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1)
밤에 원거리에서 촬영한 탓에 낮은 화질의 붉은 벽 영상.
정체를 감춘 의인이 환몽 게이트를 붕괴시킨 활약상을 정리한 신문 기사.
염준열이 처음 접한 적벽괴도의 단서는 너무나도 희미하고 멀었다.
그러나 염준열은 포기하지 않고 적벽괴도를 찾아 헤맸다.
그 노력이 보답받아 적벽괴도가 직접 염준열을 찾아왔다.
―제가 왜 당신을 찾는지 아시나요?
―나를 스승으로 삼고 싶다면서.
염준열의 속마음을 훤히 읽은 것 같은 말을 한 적벽괴도는 조건부로 스승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적벽괴도가 제시한 조건은 염준열이 5월 5일 어린이날에 잠실 야구장에서 시구하는 것.
염준열이 그 조건을 이행한 결과 수많은 사람들을 이계의 위협에서 구할 수 있었고, 적벽괴도는 염준열의 스승이 되었다.
스승이 된 이후에도 스승의 정체는 짙은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단서가 있긴 했으나 적벽괴도의 정체를 밝히기엔 부족했다.
‘레나와 세음이가 엮인 환몽 경매 사건. 효돈이가 피해자였던 은광구 교육 환경 보호 구역 정화 건…… 다 1학년 0반과 관련이 있었지.’
적벽괴도의 행보가 1학년 0반과 관련된 것.
늘 은광고 구교사에서 만나는 것.
이 두 가지를 통해 그저 은광고의 누군가라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그래도 염준열은 언젠가 자신이 적벽괴도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믿음직한 제자가 되면, 자신이 강해지면 스승이 자신에게 직접 정체를 말해 줄 거라고.
그 포부를 적벽괴도에게 밝힌 적도 있었다.
―스승님이 언젠가 제게 말씀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제가 스승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스승님의 정체를 감당할 만큼 강해지면 반드시 말씀해 주시겠죠.
그러나 염준열의 그 기대는 최악의 형태로 산산이 조각났다.
용이면서 용살자인 존재의 습격.
그 앞에서 염준열은 한없이 무력했고, 적벽괴도는 용제건을 구하기 위해 대신 공격을 맞고 그 정체가 드러났다.
‘이렇게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난 아직 스승님의 기대에 조금도 부응하지 못했어!’
적벽괴도의 정체는 1학년 0반 소속 후배인 조의신이었다.
용제건이 조의신의 교복을 입고 까마귀 가면을 쓴 것을 보니 이미 용제건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용제건의 강력한 이능이나 사고력, 추리력을 고려해 봤을 때 그가 적벽괴도의 정체를 꿰뚫어 봤거나, 조의신이 직접 자신의 정체를 밝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게 판단했기에 염준열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얼마나 무력한지 새삼 깨달았다.
조의신은 용제건의 기운을 띄다가 함근형의 광림을 사용하고 마지막으로 곽경구의 광림을 썼다.
‘제건이 형이나 함근형 선생님은 나보다 더 강해서 가늠하기 어려워. 하지만…… 의신이가 사용하는 경구의 광림은 경구가 직접 쓸 때보다 강력하게 발동하는 것 같아!’
조의신은 염준열 자신의 능력만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에 더해 경악스러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곽경구의 광림, ‘100초의 은총’으로 회복을 마쳤다고 하나 크게 소모된 조의신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용제건이 이런 말을 했다.
―이게 경구의 힘이구나. 눈을 감고 있었으면 경구가 앞에 있었다고 생각했을 거야.
―‘부재자의 기척’으로 느낀 적이 있어. 네가 키모폴레이아에서 쓴 적이 있었지.
용제건의 그 말에 염준열은 스테일메이트 배 체스대회를 얼마 앞두지 않았을 시점에 스승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이번 주말에 주오 그룹과 TC 그룹에서 여는 선상 파티에 너도 갈 거야?
―또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저도 선상 파티에 가는 게 좋을까요?
―아니야. 오지 마.
가면을 쓴 조의신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을 하던 조의신이 얼마나 단호했는지 잘 기억이 났다.
