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파티 (9)
켈트 신화에 관한 기록은 현대에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켈트족의 고위 성직자 드루이드, 드루이디스가 남긴 비밀과 가르침은 오로지 구전(口傳) 전승만이 허락되었다.
켈트인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으니, 켈트인의 지식과 신화는 다른 문화권의 침략을 받자 빠르게 지워졌다.
현대까지 남은 켈트 신화의 기록은 모두 고대 로마, 그리스인 같은 켈트인이 아닌 외국인에 의해 남긴 기록이나 주변 신화를 바탕으로 유추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처럼 켈트인과 켈트 신화의 기록은 현대에 이르러 대부분 사라졌지만, 켈트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게 이 ‘켈트 해’다.
그리고 이번 목적지는 그 켈트 해에 접해 있었다.
처음 목적지를 공개하며 성국언이 이런 코멘트를 덧붙일 정도였다.
“켈트 신화에 등장하는 마족이 택할 만한 땅이군. 켈트 신화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웨일스, 접하는 바다는 켈트 해라니.”
웨일스는 바다와 접해 있지만, 영토 대부분이 세인트조지 해협, 브리스틀 해협과 접해 있다.
켈트 해와 접해 있는 지역은 그리 넓지 않았는데, 목적지 리니(Linney)는 켈트 해가 보이는 땅이었다.
위치로 따지면 MITRON의 파티시에와 만난 런던을 기준으로 서쪽, 권제인과 영원의 호수 팀의 본거지가 있던 맨체스터의 남서쪽에 해당했다.
도심지에서 멀어지고 리니에 가까워질수록 인적이 드물어졌는데, 그에 반해 주변을 달리는 에어 리무진이 늘어났다.
해가 져 주변은 어두웠지만, 에어 리무진들이 밝히는 헤드라이트 덕에 그리 어둡지 않았다.
‘저기에 타고 있는 것도 전원 초대객이겠지.’
창밖으로 나와 같은 광경을 보던 연미복 차림의 성국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는 사람의 차를 발견한 것 같았다.
“익숙한 에어 리무진이 몇 개 보이는군. 이런 경매장에 참석할 때는 새 차를 뽑거나 기록에 남지 않게 대여하는 게 좋을 텐데.”
성국언은 상당히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처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선거 운동에 나섰을 때, 자신과 악수를 나눈 사람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는 신기를 발휘했을 정도다.
성국언은 태평하게 창밖을 구경하는 척하고 있지만, 머릿속에선 에어 리무진의 차종과 차량 번호를 암기하며 마족의 경매에 참석한 이들의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을 거다.
전무영도 그걸 아는지 운전석에 앉아 ‘의원님, 이동 중에는 쉬셔도 됩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나는 두 사람이 오기 전에 좀 자 뒀지만, 둘은 한숨도 못 잤을 텐데.’
그런 상황인데 성국언과 전무영은 강행군에도 싫은 소리 하나 없었다.
오히려 나보다 저 둘이 더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아 속으로 조용히 반성했다.
‘빨리 ‘이무기의 귀천’ 탈환에 성공해서 두 사람을 쉬게 해 줘야지.’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각.
전무영이 내비게이션과 창밖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에어 리무진이 정차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절벽 위였다.
저 멀리서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주변에 정차한 에어 리무진이 몇 대 보일 뿐, 그럴싸한 파티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포모르 마족이 다누 신족의 신보를 건 경매를 할 장소로 보이진 않았다.
‘초대장에 쓰여 있는 건 장소와 시간이었어. 현지 시각 기준 0시부터 1시까지 입장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고, 반드시 초대장을 지참하라는 말이 있었지.’
이 핼러윈 파티의 입장은 인간의 상식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그 생각을 뒷받침하듯, 강력한 이능파의 기운이 도처에서 느껴졌다.
이능파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반응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변하고 있었다.
‘이능파 반응이 느껴진 곳에 정차된 차가 하나씩 사라지고 있어!’
