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1)
무녀 후보생을 언급하자 청룡과 염방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용족은 붉은 사자나 염준열과 관련된 사항을 제외하면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용왕신의 무녀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드물고, 무녀 후보생에 관해 아는 이들은 더욱 적었다.
그러니 저들이 경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제 용왕신의 무녀를 만났다고 하나 무녀 후보생에 관해선 듣지 못했을 터. 은인은 어찌 무녀 후보생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인가.”
플마고를 통해서 용족과 붉은 사자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봤으니까.
요약하자면 그러했지만, 이걸 말할 수는 없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흐음…….”
청룡은 말하기 어렵다는 내 말에 더 추궁하지 않았다.
용족의 은인이 아닌 애먼 인간이 이런 소리를 했다간 당장 하옥되어 심문당했을지도 모른다.
은인에게 따지는 건 관두었으나 청룡의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는지 벽지 속의 용들과 함께 나를 뚫어질 기세로 관찰했다.
‘이대로라면 후보생에 관한 부탁을 하기 어렵겠는데.’
플마고에 관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청룡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지금 내가 둘 수 있는 수 중, 가장 설득력이 있는 수는 물증과 함께 제시할 수 있는 것.
용제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증거’에 관해 말했다.
“용왕신을 섬기는 용으로서, 용왕신의 무녀를 의심하는 듯한 말과 후보생에 관해 아는 말에 경계하는 건 당연할 거야. 하지만 의신이는 믿을 만해요, 청룡. 증거도 있어요.”
용제건과 청룡은 꽤 가까운지 반말 반, 존대 반이 섞인 말투로 말을 걸었다.
청룡을 달랜 용제건이 내 쪽에 말을 걸었다.
“의신아, 청룡에게 그걸 보여 줘.”
나는 아이템창을 열어 가장 최근에 습득한 어느 아이템을 선택했다.
아이템을 택하자 아무 전조 없이 신령한 기운을 머금은 구슬이 나타났다.
한 손바닥 위에 올라가는 크기의 투명한 구슬 안에는 오색으로 빛나는 용 비늘이 들어가 있어, 구슬도 비늘의 색에 따라 빛을 뿜었다.
그 구슬을 보자 용제건을 제외한 이들이 경악했다.
“이 기운은 설마, 용왕신……!”
“구슬 안에 있는 오색의 비늘…… 저건 용왕신의 비늘이 아닙니까?”
용제건은 흡족한 얼굴로 내 손바닥 위를 주시했다.
용제건은 아이템창을 통해 아이템을 꺼낸 과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듯했는데, 그게 뭐 좋은 일이라고 아주 신나 했다.
“어디에 어떻게 감추었는지, 어떤 원리로 등장했는지 전혀 모르겠어. 역시 굉장하구나, 의신아.”
“용제건, 너는 용왕신께서 은인에게 이 보물을 하사한 걸 알고 있었나?”
청룡의 질문에 용제건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래. 의신이는 용도, 후예도, 무녀도, 후보생도 아니지만, 용왕신님이 직접 용궁 출입을 허락해 줬지.”
용왕신이 건넨 용궁 출입증의 의미는 내 생각보다 더 무거운 걸지도 모른다.
청룡은 내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후예를 구한 은인이자 용족의 총아가 신뢰하고, 용왕신께서 허락한 인간이다. 용족의 수장으로서 의심을 접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겠군. 은인의 제안에 대해 듣겠네.”
청룡의 진중한 목소리에는 위엄과 호의가 서려 있었다.
그간 황지호나 옥토연 같은 수장만 봐서 몰랐는데, 진족의 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다.
용족의 안녕을 걱정하는 청룡의 옆얼굴에서 홍룡 응원봉을 흔들던 방정맞은 모습은 떠올리기 힘들었다.
나는 그간 생각해 온 제안을 입에 담았다.
“용왕신의 무녀 후보생을 용궁으로 부르는 날은 내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군. 계승식의 시기에 맞춰 후보생을 부르는 게 용족의 오랜 관례다.”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가 시작하는 시기는 계승식 당일.