혹시 조의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까 의기소침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자니 조의신이 달래듯 이런 말도 했다.
―저번에 네가 안 왔으면 다치는 사람이 나왔을 거야. 고마워. 그래도 이번에는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에는 배려심과 염준열을 생각하는 마음이 묻어났다.
그게 기뻐서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조의신이 어떤 위험을 감수했을지를.
‘키모폴레이아에서도 예기치 못한 이계가 발생했다고 했지. 그걸 해결한 건 원우 형을 비롯한 은광고 플레이어들과 수혁이 친척이었어. 그리고…….’
그날 이계 공략에 참가한 플레이어 명단에 ‘무명의 초신성’은 없었다.
그 말은 조의신은 이계 공략 대신 다른 무언가를 했을 가능성이 컸다.
단서가 부족하여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으나 염준열의 파티 참가를 막고, 곽경구의 광림을 사용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일 게 분명했다.
‘경구의 광림은 싸우는 데에는 맞지 않아. 나나 제건이 형, 함근형 선생님의 이능도 쓸 수 있는데 굳이 그 능력을 썼다는 건 회복 아이템으로는 수습이 어려운 부상을 입었던 게 분명해……!’
조의신이 입은 용제건의 옷은 용아로 뚫린 자국과 그가 쏟은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염준열은 제 무력함을 절절하게 실감했다.
‘스승님이, 의신이가 내게 ‘기척 죽이기’를 익히게 한 건…… 이런 상황에 대비한 거겠지…….’
염준열은 참담한 기분으로 조의신을 내려다봤다.
염준열의 머릿속에 조의신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이 스쳐 갔다.
이명을 얻게 된 계기가 된 입학 실기 시험 사건부터 청소년 수련회 사건까지.
아니, 어쩌면 이 외에도 염준열이 모르는 사건이 더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1학년 0반이 휘말린 모든 사건에서 의신이가 그동안 반 아이들을 구했을지도 몰라.’
염준열은 위기 상황에서 조의신이 이렇게 미련 없이 몸을 던졌을 거라는 생각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조의신의 성품을 고려해 보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염준열 선배님, 다친 곳은 없어요?”
조의신이 한 말이 염준열을 더 괴롭게 했다.
그 괴로움과 먹먹함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으나 염준열은 그 이상 울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 조의신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이 무력해 비호의 대상으로 삼은 탓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더 울면 스승의 동정을 얻을지언정 신뢰는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염준열은 자신을 다잡았다.
조의신을 용제건에게 맡긴 후, 염준열은 플레이리스트의 촬영이 진행되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의신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지키려 했던 방송이니까 반드시 무사히 마쳐야 해! 게다가 이 무대에는 의신이의 클래스메이트인 미로도 출연하잖아.’
당장 조의신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지금은 갈 수 없었다.
이 무대를 저버리고 가면 염준열은 정말로 스승을 볼 낯이 없어질 것이다.
염준열은 굳은 의지를 품고 곧게 걸었다.
스튜디오에 도달했을 때, 붉은 사자의 팀 마크가 새겨진 붉은 망토가 눈에 들어왔다.
용족은 하나도 없는 게 여전히 용살자를 경계하는 듯했다.
“준열아! 이야기는 들었어. 뒷일은 걱정하지 말고 일단 방송부터 마치고 와. ……응?”
혼절한 일일 매니저 용족과 용제건을 대신해 이 자리에 온 붉은 사자 팀원 중 하나가 염준열을 보다 놀란 얼굴을 했다.
“준열아, 혹시 아까 홍룡을 불렀어?”
“아뇨, 저는 교전하지 않았어요. 왜 그러시죠?”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기감이 예민한 붉은 사자 팀원이 염준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어쩐지 준열이 네 눈에서…… 홍룡의 기운이 느껴져서.”
* * *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방송이 시작되었다.
광고가 끝난 후, 플레이리스트 본방이 시작되었는데 바로 생방송부터 나오진 않았다.
