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2)
사전 녹화를 모두 마친 후 생방송이 시작되기 전.
결계 밖에 이능파가 감지되었다.
처음엔 경계했으나 이내 이계 공략을 나섰던 이들이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초조하게 문 쪽을 흘끗거리던 사람들이 플레이어들의 귀환에 환호했다.
여래훈이 청동 석장을 휘두르자 문 사이에 있던 투명한 결계가 사라져 플레이어들이 스튜디오 안에 발을 디뎠다.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얘들아! 어디 다친 데는 없어?”
함근형과 제갈재걸, 1학년 0반 아이들을 선두로 스튜디오에 돌아오자 김유리가 환하게 웃으며 이들을 맞이했다.
“아, 맞다. 의신이는? 용쌤은?”
“용쌤이 데리고 가셨대요.”
“응? 염준열 선배님이 사회 보러 무대에 오르실 텐데 그걸 안 보고 가셨다고?”
“그러게…….”
김유리가 의문스럽게 여겼지만, 이 의문에 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제갈재걸이 부상을 숨긴 건 아닌지 2학년 0반 학생들은 그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제갈 쌤! 어서 와요! 어디 다치지 않았죠? 아픈 곳은 없죠? 이능파를 지나치게 써서 지치진 않으셨나요?”
“나는 괜찮단다.”
“제갈 쌤의 괜찮다는 기준은 좀…….”
“제갈 쌤은 거짓말은 못 해도 가끔 숨기거나 사실을 축소해서 말하잖아요!”
“다치지 않았단다.”
“아니야, 제갈 쌤의 얼굴이 뭔가 이상해. 무슨 일이 겪은 사람의 얼굴이야!”
금찬솔과 왕찬솔이 트집을 잡아 집요하게 물었지만 제갈재걸은 답하지 않았다.
다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로 판명되어 기세가 한풀 꺾이긴 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담임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 눈길을 받으면서도 제갈재걸은 아이들을 다독이며 할 말을 다 했다.
“너희들이 걱정할 것 같아서 들렀단다. 나는 붉은 사자 팀원들과 뒷수습을 해야 할 것 같구나.”
“네? 지금 어딜 가신다고요?”
“아니! 이제 막 오신 분이 어딜 가욧!”
“학생들도 공략 과정에 참가했으니 인솔자 중 한 명으로서 수습 과정을 지켜봐야 하지 않겠니.”
“그럼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용제건 선생님은 의신이와 자리를 비웠고, 함근형 선생님은 같은 반 아이의 공연을 보셔야 하니까 내가 가야겠다.”
제갈재걸의 말에 2학년 0반 학생들의 입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지만, 매일매일 제자들의 그런 얼굴을 보는 제갈재걸에겐 통하지 않았다.
“빨리 오도록 노력하마. 함근형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있으렴. 찬솔이들은 학급 임원이니까 가람이랑 해온이 잘 챙겨 주고.”
“네에…….”
“네엡…….”
금찬솔과 왕찬솔이 오리 주둥이 같은 불만이 가득한 입으로 대답하는 진기를 선보였다.
2학년 0반 아이들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제갈재걸이 걸음을 옮겼다.
제갈재걸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기 전, 맹효돈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효돈아, 아까는 고맙구나.”
“어…… 네…….”
풀 죽은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2학년 0반 아이들이 제갈재걸의 눈을 피해 눈을 번뜩였다.
제갈재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금찬솔과 왕찬솔이 맹효돈을 향해 돌진했다.
키가 작은 편인 맹효돈이 2학년 0반에 둘러싸이자 선배들에게 괴롭힘당하는 후배1로 보였다.
“잠깐! 고맙다니 그게 뭔 소리야?”
“1학년 0반 맹효돈 후배님아. 대체 왜 제갈 쌤이 뭘 어떻게 고마워했는지 말해 보셈.”
“어…… 그러니까…… 이걸 말해야 하나…….”
“뭐가 있네! 빨리 말해!”
“빨리이이이!”
“선배님! 뒤에서 함근형 선생님이 보고 계셔요.”
김유리가 재빠르게 끼어들어 중재했다.
함근형은 스태프들의 안내를 받아 독고미로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천하의 2학년 0반도 함근형의 험악한 인상에는 기가 꺾이는지 한발 물러나 부드러운 얼굴로 물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도록 아이템으로 임시 결계를 펼친 후, 맹효돈이 그때의 상황을 전하기로 했다.
