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6)
자타 공인 괴인 ‘Phantom Thief’.
플마고 설정집에 의하면 나이 미상, 소속 불명.
이 정체불명의 괴인은 시간의 흐름을 고려해 봤을 때, 내년에 등장해 혼란한 한반도를 더 혼란하게 만든다.
세기말이나 20세기 초에 등장할 법한 감성의 괴인은 장황한 미사여구와 그럴싸하지만 결국 헛소리에 불과한 궤변, 괴도 철학을 설파해 사람들의 넋을 빼놓곤 했다.
‘그렇게 괴도 철학을 늘어놓았는데 아무도 괴도 취급하지 않았지.’
플마고 세계에서 이놈은 괴도가 아니라 괴인 취급 받았다.
본인은 괴도라고 주장하고 예고장에 늘 ‘Phantom Thief’라고 꿋꿋하게 써 놔도 소용없었다.
괴도(怪盜), Phantom Thief.
둘을 한국말로 풀어 설명하면 ‘괴이한 도둑’이다.
그런데 이놈은 괴이하기만 했지, 도둑질을 안 했다.
처음에야 화려한 예고장에 다들 괴도 운운했지만, 아무것도 훔치지 않으니 그냥 ‘괴인’이 되었다.
본인은 자신이 괴도가 아니라 괴인 취급 받는 걸 섭섭해했지만, 어쨌든 괴인은 굴하지 않고 예고장을 날리며 무언가를 집요하게 노렸다.
‘예고장에는 늘 뭔 소리인지 모를 말을 써 놔서 정확히 뭘 찾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빅 벤에 써 놓은 예고장만 봐도 그렇다.
민그린의 ‘이무기의 귀천’에 관해 알지 못하면 ‘용이 되지 못한 천재의 산물’이 뭘 의미하는지 알기 어렵고, ‘마족의 궁전’이란 말만 들으면 곧바로 포모르의 경매를 연상하기 힘들다.
플마고에 등장하는 예고장은 더 난해했던 탓에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면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직접 괴인을 조작하기 전까진 전혀 알 수 없었어.’
그래도 일단 저 괴인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였고, 괴인을 플레이할 때 그 비밀이 밝혀진다.
혼자만의 싸움을 하던 괴인이 노리는 것은 이 세계의 흑막이었다.
괴인이 훔치고자 한 것은 ‘흑막의 계략’이라는 추상적인 무언가였다.
괴인은 물론 흑막이 개인인지, 단체인지, 목표는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그저 한반도에 일어나는 참사에 배후가 있다고 감으로 단정 짓고, 그 배후가 자신의 괴도 철학과 예술관에 반한다는 이유로 무모한 싸움을 걸었다.
‘그래도 괴인이 활동하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흑막이 수작을 벌이려는 장소에 예고장을 날려 언론과 스트리머 들을 소환시킨다거나.
흑막의 계획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주제에, 시기상 대충 일을 치겠다 싶을 시점에 예고장을 날려 ‘지금 사고를 치면, 네 계획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라고 허세를 부린다거나.
물론, 이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흑막이 괴인의 배제와 말살을 우선시하기 시작했으니까.
‘차라리 멀리 도망이라도 쳤으면 좋았을 텐데.’
대담무쌍한 낭만주의자답게 괴인은 도망치지 않았다.
흑막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괴인을 노리자 오히려 그 악랄한 수단 탓에 도망갈 마음이 사라진 것 같았다.
상대가 터무니없는 악당이라 판단하여 끝까지 맞서야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괴인은 금세 궁지에 몰렸고,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괴도다운 짓을 했다.
괴인은 광림으로 어느 단서를 훔쳐 생면부지의 주수혁 일행에게 보내는 데에 성공한다.
‘……단 한 번뿐이긴 했지만, 무사히 훔치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괴인이 아니라 괴도라고 해야 하나.’
괴도는 플마고에서 일어난 사건의 중심에 있던 주수혁을 흑막과 맞설 만한 존재라 판단했나 보다.
주수혁이 단서를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도 못 한 채, 괴도의 굵고 짧은 삶은 흑막에 의해 끝난다.