최지나와 염준열의 멘트와 함께 그간 출연자들이 밟아 온 과정들이 다이제스트로 흘러나왔는데, 최후의 3인뿐만이 아니라 탈락했으나 주목을 받았던 플레이어들도 짤막하게 보여 줬다.
그러면서도 최후의 3인이 돋보이도록 편집한 게 연출에 매우 공들인 듯했다.
곧 플레이리스트의 발자취를 정리한 영상이 끝나고 독고미로와 여래훈, 남궁 그룹의 회사원이 서 있는 무대가 화면에 떴다.
생방송의 시작이었다.
[플레이리스트, 마지막 재생을 시작합니다!]
와아아아……!
최지나와 염준열이 그 멘트를 마치자 화면 너머의 방청석과 화면 밖의 염준열 광팬들이 동시에 함성을 질렀다.
용족들과 붉은 사자 팀 멤버들은 손에 홍룡을 이미지한 듯한 용 장식이 달린 응원봉을 흔들고 있었다.
이능파에 반응해 빛을 내는 방식의 응원봉인 듯, 밝기는 제각각이었으나 강력한 이능을 소유한 집단이다 보니 하나같이 눈이 아플 정도의 광량을 자랑했다.
누가 보면 염준열이 플레이리스트에 출연한 거라고 착각할 것 같았다.
‘……보통은 진행자가 아니라 출연자를 응원할 때 저걸 쓰지 않나? 그런데 언제 저런 걸 맞췄지? 나도 갖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위엄 넘치는 목소리와 함께 강렬한 이능파가 느껴졌다.
그쪽을 보니 청룡과 염방열이 응원봉을 쥐고 있었는데, 응원봉이 터져 나갈 것처럼 밝게 빛나는 걸 보니 그들의 이능파에 반응해 출력이 올라간 듯했다.
“역시 내 아들이다……! 완벽하다!”
“최고인 준열이가 고작 그런 일을 겪었다고 무너질 리가 없지. 나는 믿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용제건이 한마디 했다.
“하하, 청룡하고 염방열이 많이 들떠 보이네.”
그렇게 말하는 용제건의 손에도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용제건도 두 팔불출만큼이나 들뜬 것 같다.
염준열이 스타 플레이어다운 완벽한 모습으로 플레이리스트 방송을 이끌고, 또 그 모습을 보며 용제건이 기뻐하는 걸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첫 무대는 최후의 3인이 보이는 합동무대였다.
여래훈과 독고미로는 안정적으로 제 파트를 마친 반면, 남궁물산 이계 산업 1사업부 소속의 플레이어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저 사람은 일이 터지기 전에 도망치라고 경고했었지. 뭔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해. 그 자리에 있던 황지호도 봤겠지.’
지금 저 자리엔 황지호가 부른 지원 외에도 붉은 사자의 팀원도 있으니, 남궁 그룹에서 저 플레이어를 빼내는 건 불가능할 거다.
회사원 후보의 부진 때문에 다소 불안한 무대였지만, 그만큼 독고미로와 여래훈이 분발해 그럭저럭 괜찮은 오프닝 무대가 끝났다.
그 뒤로 이어진 건 인터뷰 영상과 사전 녹화 방송분이었다.
여래훈의 사전 녹화 방송분이 나올 때쯤.
디바이스가 쉬지 않고 메시지 수신 알림음을 뱉기 시작했다.
플레이리스트 방영에 방해가 될 정도였다.
‘알람을 꺼 둬야 하나?’
알람을 끄기 위해 홀로그램 화면을 켜니, 잔뜩 쌓인 메시지들이 보였다.
거의 다 반 아이들의 메시지들이었는데, 황지호가 보낸 메시지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금도 쉬지 않고 새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황지호] 조의신, 어디냐.
[황지호] 용제건이 데려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뜻이지?
[황지호] 용제건과 있다가 생방송이 시작하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황지호] 네 디바이스의 위치 추적을 마쳤다.
이사장의 권한을 남용했다는 이야기를 당당히 마친 노친네가 최후통첩 같은 메시지를 보냈다.
[황지호] 용족의 영역에 출입이 가능한 이를 보내 마중 가도록 하지. 기다리도록.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