영향이 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용’이었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신화, 전설, 영웅담에 자주 등장하는 용은 지역별로 상징하는 의미의 차이가 컸다.

예외가 있긴 하나 대체적으로 동양에서의 용은 자연의 힘, 황제, 신의 대리인, 현자 등을 상징했다.

그 흔적으로 동양의 황제와 왕의 의복이나 침전에 용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서양의 용은 달라.’

보통 서양의 용은 영웅이 쓰러뜨려야 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게르만족의 영웅, 베오울프가 예이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목숨과 바꿔 쓰러뜨린 용.

헤라클레스의 12과업 중 11번째 과업으로 언급되는, 헤스페리스의 언덕에서 황금사과나무를 지키다 헤라클레스가 쏜 히드라의 독화살에 의해 쓰러진 용 라돈.

켈트 신화의 세 영웅인 크로한, 살, 단테엔과 대적한 용 자매 다브란, 파르바그, 카타흐.

이 외에도 영웅에 의해 쓰러진 용은 무수히 많았다.

카드모스가 쓰러뜨린 용,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도 그런 용 중 하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카드모스가 그 용을 죽인 것을 계기로 자신 역시 용이 됐다는 점이었다.

‘카드모스가 용이 된 계기를 생각하면, 용을 증오해도 이상하지 않아.’

샘을 지키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는 물을 찾던 카드모스의 부하를 죽였고, 이에 분노한 카드모스는 용을 죽이고 이빨을 뽑아 땅에 뿌렸다.

그 사건을 계기로 카드모스의 자손들은 대대손손 저주받고, 8년간 신의 종으로 살게 된다.

카드모스가 죽였던 용이 아레스와 데메테르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피를 이은 존재 중, 제우스와 테베의 공주 세멜레의 아들인 디오니소스를 제외하면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고 이에 카드모스는 죄책감에 이기지 못해 기도했다.

차라리 자신을 용으로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카드모스는 용이 되었다.

‘건국 영웅이 용이 되었단 말은 언뜻 듣기엔 큰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 같지만 달라. 카드모스가 존재한 세계관과 상징을 고려해 봤을 때, 저건 자신을 괴물로 만들어 달라는 자기 저주에 가까웠을 거야.’

생을 마치고 이상향 엘리시온에 갔던 카드모스는 이계 충돌 이후 흑막과 모종의 계약을 나누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왔다.

카드모스는 격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진족, 그중 용족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영웅의 적으로 등장한 기원을 가진 다수의 용이 그렇듯 용족의 무리에 섞이지 않았다.

오히려 흑막과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용을 죽이고 다녔다.

‘카드모스는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로부터 뽑은 이빨, 용아(龍牙)로부터 용아병을 부르고 그 용아병끼리 서로 싸우게 했다는 설화가 있어. 횟수에 제한이 있으니 신중하게 쓰겠지만…… 용제건한테는 쓰겠지.’

카드모스의 주 무기는 창이다.

투창 능력도, 창술도 우수한 카드모스지만 용을 상대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건 신화 속의 용아일 것이다.

한반도 내에서의 인지도가 최상인 용왕신의 총아인 용제건을 발견한다면 사용할 게 분명했다.

‘플마고에서도 염준열의 스승이나 청룡에겐 곧바로 사용했어. 용아를 사용할 대상은 정해 뒀다가 발견하면 즉시 쓸 거야.’

청룡은 지력 덕에 살아남았지만, 염준열의 스승은 용의 이빨에 목을 꿰뚫려 전사했다.

용의 이빨은 용의 힘을 무시하고 꿰뚫는다.

용의 힘을 막아 냈다는 전설을 가진 무기나 갑주가 있으면 모를까, 용제건은 맨몸이었고 가진 거라곤 ‘용왕신의 비늘’ 하나, 즉, 용과 관련된 아이템뿐이다.

이대로 카드모스와 마주치면 용제건의 목숨이 위험했다.

이를 막기 위해 수를 생각해 낼 필요가 있었다.