내년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이었다.
이날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계승식 날을 바꿀 수는 없으니, 적어도 무녀 후보생을 부르는 날을 변경해야 했다.
“그 시기를 일주일 앞당겼으면 합니다.”
청룡은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더 복잡하고 곤란한 제안을 하리라 예상했나 보다.
나는 중요한 조건을 몇 개 덧붙였다.
“단, 그 시기를 앞으로 당길 것이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분들과 용왕신만 아셨으면 합니다.”
“……지금 은인이 덧붙인 조건은 용살자의 옥지기로 무녀를 붙여선 아니 된다는 말과 관련이 있나?”
청룡의 질문에 나는 바로 긍정을 표했다.
“네, 용왕신의 무녀분들 주변엔 늘 경호를 붙여 두는 게 안전할 거예요.”
“용왕신의 무녀 주변에 경호를 붙여야 하는 이유를 확실히 하고 싶군. 누구의 안전을 위해서인가?”
“모두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모두’의 안전이란 말에 청룡은 내 뜻을 헤아리고 얼굴에 그늘을 드리웠다.
청룡은 용왕신의 무녀로 인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을 한 번에 알아들은 듯했다.
“위험한 건 무녀 전원인가?”
그건 나도 알지 못했다.
용왕신의 무녀 중 대체 몇 명이나, 그중 누가 배신자인지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 점은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알겠네.”
청룡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응했다.
“은인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청룡은 그 말에 이어 내가 기다렸던 말을 해 주었다.
“그리고 제안과 더불어 어제 은인이 했던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도록 하마.”
* * *
은광고 1학년 0반 교실.
수업과 종례가 끝났지만, 1학년 0반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남아 조의신의 생일 파티 준비를 했다.
오늘은 마침 조의신이 등교하지 않아 생일 파티를 준비하기에 제격이었다.
“학교 시설 중 어디 하나 대관해서 꾸밀까?”
“음…… 기간이 촉박해서 바로 학교 측에서 대관 허가가 나올지 모르겠는데.”
“대관을 원하나? 신청하면 허가는 바로 나올 거다.”
황호의 자신만만하게 대관 허가가 바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황호는 학교 이사장으로서 바로 허가를 내리겠다는 뜻이었으나, 반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저번에 버스킹을 대비해 반주 연습을 할 때, 선배님께 대관 과정에 관해 여쭌 적이 있습니다. 최소 3일 전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고 들었습니다.”
“저 돌아이는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소릴 하냐?”
“……아하하하, 의신이는 너무 거창한 파티는 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황호의 정체가 이사장인 건 몰라도 인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는 김유리가 눈치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조의신의 성격을 고려해 파티는 간소하게 치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파티가 간소한 대신 먹을 것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는 말이 나와 1학년 0반 아이들은 메뉴 고르기에 열중했다.
1학년 0반 아이들은 홀로그램으로 케이크 사진 수십 개를 띄워 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금 오렌지가 제철이 아니라서 오렌지가 들어간 케이크로 하려면 제작 주문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MITRON에 예약할까? 거긴 재료도 고를 수 있을걸?”
김유리가 전자 칠판에 MITRON의 예약 주문 페이지를 띄웠다.
동시에 케이크 주문 가이드라인을 옆에 띄워 반 아이들과 의견을 조율했다.
“옵션 중에 오렌지 글레이즈를 넣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어…….”
“아예 미러 글레이즈 타입으로 하는 게 어때?”
“그럼 너무 달아지지 않겠습니까?”
“나는 찬성.”
“그럼 다수결로 정하자!”
케이크 옵션이 결정되자 김유리가 대표로 주문을 넣었다.
김유리가 케이크를 주문하는 사이, 다른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기타 부자재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럼 초는 제가 직접 만들겠습니다. 체스 피스 모양이면 됩니까?”
“네! 의신이 이능파가 검은색이니까 검은색 피스로 하는 게 좋겠어요.”
“아, 맞다. 우람아, 재료는 직접 사지 마! 우리가 사 갈게! 알았지?”
