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4)
어제 함근형은 황명호 이사장으로부터 이해가 어려운 지시를 받았다.
반 아이가 출연한 프로그램을 방청하기 위해 방송국으로 이동하던 중에 있던 일이다.
―지금 어디인가?
학교 일에 손을 놓고 있던 황명호 이사장이 자신을 부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밑도 끝도 없이 함근형의 위치를 묻는 상황은 플레이어가 된 후 수없이 겪었다.
교직에 몸담은 후, 협회나 프로 플레이어 팀이 지원을 요청할 때나 0반이 사고를 쳐 긴급 사항에 처했을 때 등등.
그래서 의외라고 여기기 전에 함근형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함근형의 답변을 들은 이사장이 밝아진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즉각 에어 택시에서 하차하여 방송국으로 향하도록. 정확한 위치는 디바이스 메시지로 보내지. 정문은 혼잡해질 예정이니 근방의 다른 건물을 통해서…….
함근형은 지시를 들으며 에어 택시에서 하차해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당황하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긴 건 몸에 밴 습관도 있긴 했으나, 장소는 방송국이었고 그곳에 자신의 제자들이 있던 탓이었다.
그리고 황명호 이사장이 지시한 곳에 도달해 광림 ‘명사수의 시선과 광궁(光弓)’을 사용해 눈을 빌려 방송국 내부를 정찰하려 한 순간.
상위 존재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걸었다.
―나의 화살로 맹세를 어긴 용을 쓰러뜨려라.
그 짧은 말이 내려오는 사이 눈앞에 빛이 번뜩였다.
명멸하는 시야 너머에 보인 것은 용제건과 조의신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조의신의 손에는 지금 자신에게 용을 쓰러뜨리라 명한 상위 존재의 힘이 서린 태양의 광궁이 들려 있었다.
그 광궁에 걸린 건 올림포스가 자랑하는 명궁, 태양신 아폴론의 화살이었다.
지금 조의신은 함근형과 동일한 광림을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상위 존재와 광림으로 이어질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지 않나!’
상위 존재는 다수에게 가호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광림으로 힘을 빌려줄 수 있는 건 한 명뿐.
상위 존재의 은총과 축복은 여럿이 누릴 수 있으나, 대리인은 어디까지나 하나.
함근형이 알기로 그 원칙은 이계 충돌 이후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이 아이는 대체…….’
함근형은 자신의 제자가 남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비범한 수준이 세계의 규칙을 무시할 수준임을 알지 못했었다.
함근형은 당혹스러웠으나 지금은 제자와 동료 교사를 위협하는 존재를 쓰러뜨리는 걸 우선시하기로 했다.
맹세를 어긴 용살자를 쓰러뜨린 후, 함근형은 제자의 안위를 용제건에게 맡기고 지하로 향해 에너미와 맞섰다.
조의신에게 궁금한 게 많았으나 그날 위기에 처한 제자는 하나가 아니었기에 함근형의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상황이 수습되는 대로 직접 보고하러 오게, 언제든.
은광고에 도착했을 때, 처음 함근형에게 지시를 내린 이사장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사장은 새벽에라도 보고하러 오라고 했으나 함근형은 바로 가지 못했다.
아이들을 바래다준 후에는 제갈재걸과 함께 황명 재단 홍보팀과 이번 건의 언론 대응 지침에 관해 논의해야 했고, 그 후엔 협회 사람들과 붉은 사자 팀원들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상황이 아침이 된 후에야 수습되어 함근형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출근하러 갔다.
조례하러 갔더니 1학년 0반 아이들이 묘하게 들떠 보였다.
‘조의신과 송대석은 오늘 결석할 예정인가.’
송대석은 협회 연구소를 통해 출근 증빙 서류와 결석 사유를 포함한 결석계를 제출했다.
조의신은 연락이 안 왔지만, 용제건으로부터 조의신이 쉬고 있다는 요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구소에 들어갔으니 송대석이 더 자주 결석할 줄 알았는데, 조의신의 결석 빈도가 더 잦군.’
일반 에너미학 담당 교사 공청훤이 몇 번 조의신의 안부를 묻곤 했다.
