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천적 (1)
황명호 대저택.
조의신이 황지호의 모습을 한 황호와 함께 학교로 향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황호의 어린 분신이 저택에 도착했다.
평소라면 곧장 본채로 향했을 황호는 별채로 향했다.
별채는 어린 모습의 황호가 들어간 후에도 적막했다.
황호가 별채의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은호의 바로 앞에 마주 앉을 때까지 별채는 계속 조용했다.
“황호 님, 오셨군요.”
은호가 황호 몫의 차를 준비하며 그를 맞이했다.
어린 모습의 황호는 차보다 한과 쪽에 먼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은호, 기척을 읽는 게 늦군.”
“네. 아직 몸도 정신도 예전 같지 않아요.”
“보아하니 아직 내가 건넨 보고서의 반도 안 읽은 것 같은데.”
황호가 떠보듯 말하자 은호가 찻잔에서 손을 떼고 홀로그램을 전개했다.
은호는 디바이스 사용법에도 금방 적응했는데, 과연 여기만큼 발전하진 않았다고 하나 현대의 생활을 경험한 티가 났다.
은호는 홀로그램을 펼치며 담담하게 사실을 고했다.
“전 정상이 아니에요. 괜히 서두르다 놓치는 정보가 생기면 제 생각이 허술해져요. 하루 머릿속에 입력하는 정보량은 한정하고 있어요.”
“그렇군.”
황호는 그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말로는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너무나도 은호다운 말이라 황호는 몹시 안도했다.
“그럼 지금 모습으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입력하는 정보를 한정한다고 하지 않았나?”
“황호 님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유를 남겨 뒀어요. 바쁘실 황호 님께서 굳이 초등학교 생활에 시간과 힘을 할애하는 이유가 궁금해요.”
은호는 온화하게 말했으나 황호는 다소 긴장했다.
초등학생의 모습을 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긴 했다.
그러나 절반 정도는 그저 초등학교를 갈아엎는 재미, 인간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던 탓이다.
황호는 은호가 제 속을 꿰뚫어 봤다는 걸 눈치채고 변명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그 초등학교에서 사건이 좀 있었다.”
청호에서 인간이 된 한이, 한이의 친구 독고미로.
그리고 그 초등학교에 얽힌 이야기와 성국언, 전무영에 관해서도 설명을 어느 정도 마쳤을 때.
어린 모습의 황호가 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달토끼가 월궁계도에서 뭔가를 발견한 것 같군. 처음 관측하는 현상인데, 하필 지금 1학년 0반 일행이 향한 방송국 쪽이다.”
“의신이 형은 어떻게 반응하셨죠?”
“조의신도 잘 모르는 것 같더군.”
그 말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은호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플마고 스토리를 떠올려 봤지만, 지금 상황에 맞는 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인가…….’
은호는 플마고 엔딩에 도달한 이후에도 맨얼굴을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은 흑막을 떠올렸다.
용의주도한 그가 두는 수를 고려하면, 슬슬 예상치 못한 새로운 패를 꺼내 들 가능성이 컸다.
‘그동안 많은 수를 둬도 의신이 형에게 막혔지. 어쩌면 좀 더 미래에 둘 수를 당겨서 둘지도 모르고, 또 새로운 수를 개발할지도 몰라.’
은호는 월궁계도에 관측된 게 무엇인지 재확인하기로 했다.
은호는 오늘 읽었던 보고서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을 떠올리며 물었다.
“예전에 토연 님의 월궁계도에 ‘전조 없는 이계’가 관측되었다고 했죠.”
“어린이날 야구장에 갔을 때와 청소년수련회에 갔을 때 그랬지. 흑막이 가진 능력 같더군.”
“그리고 지금 관측된 건 그 ‘전조 없는 이계’ 현상과 다른 거고요.”
“그래.”
은호가 ‘전조 없는 이계’ 현상이 나타난 게임 속 사건과 현상을 대조해 봤다.
좀처럼 답을 낼 수 없는 듯 은호의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은호를 주시하던 황호가 입을 열었다.
“은호, 망할 달토끼가 맡고 있던 네 후예 말인데…….”
‘후예’라는 단어에 은호의 사고가 일시에 중단되었다.
은호는 저도 모르게 먼 옛날 읽었던 천기(天機)를 떠올렸다.
자신의 후예가 이 땅을 수호할 전사가 되고, 자신의 의형과 친우가 후예를 지키다 죽는다는 게 그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먼 옛날에 지나가지 않았나? 외적은 사라졌을 텐데……!’