‘카드모스에게는 약점이 있어.’

카드모스는 테베의 영웅으로서 인간을 해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다짐에 이어 카드모스는 제가 한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에게 아주 큰 제약을 걸었다.

엘리시온을 떠나기 전, 그리스의 모든 신들에게 한 맹세를 이용하면 된다.

그래서 카드모스와 조우하기 전, 용제건에게 제안했다.

“제안할 게 있어요.”

“말해 봐.”

용제건은 선뜻 답했다.

“기습을 가한 상대는 용제건 선생님이 오실 거란 걸 상정하고 대비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경계하겠죠.”

“매복하는 입장에선 그렇겠네. 그래서?”

용제건은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성품을 고려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 반대할 것 같았으니, 적당히 불필요한 부분은 생략하기로 했다.

나는 교복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말했다.

“제가 용제건 선생님으로 변장할게요. 체격은 다르지만, 진족은 겉으로 보이는 나이를 조절할 수 있잖아요. 제 체격과 비슷한 나이대로 변해 주세요.”

“……준열이로 변하는 그 능력이구나!”

용제건이 황홀해하는 얼굴을 했다.

용제건은 두말없이 승낙했다.

나와 용제건은 등을 돌리고 빠르게 옷을 바꿔 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용제건 쪽을 돌아봤다.

17세 조의신과 비슷한 키의 용제건이 내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재킷 안으로 밀어 넣어 앞에서 보면 머리 길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의신아, 굉장해! 변신 스킬은 몇 번 봤지만, 이건 그 수준이 아니야.”

내가 변신한 용제건은 키가 한참 커서 내가 용제건을 내려보는 꼴이 되었다.

용제건은 신기해하며 나를 이리저리 둘러봤는데, ‘조의신’이라고 쓰인 명찰을 달고 용제건이 저러고 있으니 다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내 스킬은 당연히 쓸 수 있을 것 같고. 광림은 어때? 아니, 준열이의 홍룡도 불러내는데 내 광림도 당연히 쓸 수 있겠지.”

용제건은 계속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아무리 교복을 입었다 해도 저 표정이면 1km 밖에서 봐도 용제건이라고 알아볼 것 같았다.

나는 까마귀 가면을 꺼내서 용제건에게 건넸다.

“어쩔 수 없다곤 하지만, 까마귀 마왕하고는 취향이 안 맞는데.”

용제건은 현재 아주 기분이 좋은 상태라 그런지 투덜거리면서도 가면을 썼다.

‘용제건은 시델렌티움이랑 교류가 있다고 했지. 어떻게, 얼마나 마왕에 관해 아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용제건이 저번에도 취향이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의신이 너는 까마귀 가면을 애용하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어?

―왜요?

―나랑 취향이 아주 아주 맞지 않는 까마귀 마왕이 있는데, 최근 그 관계자가 눈에 띄어서.

취향, 관계자.

걸리는 말이 몇 개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근방에 용살자 카드모스의 위협이 닥쳐 있고, 그 앞에 용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있었으니까.

‘가면까지 쓰면 용제건인지 알아보기 힘들 거야.’

용제건이 가면 착용을 마치니, 그냥 가면을 쓴 학생 같았다.

용제건이 용제건처럼 보이는 데에는 긴 머리와 옥색의 실눈, 황홀한 표정이 큰 역할을 했는데 이를 감추니 그럴싸했다.

이제 기척만 감추면 완벽했다.

“용제건 선생님, 진족의 기척을 감추되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그러지. 투명한 공간을 압축해서 겹겹이 쌓으면 움직이긴 힘들어도 내 기척은 감출 수 있을 거야.”

“그럼 적과 조우하면 제가 주의를 끌겠습니다. 기회를 노렸다가 기습해 주세요.”

카드모스에게는 용의 방어를 무력화하는 무기가 있지만, 용의 공격을 전부 막을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주의를 끌어 용아를 유도하면 그 뒤는 잘 풀릴 거다.

그리고 내 수는 생각대로 이어졌다.

콰드드득! 퍼억!

