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천적 (4)
황명호 대저택의 별채.
은호와 어린 모습을 한 황호가 마주 앉아 있었다.
은호는 식어 있는 찻물이 담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두고 물었다.
“황호 님, 전황은 어떤가요? 방송국을 둘러싼 결계는 해제되었나요?”
“아직이다. 지금 결계를 부수는 중이다. 방송국 건물을 부수지 않고 결계를 깨기 어렵군.”
“초조하셔도 직접 모습을 드러내선 안 됩니다. 의신이 형이 맡긴 카드도 가능하면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알고 있다. 여차하면 내가 카드를 밀반입한 것으로 가장하면 되지만, 결국 적이 조의신의 능력을 알아챌 수도 있으니까.”
소파에 몸을 푹 파묻은 황호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현재 방송국 쪽에는 황지호의 모습을 한 본신만을 배치한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 방송국 외부에도 분신을 파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은호가 이를 말렸고 황호도 분신을 보내는 건 실책이라고 판단했다.
방송국의 내부는 통신이 끊긴 상태라 마족의 ‘눈’이 통하지 않지만, 외부는 달랐기 때문이다.
외부를 지켜보는 ‘눈’도 그렇고, 지금 방송국 주변에 있으면 언론의 먹이가 되기 쉬웠다.
은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토연 님과 연락 됐나요? 월궁계도에서 보였다는 관측물에 관해 듣고 싶은데요.”
“그 망할 달토끼에게 직접 연락해 봤자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 협회 쪽을 통해 알아보고 있다. 우수한 연구원이 해석하는 중이니 기다려 보는 게 좋겠지.”
황호는 우수한 연구원에 관한 설명을 짧게 덧붙였다.
우수한 연구원의 정체가 대영웅 무쇠팔 송만석의 손자이자 1학년 0반 소속 송대석이라는 말에 은호가 눈을 크게 뜨며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위성을 좋아한다는 묘사가 있었죠.”
“송대석은 그 게임 속에서도 그렇게 묘사되었나 보군.”
“네, 1학년 0반 등교생 명단에 있던 것도 놀라웠는데…… 협회 소속 연구원이 되었다곤 생각하지 못했네요.”
은호는 아주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황호는 그런 표정을 짓는 이유를 떠올렸다.
‘은호와 조의신이 플레이한 게임 속, 그곳에서의 송대석은 등교도 하지 못했고 연구원도 되지 못했나 보군.’
그때, 협회 쪽에서 대략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실시간으로 보고를 들으며 어린 모습의 황호가 입을 열었다.
“송대석이 그럴싸한 답을 찾았군.”
“말씀해 주세요. 가능하면 자세히요.”
“그래, 송대석은 협회 위성 연구소 측의 요청으로 우리와 헤어져 연구소로 향했는데…….”
은호의 요청대로 황호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송대석은 도착한 즉시 자신이 개발한 이계 변수 변환 예측 앱을 활용해 월궁계도가 관측한 개체와 위성의 관측값을 분석했다고 한다.
송대석은 아직 이 앱은 프로토타입이라며 다른 연구원들의 자문을 구할 겸 이계 변수 변환 알고리즘을 설명하며 차트를 전개했다.
관계성이 없어 보이는 변수들이 송대석의 고찰과 통찰력으로 이어질 때마다 연구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소한 구문 오류가 발견되어 연구원들이 협력해 수정한 후, 결과값을 확인한 송대석이 결론을 내렸다.
―이능파의 파장이 꼬여서 좀 읽기 어렵지만, 이건 ‘이계 안’에서 관측되는 이능파와 유사합니다. 밀도를 고려하면 플로어 마스터가 접근했을 때와 비슷해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송대석은 망설이다 말했다.
―예전에 장기간 사용 시 위성에 장애를 일으키고 플레이어 이능파를 교란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개발이 중단된 이계 시뮬레이터가 있었는데요.
―아, 기억나는군. 땅의 힘을 끌어다 써서 이계를 재현한다고 했지.
송대석의 말을 받아친 건 연구소 내 최고참 연구원이었다.
송대석이 태어나기 전, 발매가 되지도 않고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로 사라진 구형 이계 시뮬레이터의 존재를 기억하는 인물은 많지 않았다.