그러나 하늘과 세상의 이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었다.
이제 은호는 천기를 읽을 수 없었기에 재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은호는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제 후예와 만나셨습니까?”
“그래. 네 직계 후예는 아니지만 말이다.”
직계 후예는 아니다?
마치 자신에게 후예가 더 있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은호는 금방 사실을 추측해 냈다.
“제 후예에게 자손이 생겼나 보군요.”
직계 후예는 만나지 않았다는 황호의 말에 은호가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은호가 읽었던 천기(天機)에 등장하는 후예는 그때 태어난 딸,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
황호는 은호의 경계하는 태도를 보고 더는 후예에 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은호는 자신의 후예에 관해 좀 더 캐 보기 위해 말을 고르고 골랐다.
그러나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아 대화가 시작되지 않았다.
“……!”
황호가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더니 디바이스를 켜 어딘가에 연락하기 시작했다.
표정이 굳은 게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황호 님, 무슨 일이죠?”
“방송국에 이계가 발생했다. 외부의 통신도 차단되었어. 무기 아이템도 봉인된 상황이지. 분신과 이어진 내가 지원을 부르기로 했다.”
은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앞의 황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황호는 신화계 호족이었고, 만약 그 개체가 소멸할 만한 데미지를 입는다 해도 그는 원하는 순간 본신의 위치를 바꿀 수 있으니 얼마든지 탈출이 가능했다.
즉, 황호는 지금이라도 눈앞의 초등학생의 모습을 본신으로 삼을 수 있으니 그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은호가 걱정하는 건 황호가 아닌 다른 존재였다.
‘의신이 형은 오늘 막 일어난 참인데……!’
인간이 되었다는 청호도 맨손으로 싸우게 되었다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은호는 황호가 지원을 부르는 사이, 자신을 다잡고 그에게 물었다.
“현재 방송국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의 이름을 알려 주세요.”
황호는 홀로그램에 리스트를 출력해 은호에게 넘겼다.
리스트를 확인한 은호는 불안해졌다.
아직 낯선 이름이 많았지만, 기억하고 있는 이름 몇 개가 걸렸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어린 모습의 황호가 연락을 마치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분신에 할애하는 힘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해 자세를 편히 하는 듯했다.
“지금부터 나는 싸울 수 있는 이들을 이끌고 지원이 올 때까지 수비대를 맡을 예정이다.”
“의신이 형은요? 같이 움직일 예정인가요?”
“조의신과 용제건은 따로 움직인다고 하는군. 염준열과 합류할 예정인 것 같다.”
은호는 그 말에 위화감을 느꼈다.
현장에 없으니 자세한 정황은 알지 못했으나, 지금 조의신의 행동은 어딘가가 이상했다.
‘의신이 형이 플레이어블 캐릭터도 있는 1학년 0반을 두고 따로 움직인다고? 용제건과 염준열도 플레이어블 캐릭터이긴 하지만…… 전력을 고려하면 황호 님 쪽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데.’
은호는 용제건과 염준열 쪽에 조의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만한 일이 있다고 확신했다.
은호는 어떤 수를 둬야 할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전 아직 이 세계의 변화나, 지난 세계에서의 관측 결과를 종합해서 보기 힘들어요. 현장 지휘와 계획은 황호 님과 의신이 형께 맡길게요.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요.”
황호는 은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호 역시 조의신의 태도에 불안감을 느낀 터라 두말없이 은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 * *
아폴론은 수많은 영역을 관장한다.
태양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아폴론은 아홉 명의 뮤즈를 곁에 둔 음악과 예술 그리고 의술과 예언을 상징한다.
그리고 달과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와 호각을 다투는 궁술의 신이기도 했다.
아폴론은 신화 속에서 궁술에 관한 이야기를 수없이 남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어머니 레토를 지키기 위해 퓌톤을 활로 쏘아 잡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퓌톤은 용으로 분류되곤 했다.
‘용족의 천적이 카드모스라면, 카드모스의 천적은 아폴론이겠지.’
카드모스는 그리스의 신들에게 빚이 있는 용이다.
그리고 아폴론은 그리스의 신이자 드래곤 슬레이어로서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카드모스는 태양의 화살을 보자 급히 사자 가죽으로 만든 방패를 들어 급소를 방어했다.
하지만 내 목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파아아아……!