출결이 자유라고는 하지만 모범생이 사전 예고 없이 자주 결석하니 신경 쓰이는 듯했다.
학교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이사장실로 향했을 때는 수업이 끝난 방과 후였다.
“기다렸네. 보고는 앉아서 하게.”
은광고 은휘관, 이사장실.
함근형이 도착한 건 황호가 김신록으로부터 조의신과 성국언이 이륙했다는 연락을 받았을 즈음이었다.
함근형은 이사장실의 분위기나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호 앞에서도 주눅 드는 일 없이 사무적으로 보고를 마쳤다.
“보고는 이상입니다.”
함근형이 보고한 내용에는 조의신이 곤란해질 만한 내용은 전부 빠져 있었다.
함근형은 교전 중인 용제건을 발견하여 참전하고, 적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후 제갈재걸과 합류하였다고 간결히 설명하였다.
사실이 간결하게 정리된 보고였으나, 황호의 성에는 차지 않았다.
황호가 듣고 싶은 설명이 전부 빠져 있던 탓이다.
“보고에 생략된 부분은 많군. 그 눈으로 내부 상황을 다 봤을 텐데. 자네는 대적한 자의 정체는 물론, 용제건과 조의신의 상태를 보고 방송국의 외벽을 부순 것 아닌가.”
“…….”
“붉은 사자 팀이 선수를 쳐서 내부 영상 자료를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네. 이를 보충할 수준의 보고가 필요해.”
이사장의 모습을 한 황호의 독촉에 함근형의 머릿속에서 의구심이 다시 피어올랐다.
급박한 상황 앞에 잠시 생각을 접어 뒀지만, 그날 이사장의 명령은 어딘가 의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마치 카드모스가 나타나 용족과 그 후예를 노릴 거라고 예측하고 내린 지시 같았으니까.
‘그날 홍천에서의 일이 길어질 수도 있었다. 내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어. 변수가 지나치게 많았으니, 이사장이 카드모스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기다린 건 아닌 것 같군.’
함근형은 지금 자신이 이 자리에서 이사장의 행동 원리나 정보원 등을 파악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사장이 독촉하는 원인을 알아내는 대신, 자신이 보고를 했을 경우 일어날 결과에 집중하기로 했다.
함근형이 신중하게 물었다.
“지금 하는 보고는 황지호 학생의 귀에 들어갑니까?”
함근형은 1학년 0반 아이들이 송대석같이 까다로운 아이를 제외하면 서로 두루두루 친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입학 첫날부터 등교한 아이들끼리는 가장 얼굴을 자주 보고 대화를 많이 했으니 각별하게 느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명호 이사장의 친척으로 알려진 황지호의 이름이 나왔다.
황지호, 조의신은 첫날부터 등교한 아이들이니까.
“……예상 밖의 질문이군.”
황호는 허를 찔린 표정으로 함근형을 바라봤다.
여기에서 황지호를 언급하리라곤 상상도 못 한 듯했다.
함근형은 이사장이 학교 운영에 태만했던 시기에 관해 잘 알고 있어 이를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제가 맡은 반 아이들을 염려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함근형의 대답을 들은 황호는 잠시 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조의신은 황지호가 알게 되면 염려할 만큼 다쳤나 보군.”
황호가 그렇게 멋대로 결론을 내렸으나 함근형은 입을 열지 않았다.
제자가 곤란해질 발언은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황호는 원하는 답변과 보고를 듣지 못했는데도 웃는 얼굴로 함근형에게 퇴실해도 좋다고 말했다.
홀로 남은 황호가 함근형이 제출한 보고서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반 담임은 좋은 플레이어이자 훌륭한 교사였군.”
함근형으로부터 보고는 듣지 못했지만, 용제건의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니 조금만 부추기면 그날 있던 일을 줄줄 말해 줄 것 같았으니 문제없었다.
뺀질뺀질한 용제건이 어제와 오늘 조의신에 이어 김신록까지 빼돌린 걸 생각하면 열불이 났지만, 귀중한 정보원이니 잘 구슬려 이용할 궁리나 하기로 했다.
딩동.
그때,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정한 은인으로부터 온 메시지인가 해서 급히 확인했다.
[거슬리는 쥐] 황호, 바빠요?