초 모양을 정하고 권레나가 케이크 상자 포장 리본을 고르고 있을 때.
김유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어떡해……! MITRON 예약이 안 돼!”
“예약이 벌써 끝났나?”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김유리는 홀로그램 화면을 보여 줬다.
MITRON의 케이크 예약 페이지에 공지 팝업이 하나 떠올라 있었다.
공지를 읽은 아이들이 한숨을 쉬었다.
“파티시에 개인 사정으로 다음 주 월요일까지 쉴 예정이라고 공지가 떴어!”
“아…… 그럼 아까 후보로 나온 에어 호텔 베이커리에서 예약할까?”
반 아이들이 아쉬워하며 다른 곳에 예약을 진행하는 사이.
은광고 측에서 지급한 조의신의 디바이스 위치를 추적하던 황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계속 용족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조의신의 디바이스에서 움직임이 관측되었다.
그 반응은 점점 은광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광구 주변에서 움직일 수 있는 분신 중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이쪽 ‘황지호’의 몸이군.’
그렇게 판단한 황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반 아이들이 황호를 ‘왜 저래?’하는 얼굴로 한 번 쓱 봤다.
그러나 황호가 이상 행동을 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다시 고개를 돌려 이야기를 나눴다.
무관심 속에서 황호가 입을 열었다.
“먼저 가 보겠다.”
“네? 어디 가세요?”
“직접 가 봐야 할 일이 생겼다. 결정된 사항을 그대로 따르겠다. 회의 도중에 자리를 떠서 미안하군.”
반 아이들이 황호에게 무언가를 더 묻기 전에 김유리가 재빠르게 상황을 수습했다.
“아냐, 길게 붙잡아서 미안! 회의 결과는 디바이스 메시지로 보낼게.”
“고맙군.”
“아, 너 부반장한테 파티 내용 스포하지 마라.”
“맞아요! 체스 대회 때처럼 그러시면 안 돼요!”
반 아이들의 다정한 배웅을 들으며 황호는 걸음을 재촉했다.
말이 걸음이지, 에어보드를 타고 이동하는 학생들보다 빠르게 움직였기에 황호와 스쳐 가는 은광고 행인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조의신이 이쪽으로 오고 있으니 곧바로 저택으로 데려가야겠군. 김신록도 연락이 잘되지 않아 답답했는데 잘됐어.’
연락이 되지 않는 조의신을 두고 은호가 얼마나 잔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평소에 어떻게 했기에 조의신이 메시지를 확인도 안 하냐는 게 주 내용이었다.
‘다쳤다고 했으니 향록을 불러야 하나? 일단 은호에게 조의신을 살피게 하고, 결과에 따라 영약을 새로 맞춰야겠군.’
마침내 조의신의 디바이스 위치가 은광구 안으로 진입하고, 황호도 그 위치에 도달했을 때였다.
황호는 조의신 대신 의외의 존재와 부딪쳤다.
“왔군. 용족의 은인이 호족의 수장이 직접 마중 나올 거라 했는데, 그 말대로군.”
용족의 은인이 뭐?
황호는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무슨 소리냐. 설마 그 용족의 은인은 조의신을 말하는 거냐?”
“그렇다. 용족의 은인이 용제건과 우리 준열이를 구했지. 그래서 용족의 수장이라고 하나 잔심부름을 기껍게 하기로 했다.”
청룡은 손을 뻗어 무언가를 내밀었다.
“네게 이걸 전하라더군.”
“……뭐지, 이게?”
“네가 더 잘 알 것 같군.”
청룡이 내민 것은 은광고에서 학생들에게 지급한 디바이스였다.
추적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디바이스.
조의신이 이걸 청룡에게 맡긴 이유는 자명했다.
황호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물었다.
“조의신은 어디에 있지?”
“용족의 은인은 지금…….”
청룡이 입을 열었다.
“영국으로 향하는 전용기 안에 있네.”
“뭐라고……?”
딩동.
마침 디바이스가 메시지 수신 알람음을 울렸다.
조의신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조의신] 영국에 다녀올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