태양의 힘이 실린 화살로 겨눈 곳은 드라콘의 배를 꿰뚫었다는 전설이 있는 투창 쪽이었다.
나는 카드모스에게 타격을 주는 것보다 용을 죽일 수단을 없애는 것을 우선시하려 했다.
“너……! 지금 그 상태로 신의 힘을 다룰 생각이야?”
용제건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용제건이 말리기 전에 활시위에서 손을 뗐다.
쒜에에엑! 콰앙!
폭발음과 함께 시야가 빛으로 막혔다.
막대한 힘의 충돌에 태양의 화살이 카드모스의 투창을 격파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없었다.
‘카드모스가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쓰러뜨릴 때 쓴 것은 창 두 개와 사자 가죽 방패 하나. 투창용 창은 부수었지만, 아직 하나는 아니야.’
나는 다시 아폴론의 신궁에 화살을 메겨 이능파를 실었다.
그때 내게 경고라도 하듯 함근형의 카드가 눈앞에서 어른거렸는데, ‘플레이어의 궤적’ 사용 가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0초 남짓.
‘무명의 운명’으로 사용하는 플레이어의 궤적에도 제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빠르게 시간이 소모될 줄은 몰랐다.
‘……생각한 것보다 소모가 심해! 아무리 신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화살을 한 번 쐈을 뿐인데. 데미지를 좀 크게 입어서 그런 건가.’
입안에 피 맛이 차오르는 게, 화살을 메기는 행동에 또 이능파가 날뛰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 창은 격파해야 해!’
피를 지나치게 흘려서 그런 건지 시야가 흐릿해지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플마고 속에서 봤던 함근형 선생님은 이보다 심한 데미지를 입고도 정확히 에너미의 미간을 꿰뚫었는데, 보는 것과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는 듯했다.
파아앗! 챙! 파앗!
활촉에 태양의 힘이 모이는 짧은 사이에도 카드모스의 맹공이 이어졌다.
카드모스의 목표는 나를 감싸며 공간술을 전개 중인 용제건이었다.
카드모스가 휘두르는 창은 용아만 한 힘은 없었으나 쉬지 않고 용의 힘이 담긴 공간을 터뜨려 가며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너무 빨라. 지금 내 집중력으로는 저 창을 맞출 수 없어!’
창을 쥐고 있는 손으로 타깃을 바꾸어 두 번째 화살을 쐈다.
쒜에에엑! 채애앵!
태양의 화살이 카드모스의 창이 쏜 이능파에 의해 궤적이 바뀌었다.
허무하게 벽에 박힌 화살이 태양 빛을 잃고 녹아내렸다.
‘……같은 화살을, 그것도 위력이 떨어진 상태로 테베의 대영웅에게 두 번 연속 쓴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나!’
눈앞이 아득해졌다.
동시에 아폴론의 신궁이 손에서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졌다.
‘무명의 운명’ 카드의 사용 제한 시간이 끝난 것이다.
카드모스가 아폴론의 가호와 힘이 사라진 걸 느낀 건지 창을 고쳐 쥐고 다시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용제건은 광림 사용을 준비하고 있는 듯 공간을 거두고 힘을 모았다.
그러나 용제건의 광림은 용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니, 용살자 앞에서 이를 보이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아직 카드가 아닌 광림은 사용할 수 있어. 하지만, 이제 회복하지 않으면…….’
방어력을 올리고 초회복 모드에 들어가는 곽경구의 ‘100초의 은총’ 대신 다시 함근형 선생님의 광림을 발동하면 대항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직후에 나는 행동 불능이 될 게 분명했다.
‘……여기에서 망설이면 용제건과 염준열이 다칠 거야.’
각오를 굳히고 광림을 발동했다.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내 망설임을 읽은 것처럼 눈앞에 두 장의 카드가 떠올랐다.
하나는 곽경구의 카드.
다른 하나는 함근형 선생님의 카드였다.
내가 함근형 선생님의 카드 쪽을 본 순간.
파아아아앗!
결계가 펼쳐진 유리창을 뚫고 화살들이 날아왔다.
빛을 머금은 수백 개의 화살이 카드모스를 향해 쏟아졌다.
방금 내가 쏜 것과 같은, 아폴론의 힘이 담긴 신궁의 화살들이었다.
‘설마, 이 화살을 쏜 건……!’
깨진 유리창 너머로 저 멀리 함근형 선생님이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