‘그냥 처음부터 같이 싸우자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주수혁 일행이랑 합류하면 그 부끄러운 말투가 나아질지도 모르고, 함께 싸우다 보면 결말이 나아졌을지도 모르는데.’
은광고에 다녔다면 무조건 0반에 배치될 만큼 이상하고, 대사 하나하나가 섬뜩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지만, 내 플레이어답게 좋은 놈이었다.
직접 만나면 내 손가락이 오그라들다 못해 닳아 없어질 것 같으니 사양하고 싶지만.
“……의원님,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뉴스가 길어질수록 전무영은 사색이 되었다.
빅 벤에 일어난 대참사는 이미 해외 토픽이 되었고, 주요 언론사는 물론 유명 스트리머에 일반 관광객까지 빅 벤 앞에 몰려와 촬영을 해 대고 있었다.
화려하게 변한 빅 벤의 모습을 송출하던 이들은 슬슬 영상만으로 흥미를 끌기 어렵다고 판단한 건지, 여러 가설을 세워 가며 이 사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분석하는 대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괴도의 범행 수단.
둘째, 예고장의 의미.
‘범인을 알아서 그런지 범행 수단은 금방 파악이 돼. 아마 광림을 쓴 거겠지.’
괴도의 광림은 참 괴도다웠다.
광림의 이름은 ‘마술사의 비단 모자’.
이능파로 구현한 비단 모자 안에 들어간 것은 마술사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순간에 등장한다.
말하자면 원격 텔레포테이션이다.
‘아마 네온사인처럼 보이는 스킨을 시계탑 크기로 제작한 후, ‘마술사의 비단 모자’ 안에 넣어 시계탑 표면에 이동시킨 거겠지.’
언뜻 듣기엔 사기 능력 같지만, 제약이 많고 이능파 효율이 나쁜 광림이다.
‘마술사의 비단 모자’를 크게 구현하면 부피가 큰 물체도 텔레포테이션시킬 수 있으나, 하루에 이동시킬 수 있는 무게에 제한이 있었다.
또 이동시키는 거리에 따라 이능파 소모량이 극심했다.
저 제약이 큰 능력을 만우절 장난질과 예고장을 날리는 데에 쓰다니.
‘아마 표면에 씌울 스킨을 얼마나 가볍게 만들고, 얼마나 가까이에서 광림을 사용했냐가 문제였겠지. 부피가 상당했을 텐데, 혼자서 스킨을 제작하고 광림을 사용할 장소를 확보한 걸까?’
그놈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유능했으니 혼자 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긴 했지만.
괴도에 관해 고찰하느라 오그라든 손을 펴는 사이,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 로비 곳곳에 띄워진 홀로그램엔 번쩍이는 빅 벤이 보였다.
홀로그램을 볼 때마다 전무영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이번 핼러윈 파티는 특별했습니다. 다누 신족의 신보를 확보했으니까요. 이 시점에 망신을 사게 생겼으니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 어쩌면 죽음의 눈을 가진 외눈 거인이 직접 나설지도 모르겠군.”
“네, 발로르가 나서지 않더라도 신화에 이름을 남긴 다른 포모르들이 나서겠죠.”
스위트룸, 회의실.
우리는 긴급회의를 열게 되었다.
성국언과 전무영의 사전 조사를 통해 확보한 파티장의 규모, 경비를 서는 마족들의 숫자와 이동 루트, 교대 시간 등등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됐으니까.
‘아마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가정하에 함정을 파고 기다리겠지.’
‘최악의 상황’이라고 가정하여 순순히 마족이 주최하는 경매에 참가하는 방법도 있었다.
성국언이나 전무영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낙찰을 받으면 두 사람도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경매에 참가한다고 해도 문제가 남는다.
두 사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그 화제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가장 큰 불확정 요소도 존재합니다. 저희와 같은 것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한 것 같으니까요.”
“설령 마족이 Phantom Thief의 배제에 성공한다 해도 일이 까다롭겠군. 화젯거리가 된 ‘이무기의 귀천’ 가격이 크게 뛸 거다.”
괴도는 ‘이무기의 귀천’을 노리는 거나 다름없는 예고를 남겼다.
