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5)
켈트 신화 속에서 포모르 마족(魔族)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보는 사람의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웠던 이도 있었고, 짐승의 머리를 하고 있거나, 거인이거나, 사지가 일부 혹은 전부 없곤 했다.
‘생김새로는 특정하기 어렵지만, 포모르 마족(魔族)은 정체를 감추려 하지 않고, 무리 짓는 경향이 있으니 구분할 수는 있을 거야.’
진족 중 마족(魔族)은 보통 우두머리를 뽑거나 무리 짓지 않았으나 예외가 있었다.
그 예외는 세 가지다.
하나는 같은 상위 존재, 마신을 섬기는 사제들.
둘째는 힘을 증명한 ‘마왕’의 숭배자들.
셋째는 같은 주제의 마도 연구에 몸담은 자들.
신화에도 기록이 존재하는 유서 깊은 포모르 마족(魔族)의 경우, 굳이 분류하자면 두 번째 케이스에 해당했다.
포모르에는 절대적인 힘을 자랑하는 왕이 존재했다.
‘죽음의 눈, 사안(死眼)을 가진 외눈 거인 발로르를 중심으로 무리를 이루었지.’
발로르는 자신의 손자에게 쓰러지리라는 예언이 있었고, 이는 모이투라 평원에서 실현된다.
발로르의 손자는 켈트 신화의 주신이자 투어허 데 다넌의 영웅, 빛의 신 루 라바다.
그는 발로르의 완벽한 천적이자 포모르 마족(魔族)을 쇠퇴 일로로 몰아넣은 주역이다.
그러나 지금 루 라바다는 상위 존재로서 현세에 개입할 권한이 한정되어 있다.
그에 반해 마왕 발로르를 비롯한 포모르 마족(魔族)은 현세에 완전한 형태로 강림했다.
영국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력이 약하다고 하나, 상대는 신화 속에 기록된 존재다.
‘이들을 상대로 ‘이무기의 귀천’을 탈환해야 한다는 건가……!’
성국언은 내가 경매의 주체를 포모르로 추측해 냈다는 것에 만족한 건지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향하는 곳은 마왕 발로르가 이끄는 포모르가 주최한 핼러윈 파티다.”
성국언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경우엔 낙찰받을 각오도 하고 왔다. 만약을 대비해 그럭저럭 괜찮은 아이템 카드를 가져왔다.”
전무영이 건넨 자료 중에는 경매의 룰도 적혀 있었다.
경매 대금은 영국과 영국 왕실령의 공식 통화, 영란은행이 발행하는 파운드 스털링이나 금으로 지불하는 게 원칙이나, 매도인과 매수 희망인의 합의하에 아이템 카드로도 지불이 가능하다고 한다.
‘어떤 아이템 카드이길래 ‘이무기의 귀천’과 비슷한 가치를 가진 걸까.’
성국언이 플레이어블 캐릭터일 때의 소지 아이템을 떠올려 봤으나, 딱 이거다 싶은 게 없었다.
성국언 정도 되는 플레이어가 이계 공략을 매주 하고 있으니, 고가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긴 하지만.
“국회의원이 타국에서 마족의 경매에 참가해 도품을 낙찰받은 게 알려지면 스캔들이 되겠지만! 하하핫!”
“의원님…….”
전무영은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듯 말꼬리를 흐렸다.
거래를 하면 성국언의 아이템 카드가 매도인에게 넘어가게 되니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커진다.
성국언의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에 한해서 저 수를 두고 싶다.
“전부 들키지 않게 처리하면 돼. 나와 무영이가 직접 나서는데 실패할 리가 없어.”
“……네, 그렇죠.”
“그럼 탈환 계획을 정비해 볼까. 경매장 내부 구조와 시간표가 적힌 페이지를 펴.”
그 이후론 성국언, 전무영과 머리를 맞대며 계획을 정비했다.
성국언과 전무영이 회의를 이끌고 나도 게임 속의 지식과 자료에 적힌 내용을 기반으로 몇 마디 거들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있어서 그런지 대담하고도 정밀한 계획은 순식간에 정리되어 갔다.