맹효돈은 지하 주차장에 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2학년 0반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김유리와 약속한 대로 후배 앞에서 성질을 내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제 화를 억눌러야 했다.
“전에 은광고 정문에서 사고 친 놈 아님? 그때 그 사건은 나도 아주 자알 알고 있지.”
“나도 앎. 얼마 전에 단체 감전 사고로 입원했다 하지 않았음?”
“플레이리스트 스태프 명단에 안 보이길래 퇴원 후에 다른 방송으로 간 줄 알았는데.”
“그 사람 이제 PD 아니야.”
독고미로의 홈마 정해온은 학교나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방송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었다.
정해온은 웬만한 기자보다 플레이리스트에 얽힌 인물과 사건을 잘 알고 있었다.
“입원 중에 그 사람이 그 감전 사고가 다른 사람의 사주로 벌어진 일일 거라고 주장했거든. 그래서 경찰이 동기가 있을 법한 사람들에 관해 조사했어.”
“아, 뭔지 알 것 같음.”
“옛날에 묻혔던 자기 옛 범행을 자백한 꼴이 됐겠구나!”
“맞아. 그 PD가 옛날에 쳤던 사고가 몇 개 있었는데, 윗선에서 묻어 줬나 봐. 광고주는 이런 잡음을 싫어하니까 보통 PD가 사고 치면 쳐 내는 대신 묻고 아예 없던 일로 하는 걸 택해.”
정해온은 수사기관에 의해 드러난 PD의 범행에 관해 줄줄 읊었다.
대표적인 게 사회 경험이 없는 순진한 사회 초년생이나 학생 연습생을 대상으로 방송 출연을 빌미로 돈을 뜯어낸 것이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일정을 뒤로 미루다가 돈 나올 구석이 없으면 방청객이나 스태프 잡일꾼으로 한 번 부려 먹고 연락을 끊는 게 그 PD의 사기 수법이었다.
지금 피해자들은 집단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엔 방송국에서 안 감싸 줬나 보네.”
“저번에 황명 재단에 찍힌 PD잖아. 이번에 묻어 줬다가 걸리면 황명 재단이 나섰을걸. 이거 말고도 제작비 횡령한 게 걸려서 권고사직 처리됐어.”
“PD직에서 잘렸으니 돈도 궁했을 거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제갈 쌤을 노린 건가.”
2학년 0반 학생들이 쑥덕거리며 정보 교환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적으로 제갈재걸에 관한 건을 조사하고 복수할 계획을 세우는 듯했다.
김유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맹효돈을 그들 사이에서 빼내어 1학년 0반 아이들과 합류했다.
“아까부터 지호가 말이 없네요. 무슨 일 있나요?”
“……연락할 일이 있어서 조금 바쁘군.”
“네? 지호는 지금 디바이스를 만지고 있지 않은데요.”
황호는 분신을 통해 연락 중이었으나 이를 다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사월세음의 질문에 황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의미심장한 얼굴을 한이가 질린 얼굴로 봤다.
그때, 입구를 통해 누군가가 들어왔다.
양복 차림의 플레이어 협회 직원들이었다.
“협회 인장이 박힌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는데. 플레이어 협회에서 왔나 보다.”
“지하 주차장 쪽에 전조 없이 이계가 발생해서 그런가?”
“그럼 지하 주차장에 가야지, 여길 왜 와.”
“우리한테 뭐 질문하려는 거 아냐?”
에너미 토벌에 참가했던 1학년 0반 아이들이 긴장한 얼굴로 답변을 준비했다.
그러나 협회 직원들은 은광고 학생들에게 관심이 없는 듯,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협회 직원 중 한 명이 은광고 교복을 보고 종이와 펜을 꺼내고 달려들다가 상사로 추정되는 인물에게 한 대 맞긴 했지만.
“……레나네 언니가 있는 쪽을 보는 것 같은데.”
“남궁 그룹에서 오신 분들에게 볼일이 있는 걸까요?”
협회 직원들이 주시하는 곳은 ‘남궁물산 이계 산업 1사업부’라는 팻말이 붙은 방청석 쪽이었다.
남궁물산 직원들은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이 대다수인 듯, 협회의 플레이어들이 감시하기 시작한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은 그저 경직된 자세로 앉아 무대를 보고 있었다.