등과 어깨가 부수어지는 감각과 함께 타는 듯 격통이 달렸다.

반사적으로 용제건으로서 공간술을 발동했는데 용아는 그 모든 공간을 파훼하고 내 육신을 꿰뚫었다.

그 순간,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왔다.

‘용제건이 아니라 날 공격했어!’

내 수가 제대로 이어졌다는 성취감에 이어 격통이 엄습했다.

고양감으로 일순 고통이 약해진 듯했으나, 지금 바로 치료를 할 수 없던 탓에 격통이 가시는 일은 없었다.

끔찍한 고통에 이어 든 감정은 분노였다.

‘이걸 용제건이 맞을 뻔했다는 건가……!’

감각이 멀어지려 했지만, 다음 수를 둬야 했다.

그리고 그 수를 두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 확인은 카드모스의 경악 어린 목소리와 함께 끝났다.

“……Απόλλων!”

카드모스는 지금 자신이 공격한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은 듯했다.

카드모스는 정확하게 내가 변한 플레이어블 캐릭터 뒤에 있는 존재를 꿰뚫어 본 것이다.

‘지금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가호를 내린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봤군.’

동양의 용들은 모두 용왕신의 가호를 받는다.

그러니 상상도 못 했을 거다.

방금 공격한 용제건의 모습을 한 존재가 아폴론의 가호와 광림을 받았으리라는 건.

“방금 저자가 ‘아폴론’이라고 외친 것 같은데…… 설마!”

용제건은 카드모스 앞이라 차마 이름을 대지 못했지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내 손에 들린 ‘무명의 운명’에 표시된 캐릭터는 함근형 선생님이었다.

나는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용제건을, ‘무명의 운명’으로 함근형 선생님을 재현했다.

함근형 선생님은 명사수로 이름난 상위 존재 넷과 광림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상위 존재 중 하나가 올림포스 12신의 일각, 궁술의 신으로도 꼽히며 카드모스와도 인연이 있는 ‘아폴론’이었다.

‘카드모스는 그리스의 신들이 아끼는 존재는 절대로 해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어. 그러나 지금 카드모스의 용아가 함근형 선생님을 꿰뚫었지……!’

지금의 나는 용이기도, 아폴론의 축복을 받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용아에 꿰뚫린 것과 동시에 카드모스가 맹세를 깨도록 유도했다.

‘……광림을 두 개 겹쳐 발동해서 그런가. 지금의 나는 용이지만 인간이기도 하니 바로 죽진 않는구나.’

격통 속에서 용제건의 모습으로 발동한 ‘플레이어의 궤적’을 해제했다.

용제건의 모습이 사라져 ‘용’이 아니게 되니, 용아가 힘을 잃고 내 몸에서 빠져나가 땅바닥을 굴렀다.

제약을 어긴 대가로 먼저 아폴론이 아끼는 존재를 꿰뚫은 용아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사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는 용아 위를 내 피가 덮었다.

툭, 투둑…….

상처를 틀어막던 용아가 사라진 바람에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갑작스럽게 출혈량이 늘어난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아직 둬야 할 수가 있는데……!’

용제건이 피 칠갑을 하고 함근형의 모습을 하게 된 나를 지지했다.

“움직이지 마! 그대로 치료 아이템을 사용해!”

용제건이 그렇게 말하며 공간술을 발동했다.

순간 눈앞에서 카드모스와 옥색의 공간이 부딪쳐 불꽃이 튀었다.

파아아앗! 챙!

용아를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한 카드모스는 두 개의 창을 들고 용제건과 대적하기 시작했다.

용아만큼은 아니지만, 카드모스는 용아 없이 저 창만으로 용을 쓰러뜨린 전적이 있는 존재였다.

치료를 한답시고 시간을 소모할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다음 수를 두기로 했다.

〈대상 캐릭터의 광림,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을 사용합니다.〉

태양의 빛을 띠고 있는 신궁이 손 위로 나타났다.

그리고 아폴론의 화살이 카드모스를 겨누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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