짧지 않은 비행시간을 회의로 소모하게 되었으나 보람차고 알찬 시간이었다.
런던의 히드로 공항에 도달해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할 때였다.
“……의원님, 계획을 파기한 후 처음부터 다시 수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무인 에어 택시에 올라탄 직후, 전무영이 영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세히 말해 봐.”
“직접 보시는 게 이해하기 빠를 것 같습니다.”
전무영은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영국의 국영 방송에서 진행하는 뉴스에서 ‘Breaking News’라고 크게 쓰인 자막과 함께 어떤 영상을 띄우고 있었다.
그 영상 속에 있는 건 거대한 네온사인 타워였다.
그 타워를 본 순간 나는 강렬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건…… 만우절 날 은광고의 어느 미치광이가 정문 시계탑에 한 거잖아!’
4월에 본 네온사인 타워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커지고 더욱 심미성을 고려한 듯했지만, 누가 봐도 동일 인물이 한 짓 같았다.
여러 문제점이 존재했지만, 만우절 사건과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네온사인 타워가 된 건 은광고 정문 시계탑이 아닌,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 빅 벤.
빅 벤에다 이 짓거리를 하다니!
“하하핫! 올해 은광고에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신문부에서 취재한 걸 봤다.”
성국언은 은광고 교내 신문도 챙겨 보는 훌륭한 선배구나.
그런데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하나하나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네온사인은 멀리서 봤을 때, 우아한 글씨체로 문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문자는 ‘Notice Letter’.
즉, 지금 저 빅 벤으로 거대한 예고장을 날린 것이다.
‘이 예고장을 날린 건…… 설마…….’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예고장의 내용을 해석한 직후 머릿속에 딱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인물을 상상한 순간 손가락이 곧바로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한편, 문장을 완벽하게 해석한 성국언이 예고장을 요약했다.
“용이 되지 못한 천재의 산물을 대중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마족의 궁전에 왕림할 예정이라는군.”
“‘마족의 궁전’이라는 대목에 외눈박이 마왕, 발로르의 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어느 강력한 플레이어가 경매장을 노리는 게 분명합니다. 마족들도 눈치챘으니 경비가 강화되겠죠.”
전무영은 머리가 복잡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에 반해 성국언은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Phantom Thief라, 후배일지도 모르겠는데. 만나 보고 싶구나!”
성국언이 외친 그 단어에 손가락이 다시 오그라들었다.
나는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 * *
나비령이 가만히 연못 위를 응시했다.
수면을 바라보는 사이, 연꽃 사이에 숨어 있던 나비가 날갯짓하기 시작했다.
언제 이 정원에 숨어든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비령은 나비의 푸른색의 날개가 마음에 들어 말을 걸었다.
“이리로 오렴.”
푸른 나비는 날개를 몇 번 팔랑거릴 뿐, 나비령을 경계하는 건지 그녀 쪽으로 오지 않았다.
나비령이 몇 번 더 말을 걸어도 푸른 나비는 도통 반응이 없었다.
나비령은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휘이이…….
나비령의 손끝에서 이능파가 흘러나와 나비의 형상으로 변했다.
나비령이 불러낸 나비는 작고 색도 희미하여 무해해 보였다.
나비령의 나비의 날갯짓에 현혹된 푸른 나비가 연꽃 밖으로 날아올랐다.
두 나비는 연못 위를 함께 하늘하늘 날아다니며 여기저기 편린을 뿌렸다.
나비령은 잠시간 꿈결 같은 광경을 즐겼다.
“후후후…….”
나비령이 손짓하자 그녀가 부른 나비가 수면 가까이 사뿐히 내려왔다.
푸른 나비도 따라 저공비행을 한 순간.
퍽, 촤악!
나비령이 자신이 부른 나비를 터뜨렸다.
그 폭발의 여파로 연못의 수면이 뒤흔들려 작은 물보라가 푸른 나비를 삼켰다.
뒤늦게 푸른 나비가 높게 날아오르려 했으나, 물을 머금어 무거워진 몸으로는 제대로 날 수 없었다.