권레나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이여름을 바라봤다.
그런 권레나를 옆에서 지켜보는 목우람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레나……는 아까부터 마음이 편해 보이지 않았어.’
권레나는 카드 홀스터에 들어 있는 이능 바이올린 카드를 보며 몹시 번민하고 있었다.
이능 악기는 권제인 같은 극소수의 천재 연주가 플레이어들에게 있어선 음파에 이능파를 실어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일종의 무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능 바이올린 같은 이능 악기는 어디까지나 무기가 아닌 악기로 분류되었다.
그래서 보안 검색대에도 걸리지 않았고, 무기 아이템을 봉인하는 스티커가 붙지 않아 얼마든지 실체화가 가능했다.
그런데도 권레나는 싸우러 가지 못했다.
‘……아직 나의 뮤즈는 이능 악기로 싸울 만큼 성장하지 않았어. 그래도 전장으로 향한 친구들을 보니 마음에 걸렸던 거겠지.’
권레나의 비밀도 알고 있는 목우람의 입장에선 ‘이여름’의 존재도 신경 쓰이긴 했다.
그러나 지금 목우람이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권레나였다.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사이, 민그린이 침묵을 깼다.
“아, 대석이한테서 메시지 왔다.”
“대석이한테서? 대석이 오늘 올 수 있대?”
“아니, 대석이는 오늘 못 올 것 같대. 연구소에서 뭐 할 거 있나 봐. ……별일 없냐고 묻는데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야 하나?”
“오늘 일은 아마 뉴스에도 뜰 거 같으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어, 미로가 무대의 위로 올라가고 있어요! 다른 후보분들도 가시는 거 보니까 이제 첫 무대가 시작되나 봐요!”
목우람은 권레나를 위로할 기회를 놓치고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불안해하고, 누군가는 순수하게 기대하는 상황에서 첫 무대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 * *
노친네가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화면에 자동으로 떠오르는 플로팅 알람만 확인했을 뿐 메시지방에 들어가 보지는 않기로 했다.
‘읽음’ 처리가 되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다.
나는 확인차 용제건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용제건 선생님, 혹시 여기에 출입 가능한 호족이 있나요?”
“응, 있어.”
용제건이 단박에 답하는 걸 보니 진짜 있나 보다.
호족 쪽에서 지금 데리러 오면 조금 곤란해지는데.
“아, 혹시 그 출입 가능한 호족이 너를 데리러 온다고 했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귀신같이 용제건이 내 질문의 원인을 파악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예리함에 감탄스러웠으나 지금 시점에서는 원인 분석보다는 대책이 필요했다.
“걱정 마. 그 호족은 나한테 맡겨.”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원인 분석뿐만이 아니라 대책도 완벽하구나!
감탄하고 있을 때, 방청객 인터뷰 영상이 나오는 틈을 타 청룡과 염방열이 내게 말을 걸었다.
“공사다망하여 손님에게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군. 알고 있겠지만, 나는 용족의 수장이자 염준열의 삼촌 청룡이다.”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 염준열의 아버지인 염방열이다.”
근엄한 목소리였지만, 번쩍번쩍 빛나는 홍룡 응원봉을 들고 있어서 그다지 엄숙하게 들리진 않았다.
자기소개에 염준열과의 관계를 빼먹지 않는 게 두 팔불출다웠다.
‘염방열과 청룡은 의형제 관계였지. 그래서 청룡과 염준열이 삼촌과 조카의 관계가 된 거고.’
플마고 속 두 팔불출은 아주 친해 보였는데, 실제로도 합이 척척 맞았다.
주변의 귀를 의식해 적절히 말을 고르는 것도 그랬다.
“이번 일로 신세를 졌는데 뭔가 주고 싶구나.”
“손님에게 선물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무엇이 좋을지 모르겠군.”
용족의 수장과 붉은 사자의 팀 마스터가 내게 선물을 주려나 보다.
보답이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보답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번엔 용족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저 응원봉 공동 구매에 참가하게 해 줬으면 하는 건데…….’
청룡과 염방열의 손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응원봉을 한 번 부러움을 담아 쳐다봤다.
응원봉이 탐나긴 하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호족의 저택으로 돌아가면 일정이 꼬일 가능성이 커.’
곧 핼러윈이고, 나는 한국을 떠야 했다.
그러나 노친네에게 발목을 잡히게 생겼다.
나는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