[거슬리는 쥐] 저는 바빠요.
어쩌라는 건가.
황호는 존댓말로 날아온 메시지를 징그러운 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잠깐 바라보다가 화면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홀로그램을 닫기 전에 올라온 메시지가 황호의 손을 멈추게 했다.
[거슬리는 쥐] 영국에서 파티가 열리는데요, 제가 거기 참가하기로 했거든요.
지금 조의신이 향한 곳도 영국.
서족의 수장 꾀돌이가 있는 곳도 영국.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설마 조의신이 영국에 간 이유가 이 거슬리는 쥐와 관련이 있나?’
황호는 읽고 무시하는 대신 오랜만에 서돌에게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나] 그 파티에 관해 자세히 말해 봐라.
* * *
“아, 황호로부터 오랜만에 읽씹을 안 당하고 답장이 왔어요!”
서돌이 디바이스 화면을 보며 기분 좋게 말했다.
그 말에 성의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축하드려요.”
서돌의 앞에는 작업용 책상에 앉아 목탄과 식빵을 들고 스케치에 열중 중인 한국인 소년이 있었다.
도품(盜品), ‘이무기의 귀천’을 되찾기로 선언한 소년은 최근 며칠간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12지 일족의 수장인 서돌을 대충 상대할 정도로 어느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년이 바쁜 걸 알면서도 집요하고 귀찮게 구는 서돌도 서돌이었지만, 서돌이 주의를 끌려 해도 일정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는 소년도 굉장했다.
“흥을 깨는 것 같아서 묻지 않으려고 했는데, 핼러윈이 가까워져 시간이 촉박해졌으니 물어야겠어요. 지금 뭘 하고 있죠?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기껏 황호로부터 메시지가 왔는데 바로 답장하는 대신, 관심의 대상을 소년으로 바꾼 서돌이 말했다.
지구 저편에서 황호가 속 터져 하고 있었으나 서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예고장을 만들고 있었어요.”
“……예고장이요?”
“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기 전에 대대적으로 세상을 향해 예고할 생각이에요.”
서돌은 미묘한 얼굴을 했다.
세상에는 어리석게도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 상세한 내용을 공개해 성공 확률을 제 손으로 깎아 먹는 허세에 찬 멍청이들이 존재했다.
모처럼 제 눈에 든 인간이 아둔한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돌은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상대는 만만치 않아요. 장소도 장소고…… 예고장을 보내면 위험해지지 않을까?”
서돌은 말이 길어질수록 말이 짧아졌다.
그는 어느덧 존댓말 대신 반말을 쓰고 있었다.
서돌이 흥미를 잃어 간다는 신호였다.
“그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도 모름지기 괴도라면 위험을 감수하고 예고장을 보내야죠!”
서돌의 말을 듣고도 소년은 강경한 태도로 답했다.
“거사를 치르기 전, 사전에 예고하는 것은 신사의 고상한 결투 방식입니다!”
소년은 자리에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어 보이자, 착용 중인 순백의 모닝코트 자락이 휘날렸다.
목탄으로 작업하며 새하얀 옷은 금기나 다름없는데, 소년은 ‘오늘은 테일 코트 중에서도 이 색의 모닝코트를 입고 싶은 기분이에요.’라며 이 옷을 고집했다.
“기괴하고 독창적인 예고장을 보내는 괴이쩍음! 괴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화려하고 우아한 의상! 그 대담한 행동에도 잡히지 않는 자유자재하고 신출귀몰한 행적!”
소년은 자신의 괴도 철학을 당당하게 설파할 때마다 ‘펑!’, ‘펑!’ 하고 손끝에서 폭죽처럼 이능파가 터졌다.
번쩍거리는 이능파는 소년이 구상한 예고장의 초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제가 목표로 하는 괴도입니다. 따라서 예고장을 보내는 건 포기할 수 없어요.”
역시 이 아이는 많이 이상한 애네.
서돌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서돌은 소년의 그 많이 이상한 점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서돌은 언제 반말을 썼냐는 듯 살살 웃으며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멋지네요! 그럼 저도 예고장 제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할게요!”
“서돌 디자이너라면 알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
그렇게 아직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괴도와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합작 예고장이 만들어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