드문드문 정차된 에어 리무진 중, 먼저 도착한 차들이 차례차례 사라졌다.
이게 그 소위 ‘입장’인 듯했다.
“입장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도착한 순서대로 입장하는 것 같군요.”
“다들 가면을 착용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성국언의 말에 우리 일행은 가면을 꺼냈다.
성국언은 몸의 골격이 큰 편이라 눈에 띄는 걸 꺼렸는지 위장 스킬이 걸린 가면과 디너 재킷을 착용했는데, 착용을 마치고 나니 전무영과 체격이 비슷해 보였다.
위장 스킬이 적용된 옷은 입고 움직이기 불편할 텐데, 성국언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성국언은 자주 잠행을 하니 위장을 하는 게 익숙하겠지. 전무영이야 말할 것도 없고.’
MITRON의 파티시에와 약속한 대로 까마귀 가면을 착용했을 때.
나보다 먼저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이 나를 봤다.
전무영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성국은 나를 보다가 씨익 웃었다.
“까마귀라…… 은광구 관련 사건 사고 보고서에서 몇 번 봤지.”
이 가면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성국언과 전무영에게 내 행적이 드러나는 건 각오했지만, 이렇게 바로 드러날 줄이야.
까마귀 가면을 쓰고 은광구에서 벌인 사건을 떠올리다 보니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았다.
‘어느 사건을 말하는 걸까.’
짧은 고민 끝에 그냥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어떤 보고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성국언은 후배를 보는 선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질문에 성국언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0반 후배라면 엮이더라도 이상할 것 없는 사건들의 보고서였다, 후배야.”
그냥 성국언이 내가 까마귀 가면을 쓰고 벌이는 일은 거의 다 안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성국언은 은광고 0반 시절 큰 사건 사건을 몰고 다녀서 그런 건지 0반 후배가 이 정도 사고를 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가면을 쓰고, 피부가 드러나는 부분은 아이템을 써서 처리해 뒀지만, 더 신중하게 행동하는 게 좋겠지. 하차 후에는 한국어를 사용하지 말도록.”
“디바이스 통역 전문 애플리케이션이 필요하면 보내드리겠습니다. 디바이스의 기본 통역 기능보다 더 나을 겁니다.”
성국언과 전무영은 영어로 유창하게 대화했다.
전무영은 나를 보며 필요하면 통역 앱을 보내 준다고 했지만, 저 말도 영어로 하는 걸 보면 당연히 내가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통역 앱은 없어도 괜찮다고 답한 직후, 무언가가 선팅된 유리창을 정중히 두드렸다.
똑똑.
그 무언가는 하얀 장갑을 착용한 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손밖에 없는 무언가였다.
허공에서 장갑을 낀 손만이 움직여 유리창을 두드린 것이다.
[초대장을 확인하겠습니다.]
기계음 같은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능파로 소리를 공명시켜 내는 소리인 듯했다.
지금 초대장을 확인하는 무언가는 손 외에는 투명한 무언가가 아니라, 손밖에 없는 존재라 발성기관이 없는 것 같았다.
갑자기 저런 존재를 마주하면 당황할 뻔한 데도 전무영과 성국언, 누구 하나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전무영은 덤덤하게 에어 리무진의 창문을 내리고 초대장을 내밀었다.
하얀 장갑의 손이 움직여 그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공에서 두 개의 손이 움직였다.
손 하나는 초대장을 들고, 다른 손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움직여 초대장을 쓸었다.
손의 움직임과 동시에 초대장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몇 차례 비슷한 행위를 반복했다.
‘초대장이 진품인지 확인하는 것 같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첫 작품이 경매에 오르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노리고 있는 경매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할 거다.
물론, 유능한 두 사람이 준비한 저 초대장은 진품이니 이런 절차도 소용없겠지만.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파티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확인을 마친 듯 하얀 장갑을 낀 손이 움직여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마법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단순해 보였는데, 곧 그 간략한 형태에 비해 강렬한 이능파가 에어 리무진을 감쌌다.