침입 루트를 재확보했을 때, 괴도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또, 경매가 무사히 이루어진다면, 마족의 경매에 참가하는 호사가들이 이야깃거리를 만들 겸 너도나도 ‘이무기의 귀천’을 낙찰하려 들 게 분명했다.
“아직 경매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파티장에 관한 정보 수집을 다시 하고, Phantom Thief에 관한 조사도 해야겠군.”
회의는 정보를 재수집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범행 전부터 별명이 붙었군요.”
언론과 대중이 빅 벤에다 저지른 만행을 저지른 이놈에게 별명을 붙였다.
수사기관에선 자기 과시형 범죄자에게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 자의식을 충족시켜주는 걸 극혐하지만, 사람들은 원래 이런 걸 좋아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괴도도 십중팔구 좋아할 게 분명했다.
‘플마고 시절에는 이런 사건이 없었으니, 별명도 없었는데.’
어쨌든, 오늘 괴도에게 별명이 붙었다.
‘The Phantom Thief NEON’.
‘괴도 네온’.
이 이름은 순식간에 대중의 입에 붙어 빅 벤을 비추는 영상 어디에나 괴도 네온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럼 나와 무영이는 좀 바빠질 것 같네. 후배야, 쉬고 있어라.”
회의를 마치고 두 사람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성국언은 영국에도 연줄이 있어 인사해야 할 사람이 많았고, 전무영은 성국언의 보좌와 경호, 또 정보 수집을 위해 함께 움직일 예정인 듯했다.
두 사람은 자리를 비우기 전, 내게 아이템 카드를 하나 건넸다.
SR---급 소모형 아이템, ‘메시지 없는 전서구’.
메시지 없이 이능파를 전달하는 일회성 소모품 아이템으로, 염준열에게 선물한 적이 있던 아이템이었다.
“디바이스로 연락하는 게 간편하지만, 무슨 일인지 의신이 네가 엮인 사건에선 자주 통신이 끊기곤 하니까.”
성국언은 내 주변 조사도 계속하고 있나 보다.
성국언의 말 그대로 내가 엮인 사건에선 통신이 자주 끊겼다.
플레이어들을 고립시켜 지원을 부르지 못하게 하려는 적의 수작이기도 했고, ‘눈’을 차단하기 위해 이쪽에서 둔 수기도 했다.
이번에도 통신이 끊길 가능성이 있으니 기꺼이 카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리에 익숙해질 겸, 밖으로 나갈까.’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후, 나도 호텔 밖으로 나섰다.
괴도 네온에 관한 생각에 잠겨 주변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혼자 나서니 이제야 이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과는 다른 풍경에 묘한 감상을 느꼈다.
‘유럽 쪽에 온 건 오랜만이네.’
신문부 취재 여행으로 중국에 간 걸 제외하면 사실 해외에 나간 것 자체가 오래되었다.
체스 기사를 할 때는 대국을 위해 해외에 갈 일이 많았지만, 체스를 그만둔 이후로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갈 일이 없었으니까.
‘예전에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달라진 곳이 많아. 숙소 주변의 지리는 완벽히 익혀 두자.’
하는 짓은 학생 관광객과 다름없었지만, 일단 나름의 목표가 있었다.
이곳은 프로 플레이어 팀들이 상주하는 센트럴 런던이니 그럴 가능성이 적긴 했지만, 숙소 주변에서 교전이 발생할 가능성을 상정해 보기로 했다.
‘상황에 따라선 템스강 쪽으로 갈 일도 있겠지. 물을 이용해서 싸우는 게 효율적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런던탑을 지나 타워 브리지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파드득!
내 눈앞에 검은 까마귀 몇 마리가 날갯짓을 하며 지나갔다.
런던탑의 까마귀가 인도까지 날아온 걸까?
별생각 없이 스쳐 지나가려고 할 때였다.
‘어, 왜 저 사람이 저기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낯선 풍경 속에 지인이 있으니 위화감이 상당했다.
그 인물은 나를 기다린 듯, 내 쪽으로 와 인사했다.
“조의신 학생, 제가 모시는 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MITRON의 파티시에 뒤로 까마귀가 날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