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정체 (12)
이번 주에 있던 일로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출국에 걸리는 시간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여러 수를 생각해 뒀는데, 그중 하나는 유력자에게 전용기를 빌리는 것이었다.
‘별일이 없으면 황지호한테 부탁하려고 했는데.’
지금 내 안부를 집요하게 물으며 연락하는 걸 보니 해외에 가라고 전용기를 내주기는커녕 향록을 불러 새 영약을 맞춰 먹일 것 같았다.
계속 연락을 무시한 것도 있으니 삼키기도 힘든 쓴 영약을 준비할 게 분명했다.
은호도 함께 화를 낼 것 같으니 저번처럼 배숙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아들 바보 염방열이 내가 염준열을 구한 것에 감사를 표하며 은인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다.
그래서 염방열에게 전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성국언도 전용기를 타고 가는 쪽이 일정을 조정하기 편할 거야.’
국회의원이 세계 정상급 플레이어 소유의 전용기를 타는 게 문제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비서인 전무영이 해결해 줄 거다.
전무영은 그간 성국언이 밟아 온 무모한 행보에 그럴싸한 구실과 명분을 붙여 수습해 온 경력이 있다.
이 정도 건이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출국 전에 대책을 다 세워 주리라 믿었다.
내가 염방열에게 한 부탁에 관해 간략한 설명을 마치자 김신록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붉은 사자 팀 전용기에 조의신 군과 성국언 학생이 탈 예정이라고 하셨습니까?”
“네, 전무영 선배님도 함께 탑승할 거예요.”
이 질문을 끝으로 김신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서론이 길긴 했지만, 딱히 헷갈릴 만한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혹시나 해서 묻는 겁니다만…….”
김신록이 뜸을 들이다가 물었다.
용제건은 김신록의 반응이 기대되는 건지 입을 가리는 것도 잊고 히죽거리며 김신록을 보고 있었다.
“……전용기의 구조가 궁금해서 구경하기 위해 태워 달라는 건 아니지요?”
“하하하! 그럴 리가! 무슨 생각을 하나 했더니, 그런 가능성을 생각한 거야?”
별로 웃기지 않았는데, 용제건은 뭐가 좋은지 크게 웃었다.
그가 들썩이며 웃을 때마다 시안색의 머리카락이 허공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김신록은 무표정으로 그 머리카락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커터 칼날이 들려 있었다.
용제건의 웃는 모습과 긴 머리카락이 거슬려서 잘라 버리고 싶은 무의식이 반영된 것 같았다.
‘용제건은 머리카락을 자르기 싫어서 염색을 할 정도니 김신록에게 쉽게 잘려 주진 않겠지만.’
김신록의 손에 들린 커터 칼날을 본 용제건이 더 신나게 웃고 그걸 본 김신록은 분한 얼굴을 했다.
꼴을 보니 김신록이 몇 번 용제건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려다 실패했나 보다.
김신록은 용제건에게서 시선을 돌린 후, 딱딱한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조의신 군, 당신은 3일이나 기절해 있었습니다. 또 여기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일어나자마자 부상을 입은 게 되는데, 바로 다음 날에 해외로 갈 생각입니까?”
“……응? 의신아, 등교하지 않았던 3일 동안 기절해 있었어? 그래 놓고 그런 작전을 나한테 제안한 거야?”
계속 신나 보이던 용제건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김신록은 하나밖에 없는 친우의 감정 변화를 알아챘다.
김신록은 ‘작전’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런 작전? 조의신 군이 무슨 일을 한 거지?”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해야 할 것 같네.”
“조의신 군이 입은 부상과 관련이 있는 거지?”
“응, 의신이가 제안했던 작전과 부상 사이에는 아주 큰 관련이 있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용제건은 그 작전의 과정을 다 밝힐 셈인가 보다.
언젠가 밝혀질 거라고 예상했지만, 지금 말하면 김신록이 나를 말릴지도 모른다.
나는 용제건의 말을 끊을 겸, 내 입장을 밝힐 겸 입을 열었다.
“치료는 다 끝났잖아요. 몸에 남은 부상도 없고, 이능파도 용왕신의 무녀님들 덕에 빠르게 안정됐어요.”
“그야 몸이나 이능파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정신 쪽은?”
“용족 분들과 붉은 사자 측에서 배려해 준 덕에 어젯밤에 푹 쉬었어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정적이 흘렀다.
용제건과 김신록은 내 말을 듣고 그리 납득하지 못한 건지, 훈육을 준비하는 교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은 인간이 아니지만, 은광고의 정교사들이었는데, 저 얼굴을 보니 과연 교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제건은 한참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이나 이계 공략에서 돌아온 플레이어들은 신체의 치료가 끝나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거 알지?”
“……네.”
“신체의 일부가 꿰뚫리고 찢기는 싸움은 정신에도 상처를 남겨. 정신적인 후유증에 도움이 되는 건 충분한 휴식과 여가지. 그러니 휴식의 필요성을 인식할 필요가…….”
“잠깐, 조의신 군의 부상 정도가 대체 어느 정도였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용제건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너머에는 강대한 이능파의 기운이 둘 느껴졌다.
들어와도 좋다는 용제건의 말에 문이 힘차게 열리자, 청룡과 염방열이 보였다.
“식사는 마쳤나? 염방열이 돌아왔으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청룡은 우리 셋을 둘러보다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야기 중이었나 보군. 급한 이야기였다면 나중에 오지.”
“아뇨, 괜찮아요.”
나는 물러서려는 청룡을 만류했다.
용제건과 김신록이 뭐라 하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어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우선일 것 같아요.”