설명을 듣던 은호가 문득 물었다.
“땅의 힘이라 하면 지력을 의미하는 거겠죠?”
“그래.”
“……혹시 그 이계 시뮬레이터를 개발했다가 중단한 곳은 남궁 그룹이 아닙니까?”
은호의 말에 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군. 그것도 게임에 나왔나?”
“아뇨, 하지만 ‘지력’ 하니까 바로 떠오르더군요. 지금 방송국 상황도 그렇고요.”
은호는 식은 찻물을 입가로 가져가며 말했다.
“대비해 두길 잘했군요. 황호 님은 한발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주시해 주세요. ……의신이 형 쪽엔 함근형 씨를 보냈나요?”
함근형은 오늘 홍천에 일이 생겨 오후에 반차를 내고 학교 밖에 나간 상태였다.
반 아이의 무대를 보기 위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긴 했으나, 은호는 함근형을 가능한 빠르게 방송국 쪽으로 보낼 것을 요청했다.
“연락했다. 일을 마치고 방송국으로 이동 중이더군. 에어 택시에 타고 있었는데, 즉시 거기에서 내려 자력으로 이동하라고 전했다. 에어 택시를 타는 것보다 함근형이 전력으로 달리는 게 더 빠르니까.”
“방송국 입구 쪽이 아니라 현재 의신이 형이 계신 층으로 보내야 해요. 별일이 없더라도 일단 합류해서 상황을 보게 하세요.”
“지정한 위치로 보냈다. ……응?”
부하의 보고를 통해 전황을 확인하던 황호의 얼굴이 흐려졌다.
자신이 들은 게 정확한지 의심하는 듯한 태도였다.
“방금 함근형이 광림으로 아폴론의 신궁을 사용해 방송국의 외벽과 결계를 파괴했다.”
“……네?”
“함근형의 광림은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이다. 신궁뿐만이 아니라 시선도 빌릴 수 있지. 그 눈으로 무언가를 봤을지도 모르겠군.”
은호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 뒀다.
황호는 부하의 보고를 남김 없이 은호에게 전했다.
“교전을 시작했다. 함근형이 일방적으로 화살을 퍼붓는 것으로 보이는군. 적대 중인 대상은 부하의 위치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다.”
“결계는 어떻게 됐죠? 진입 가능한 상태인가요?”
“함근형처럼 방송국 건물에 위해를 가하면 가능하겠지. 방송국장과 협상이 끝났다. 5초 후에 외벽을 부수고 진입한다.”
황호와 은호가 속으로 5초의 카운트다운을 마치기 전, 황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발견했다. 예의 그 문제가 된 남궁 그룹의 구형 시뮬레이터를 소지한 것 같은데…… 제갈재걸을 유인하려는 것 같군.”
그리고 몇 초 후, 지하 주차장에서 상대를 제압한 듯한 황호가 입을 열었다.
황호의 얼굴에 불쾌감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상대는 나도 아는 얼굴이다. 촬영을 빌미로 감히 허락되지 않은 시간에 신역에 발을 들인 놈이군.”
* * *
염준열이 사망한 후 진행되는 붉은 사자와 용족의 복수 시나리오.
이 시나리오에서 칭하는 복수의 대상은 염준열이 죽게 된 계기를 제공한 어느 국회의원이었다.
그 국회의원은 자신이 벌인 수작질이 발각되자 국회의사당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붉은 사자와 용족이 그 국회의원을 마주할 일은 오지 않았지.’
염방열은 정부에게 협상을 걸어 국회의원을 내놓을 것을 제안했으나 정부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
당시 플레이어와 일반인 간의 갈등은 점점 커져 사회 분위기는 최악이었기에 정부는 정치인의 실수로 어린 플레이어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아버지의 복수를 테러로 치부했다.
그 결과, 붉은 사자 전원이 플레이어 협회 탈퇴와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특혜 반납을 선언하고 용족과 함께 행동에 나섰다.
그곳에서 기다리던 게 카드모스였다.
‘카드모스만이라면 괜찮았겠지만, 문제는 더 있었지. 용왕신의 무녀……!’
용살자인 용, 카드모스의 매복.
그리고 용왕신의 무녀가 저지른 배신.
