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라이벌 (3)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단독 행동을 하게 되었다.
전무영은 10대인 후배를 마족의 고성에 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유로 반대 의사를 내비쳤으나 성국언이 내 편을 들어 줬다.
성국언은 내 돌발 행동에 당황하기는커녕 대견해하며 말했다.
―구경 정도는 혼자 할 수 있겠지. 제 앞가림 정도는 하는 아이니까.
―하지만…… 장소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은 마족의 귀를 의식한 건지 신중하게 말을 선택하며 대화를 계속했다.
이름을 비롯한 신분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내용을 입에 담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 같았다.
―분별없는 아이가 아니다. 죽을 고비도 지혜롭게 넘겼잖아. 그 이후로는 강자들 사이에서 제 실력을 가늠할 기회도 겪었지. 만용을 부리는 게 아니야.
성국언은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과 그 이후의 학교생활에 관해 돌려 말했다.
전무영이 잠시 답변을 미루고 나와 성국언을 달관한 표정으로 응시하다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말려도 들어주실 것 같지 않군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전무영은 날 보며 성국언의 파란만장한 학창 시절을 떠올렸나 보다.
어린 시절의 성국언은 지금보다 더 거침없이 행동했을 테니 저런 얼굴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저번에 건넨 아이템을 잊지 말 거라.
성국언이 언급한 대상은 SR---급 소모형 아이템, ‘메시지 없는 전서구’.
굳이 저 아이템을 상기시킨 건 언제든지 도움을 청하라는 뜻일 거다.
휴게실을 나서기 전, 성국언이 물었다.
―그 아는 사람 말이다. 혹시 또래의 친구니?
성국언이 긴 설명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그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성국언의 말에 플마고에서 얻은 사전 지식과 이 세계에서 겪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애써 외면해 오던 어느 가설이 떠오른 탓이다.
‘괴도 네온은 은광고 학생일 가능성이 커.’
만우절에 네온사인 타워로 변한 은광고 정문 시계탑.
괴도 네온의 예고장이 되어 버린 빅 벤.
네온사인 타워의 유사성이나 신출귀몰한 범행 수단을 고려해 봤을 때 두 작품은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추측됐다.
이 두 건만 봤을 땐 괴도 네온이 교직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은광고에는 괴짜 교직원도 많으니까.
학교 커뮤니티 종합 게시판에서 경솔한 말을 한 바람에 정문에서 총동아리회관까지 삼보일배로 이동한 현악부 고문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괴도 네온은 성인이 아니었어. 신상 명세는 나오지 않았지만, ‘소년’이라는 텍스트 묘사도 있었고 CG상으로 본 얼굴도 어려 보였지.’
그러면 괴도 네온이 은광고 소속이라고 치자.
괴도 네온의 성격상 입학시험은 진지하게 치렀을 것이고, 그간 무수한 0반 학생을 걸러 왔던 면접관이 괴도 네온의 관종력을 못 알아봤을 리가 없다.
‘괴도 네온의 그 성격이라면 당연히 0반을 배정받았겠지…….’
그리고 우리 반에는 유독 결석자가 많다.
그중 하나가 괴도 네온일 가능성이 있다.
‘아니야, 괴도 네온의 나이는 안 나왔잖아. 은광고 소속이라고 해도 2학년이나 3학년 0반일 수도 있잖아!’
2, 3학년 0반은 출석률이 높고 단합도 잘 되지만 독고미로의 홈마 정해온처럼 등교를 안 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니 괴도 네온이 1학년 0반이라고 단정 지을 순 없다.
‘……다른 한쪽은 그렇지도 않지만.’
멀린의 제자, 자칭 위대하고 멋진 드루이디스.
그쪽은 1학년 0반이 확실했다.
엄밀히 따지면 내년에 2학년 0반으로 등장할 예정이나 현시점에선 나와 같은 반이다.
‘어쨌든 현재 이 고성에 있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넷인가. 목적을 고려하면 전원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어.’
성국언과 전무영, 괴도 네온과 드루이디스.
넷 다 걱정됐지만 분신술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내가 서포트할 수 있는 대상은 한정되어 있다.
저 두 그룹 중 한 그룹을 지원한다면 후자 쪽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성국언과 전무영은 최악의 경우 ‘이무기의 귀천’의 탈환에 실패하는 선에서 그치겠지만, 대놓고 싸움을 건 둘은 목숨이 위험할 거다.
‘둘이 쉽게 잡히진 않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야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건 침입한 후 사라진 두 사람의 소재 파악이었다.
성국언과 전무영처럼 사전에 회의를 한 것도 아니니 지금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천동하의 광림, ‘건곤(乾坤)을 품은 눈’이었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현재 포모르 마족을 이끄는 마왕은 죽음의 눈, 사안(死眼)을 가진 외눈 거인 발로르다.