나는 듣는 귀가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 입술만을 움직여 ‘카드모스’라는 이름을 말했다.
용제건과 염준열을 살해하려 했던 용살자 카드모스.
이 존재에 관해 언급하자 공기가 바뀌었다.
청룡과 염방열도 생각하는 바가 있는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이능파를 발산했다.
청룡의 이능파가 한 번 방을 감싸자 벽지에서 용 그림이 어지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들은 청룡의 이능파를 따라 이동하여 두 마리는 방문 쪽에, 남은 용들은 기둥 쪽에 자리 잡았다.
‘결계를 강화하는 건가. 내부의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을 파악한 것 같구나. 그래, 신중해지는 편이 좋지.’
게임 속에선 아군에게 배신당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장에서 물러난 이들이니, 본거지에 있을수록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을 거다.
가족을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괴롭겠지만, 그 가족에게 뒤에서 칼을 맞는 상황보단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화르륵!
불꽃 같은 이능파가 염방열 주변을 이글거리다 벽을 향했다.
벽지 속 용이 자리를 잡자 염방열의 이능파가 그 위를 덮었는데, 청룡의 기운에 홍염의 힘이 더해지니 결계가 더욱 견고해졌다.
“은인은 우리가 이러는 이유를 잘 알겠지만, 자네는 아직 잘 모를 것 같군. 번잡하겠지만 이해해 주게.”
“……저는 괜찮습니다.”
김신록은 아직 자세한 정황을 듣지 못해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청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용살의 전승을 가진 용의 존재에 관해선 알고 있었다. 우리를 노릴 가능성과 그에 대한 대책을 생각하지 못한 게 통탄스럽군.”
“그 카드모스가 하필 우리 준열이를 노리다니……! 그 이유도 참으로 천인공노할 것이었습니다!”
염방열이 분개하면서 말했다.
그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그가 한 말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카드모스가 염준열을 노린 이유를 알아낸 건가?
카드모스에게 어떤 고문을 가해도 순순히 입을 열 것 같진 않은데.
아레스의 종살이를 8년 동안 묵묵히 해낸 테베의 건국 영웅 카드모스가 하루아침에 간단히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용살자가 우리 준열이를 노린 이유를 알아낸 거야?”
“네, 용왕신의 무녀들의 협력을 얻어 알아냈습니다.”
용제건의 질문에 염방열이 설명했다.
카드모스는 용살자라고 하나 용인 존재다.
이곳은 오랜 기간 용들과 용왕신의 무녀가 거주했고, 용왕신이 몇 번이나 강림한 적이 있는 곳.
그러니 타국의 용이라 하나 이 세계에서 용으로 인식되는 한 용왕신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게 되었다고 한다.
“공연히 신화 속의 영웅이 아닌지, 알아낸 게 적긴 합니다. 그래도 그 원인 만큼은 분명히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그 용살자가 우리 준열이를 노린 이유가 뭐야?”
“우리 준열이가 가진 능력 때문입니다.”
아까부터 둘이서 염준열을 자연스럽게 ‘우리 준열이’라고 칭하는데 아무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염방열은 카드모스가 ‘우리 준열이’를 노린 이유를 입에 담았다.
“우리 준열이는 엄밀히 따지면 용족이 아닌 후예이지만, ‘용’을 부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능력을 가진 후예는 척살 대상이라고 하더군요.”
휙!
그 말이 끝나자 용제건이 눈에 띄게 고개를 크게 돌렸다.
용제건의 시선이 김신록을 향해 있었다.
“……‘용’을 부르는 능력을 가진 용족의 후예가 척살 대상이라면, 그와 비슷한 능력을 가진 후예도 마찬가지겠네.”
“듣고 보니 그렇군.”
청룡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김신록을 보고 있었다.
김신록도 다소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네의 광림은 호랑이와 곰을 불러내지 않는가.”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김신록의 광림.
그 능력의 정체는 염준열과 아주 비슷한 것이었나 보다.
‘그럼 흑막이 김신록을 노린 이유도 혹시…….’
흑막은 어쩌면 염준열과 김신록의 능력을 경계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염준열의 광림 ‘홍룡소환’은 강력하지만, 무적은 아니고, 더 강한 이능도 많다.
아마 김신록의 광림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능력의 강함이 아닌 다른 이유가 있어서 둘을 노리는 것일 텐데, 아직 단서가 적어.’
흑막의 행보나 두 후예의 능력을 고려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청룡이 입을 열었다.
“그 원인을 알아낸 걸 계기로 용왕신의 무녀가 용살자를 맡겠다고 제안하더군.”
“용왕신의 무녀가 용살자를? 옥지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렇게 제안하더군. 용의 힘을 다루되, 후예나 용이 아니라 인간인 존재는 용왕신의 무녀뿐. 그러니 안전을 고려해 카드모스를 하옥한 자리에 용왕신의 무녀를 배치할 생각이다.”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안 돼요.”
갑자기 내가 반대할 줄은 몰랐는지 실내의 모든 눈이 내 쪽으로 향했다.
벽지 속에서 결계를 만들고 있는 용들도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카드모스의 반격이 염려되면 붉은 사자의 팀원을 배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용족의 은인은 생각이 있는 것 같군.”
“의신이는 카드모스와 조우하기 전부터 대비하고 있었지. 마치 용살자가 습격할 걸 아는 듯한 대처를 했었어.”
용제건이 사족을 덧붙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내 발언에 설득력을 더해 주는 감사한 말이었다.
“용왕신의 무녀님들에 관해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뇨, 정확히는…….”
나는 아직 중학생일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용왕신의 무녀 후보생에 관해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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