나는 둘 사이에 연관성이 존재하리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 점을 입증하기 위해선 용족 사이에 카드모스를 던져 두고 무녀를 살펴야 했다.
그렇기에 정부나 협회가 카드모스를 채가기 전에 바로 용족이 카드모스를 확보하고 이곳을 이탈하길 원했다.
결코 이 상황을 바란 게 아니었다.
“그래. 우리 용족의 은인인 의신이는 내가 잘 데리고 갈게. 오늘 네 경호를 담당한 아이는 무사한 것 같은데, 맡겨도 될까? 저 아이를 픽업하고, 네 경호를 담당할 용들은 따로 보낼게.”
“네, 부탁드릴게요.”
용제건은 나와 카드모스를 데리고 가는 걸 당연시하고 있었다.
함근형 선생님이라도 계시면 말려 달라고 부탁해 보겠지만, 아쉽게도 우리 담임 선생님은 카드모스가 쓰러진 직후 바로 밑으로 향했다.
여긴 용제건이 있으니 다른 아이들의 안위를 확인하러 간 것 같았다.
전력을 고려해 봤을 때 옳은 판단이고 반 아이들을 걱정하는 담임 선생님다운 태도였다.
‘그래도 나를 데리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늦어서 자력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타이밍을 재고 있다가 용들의 대화에 끼어들어 의견을 제시했다.
“저는 괜찮아요.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일시적으로 이탈은 하되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방송국 주변에 있을 생각이에요.”
“의신아.”
염준열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경구의 광림을 쓸 수 있으면서도 주저했어. 즉, 네 안위보다는 눈앞의 상황을 해결하는 걸 우선시했지. 그렇다는 건 이미 다른 상황에는 안배가 끝난 것 아니야?”
염준열은 철없는 후배를 타이르는 선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실제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그랬다.
“만약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너는 다음 수를 두기 위해 네 자신을 회복했을 거야. 그렇지?”
염준열의 말은 정확했다.
그 안배를 위해 황지호를 여기로 데려오는 대신 지하에 배치하고, 아이템 카드까지 건넸다.
잠실 야구장에서 내가 시구를 권한 것만으로도 내 뜻을 모두 파악했던 것처럼, 염준열은 이 상황과 내 태도를 기반으로 정확한 추리를 하고 있었다.
내 제자의 추리에 말문이 막혀 있자니, 용제건이 아주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신아, 힘들면 잠깐 잘래?”
저항하면 물리적으로 재울 생각인가.
용제건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짓이었다.
결국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 발로 갈게요.”
이 말에 염준열이 희미하게나마 미소지었다.
* * *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 어둠을 밝히는 건 희미한 빛을 두른 홀로그램 화면뿐.
그 화면 위로 긴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길게 뻗은 손가락이 더듬은 화면이 비추는 곳은 어느 방송국이었다.
“기민하게 반응하긴 했으나 준비된 움직임은 아니로군.”
나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나의 ‘이계 부르기’는 호족이나 토족에 의해 간파된 것 같군.”
그 말에 발치에 앉아 있던 쌍둥이들이 수선을 떨었다.
“토끼 탓일 거예요! 토끼는 예전부터 잔재주가 많았거든요.”
“죽여도 죽지 않는 토끼는 몰라도 다른 토끼는 전부 없애 버려야 했어요. 그때 멍청한 곰들이 잘 처리했어야 했는데!”
“죽지 않는 토끼는 정이 많아요. 그러니 다른 토끼가 없어지면 제구실을 못 했을걸요?”
“다음에는 저희를 보내 주세요!”
긴 손가락의 주인은 쌍둥이의 투정을 한 귀로 흘리며 화면을 닫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는 분노는커녕 아쉬움도 보이지 않았다.
“되었다. 어차피 이번에 둔 수는 일종의 ‘확인’이었으니까. 나비령.”
“네, 여기에 있습니다.”
나비령을 부르자 어둠 저편에서 빛나는 나비의 편린이 ‘파스스’ 하고 흩날렸다.
부서지는 비늘 가루 밑에서 나비령이 몸을 낮추고 있었다.
“내 명령은 모두 이행했나?”
“물론입니다.”
나비령은 공손히 답했다.
고개를 숙인 나비령의 입꼬리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으나, 길게 올라가 있었다.
“곧 당신의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