이능파가 뿜어져 나오는 곳은 바닥이었다.
‘바닥 전체가 마법진이었구나!’
이 절벽 전체가 입구였나 보다.
하얀 손이 그린 무언가는 이 마법진을 움직이는 열쇠였던 것 같았다.
파아앗!
우리가 탄 에어 리무진이 이능파에 삼켜졌다.
일순 시야가 어두운 이능파 탓에 막혔는데,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할 때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차가 정차된 곳은 여전히 우리가 도착한 그 절벽이었는데, 처음 왔을 땐 보이지 않았던 거대한 교량이 나타났다.
전무영은 갑자기 등장한 교량과 바닥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을 보며 감탄했다.
“이건…… 대규모의 은폐 마법입니다. 허락된 자에게만 보이고, 들어갈 수 있게 한 것 같군요.”
“은폐 마법?”
“네, 고대 마법의 일종 같습니다. 굉장히 교묘하군요. 마법진에 새겨진 숫자를 보니 10월 31일에만 입구가 열리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원리는 전혀 파악할 수 없지만요.”
은밀 행동에 특화된 전무영은 공격력을 올리기 위해 마법을 공부한다는 설정이 붙어 있었다.
전무영은 그 공부 덕인지 마법진을 보고 바로 은폐 마법을 알아본 것 같았다.
‘여전히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마법 공부가 도움이 된 것 같네.’
전무영은 마법진을 보며 감탄했다.
“아마 핼러윈이 아닌 날에는 포모르 마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도록 다른 입구를 준비해 뒀을 겁니다. 과연 신화시대의 마족들이 쓰는 마법답군요.”
에어 리무진 앞, 하얀 장갑을 낀 손 여럿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에어 리무진들이 움직이는 걸 보니, 주차 안내를 하는 것 같았다.
“저 교량은 걷거나 날아서 통과해야 하는 것 같군.”
“에어 리무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군요.”
다른 에어 리무진에서도 기사를 제외한 초대객들은 모두 하차하고 있었다.
“저는 주차한 후 예정대로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여기서부터 전무영은 단독 행동을 할 예정이다.
전무영의 광림, ‘그림자 없는 시간’은 그림자와 연관된 상위 존재가 안배하지 않는 한 꿰뚫어 볼 수 없는 최강의 잠입 기술이다.
웬만한 진족이나 상위 존재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저 능력은 파티를 맺은 동료라 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니 단체 행동에는 맞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전무영은 당부했다.
“의원님, 혼자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가능하면 조의신 학생과 움직이시고, 여의치 않으면 저와 합류해 주십시오.”
“하하! 걱정하지 마라. 무영이 너야말로 무리하지 마라.”
보통은 10대에 불과한 나한테 단독 행동을 자제하라고 할 텐데, 전무영은 성국언 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이는 단순히 전무영이 성국언의 수석 보좌관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성국언의 능력을 고려한 충고일 거다.
‘성국언은 혼자 움직이면 약해지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성국언은 언론이 ‘국언무쌍’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과 달리, 단독으로 움직이기 곤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국언의 광림은 자신이 동료로 인식한 존재가 있을 때 발휘된다.
게임으로 치면 파티원이 있어야 능력을 쓸 수 있는 타입으로, 어떤 의미론 국회의원다운 능력이었다.
‘플마고에서도 혼자 있다가 당했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씁쓸했다.
그걸 고려해 가능하면 성국언과 함께 움직일 생각이었다.
전무영과 헤어져 먼저 바다 안개가 짙게 깔린 교량 위로 향할 때였다.
‘……저건!’
시선 너머로 예상치 못한 존재가 보였다.
말의 갈기가 장식된 반가면을 쓴 여성의 얼굴은 반 드러나 있었는데, 그 밑으로 검은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마족(馬族)의 수장, 흑마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