연못물에 젖어 버둥거리던 푸른 나비는 얼마 안 있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나비가 수면에 남은 파문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여기에 있었군.”
남자의 등장에 흥이 깨져 즐거운 한때가 끝났다.
나비령은 남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 수줍어하는 척,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네가 찾고 있는 줄 알았다면 만나러 갔을 텐데.”
나비령이 옷깃을 거두고 얼굴을 보였을 땐, 평소처럼 정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나비령을 애틋한 시선으로 보면서도 툴툴거렸다.
“말은 잘하는군. ‘그분’이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바쁜 주제에.”
“‘그분’이 안 계셨으면 너와 만날 일도 없었을걸. 그러니 ‘그분’의 명은 전부 충실하게 수행하고 싶어.”
달콤한 목소리로 나비령이 달래자 남자는 기분이 풀린 듯 선심을 쓰는 양손을 내밀었다.
나비령은 그 손을 두 손으로 꼭 움켜쥐다가 팔짱을 끼고 어깨를 기댔다.
“나도 너와 보내는 시간이 줄어서 아쉬워.”
나비령은 다정하게 속삭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복잡하게 사고를 전개하고 있었다.
남자는 단순히 나비령과 만나는 시간이 줄었다는 점에 화를 내는 것 같진 않았다.
남자가 기분이 나빠진 이유는 더 있을 게 분명했다.
‘‘그분’이 내게 내린 임무가 무엇인지 알아낸 걸까. 생각보다 늦었네.’
실패를 거듭한 남자와 웅족과 달리, 나비령은 오랜 기간 ‘그분’이 내린 까다로운 명령을 이행하며 신뢰를 쌓았다.
나비령이 받는 임무는 점점 늘었는데, 이중에선 그녀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남자가 싫어할 법한 것도 섞여 있었다.
“……그분이 명한 ‘임무’는 모두 끝났나?”
“내가 말할 수 없는 건 잘 알잖아.”
나비령은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더 깊게 기댔다.
남자는 나비령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며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히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용왕신의 무녀에게 보낸 나비는 무사히 자리를 잡은 것 같더군.”
나비령은 그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대신 끼고 있는 팔짱에 힘을 더했다.
남자의 말은 계속되었다.
“무녀의 주변에 권속을 심은 것보다 덜 위험한 임무지만, 나는 네가 협회를 상대로 그런 짓을 해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비령의 예상대로 나비령이 협회를 상대로 진행 중인 임무를 지적했다.
무녀에 관한 임무도 파악하고 있던 건 의외였다.
나비령은 자신이 남자를 과소평가했던 것 같아 속으로 반성했다.
‘처음 잡았던 타깃은 자아가 강해서 1년이나 공을 들여도 뜻대로 되지 않았어. 하지만 새로 잡은 타깃은…….’
새 타깃은 1년 동안 한 수고가 헛수고라 느낄 만큼 쉽고 간단했다.
순식간에 나비령이 손짓만 하면 당장이라도 죽어 줄 것 같은 수준으로 세뇌가 끝났다.
하지만 나비령은 이 사실을 덮어 두고 있었다.
‘지금 플레이어 협회가 무너지면 ‘그분’이 목표를 이루는 게 너무 수월해지는걸. 협회는 더 버텨 줘야 해.’
나비령 자신이 임무를 완수하면 할수록 ‘그분’의 신뢰는 무거워지나 그만큼 계획이 앞당겨진다.
허위 보고를 하는 게 발각되거나 자신의 사명이 밝혀지면 나비령은 죽게 되리라.
나비령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줄다리기를 하는 셈이었다.
물론, 제 목숨이 달렸더라도 나비령은 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계속 유지할 생각이었다.
“……미안해. 네게 자세한 설명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너를 계속 불쾌하게 할 것 같아.”
나비령은 ‘그분’에게 고했듯이 아직 그 임무는 완수하지 못했다는 뉘앙스의 말을 했다.
나비령은 그에 덧붙여 슬픔과 결의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좀 더 서두를게, 너를 위해서.”
남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흡족한 얼굴로 나비령을 끌어안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