하늘과 땅을 품는다는 ‘건곤(乾坤)을 품은 눈’은 말 그대로 포착한 지역을 전부 눈에 담는 능력으로 정보량을 통제할 수 없는 게 단점이다.
‘여기에서 천동하의 광림을 쓰면 자칫하다간 발로르가 보내는 죽음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칠 가능성이 있어.’
광림을 통해 눈이 마주친 거니 실제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즉사 효과는 없을 거다.
그러나 회복을 위해선 유상희 정도 되는 능력자가 상위 존재의 힘을 빌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둘을 쫓기 위해 천동하가 아닌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능력을 빌리기로 했다.
‘문새론의 능력을 쓰자.’
‘플레이어의 궤적’으로 선택한 대상은 문새론.
문새론의 능력 중 사용하기로 한 건 그녀가 2학년 때 얻을 예정인 추적계 파생 스킬 ‘집중 취재’였다.
문새론이 터득한 파생 스킬은 추적계 스킬 중에서도 사기급에 속했으나 발동 조건이 까다로웠다.
조건 첫째, 추적하는 대상이 일정 거리 안에 있을 것.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는 추적이 불가능했다.
‘이 고성 정도면 커버할 수 있지. 사정 범위 안이야.’
조건 둘째, 추적하는 대상의 정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것.
문제는 이 두 번째였다.
괴도 네온의 경우, 플마고 설정집에서도 나이 미상, 소속 불명 괴인 ‘Phantom Thief’로만 언급되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괴도 네온은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추적이 불가능하지만, 저 멀린의 제자의 정보는 확실히 알고 있어.’
2학년 0반, 출석 번호 1번 플레이어 캐릭터 ‘구슬비’.
그녀는 주수혁의 2학년 생활이 시작된 이후 등장하는 캐릭터다.
멀린은 꿈을 통해 구슬비에게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시나리오를 조사할 것을 명하고 그녀는 원활한 조사를 위해 등교를 시작했다.
구슬비는 사건의 중심에 있던 주수혁에게 접근하는데, 그녀의 0반 다운 면모와 기묘한 행적 탓에 황지호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플레이하는 입장에선 갑자기 툭 튀어나온 NPC, 신화계 호족 황지호가 훨씬 미심쩍었던 기억이 있다.
〈해당 캐릭터의 스킬, ‘집중 취재’를 사용합니다.〉
〈‘집중 취재’의 대상을 ‘구슬비’로 지목합니다.〉
구슬비를 ‘취재 대상’으로 지목하자 내가 가진 정보와 주변 상황을 바탕으로 스킬이 발동되었다.
파아앗!
내 눈앞에 이능파로 작성된 문서가 하나 떠올랐다.
범위 내에 ‘집중 취재’로 지목한 대상이 발견되어 취재 계획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스킬로 작성된 취재 계획서에는 구슬비의 예상 이동 경로 후보들이 적혀 있었다.
문새론의 ‘집중 취재’는 천동하의 광림에 비해 이능파와 집중력을 덜 소모하고 계획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직접 대상을 포착하는 것에 비해 정확도는 떨어졌다.
‘전용 메뉴의 ‘주변 지도 열기’ 기능과 같이 사용하면 정확도가 다소 떨어져도 괜찮을 거야. 이동 과정에서 적을 만나도 지도 기능이 보완해 주겠지.’
‘주변 지도 열기’는 게임 속에서 한 번 이상 탐색을 마친 주변을 보여 주는 기능이었다.
이곳은 처음 방문하는 장소였기에 미니맵을 켜도 보이는 곳이 얼마 없었지만, 현재 위치한 지역에 적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가 볼까.’
포모르 마족이 안내한 휴게 구역을 한 걸음 벗어나자 공기가 무거워졌다.
벽지, 액자, 융단 등 성을 장식한 모든 것들은 시간을 두고 감상할 가치가 있는 예술품들로, 박물관에 전시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술품을 관람할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여기에 있는 소품들, 이 공간 하나하나 이능파가 서려 있어. 마족이 지배하는 공간이라서 그런가? 이건 마치…….’
진족의 영역이기에 느끼는 위화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티장에서는 호랑이 저택이나 용족의 구역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감각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데, 파티장을 벗어나니 공기의 질이 달라진 것 같았다.
‘이계 안을 걷는 감각에 가까운 것 같은데.’
공격대로서 이계 입구 안으로 잠입했을 때 느끼는 감각과 비슷했다.
‘괴도 네온의 침입을 대비한 마족의 한 수인가.’
진족의 영역에서 이계와 같은 감각을 느끼는 건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진족에게는 이계를 산하에 둘 수 있는 능력인 이계의 가든화, ‘이계 지배’가 있지 않은가.
나는 미니맵과 문새론의 스킬로 작성한 취재 계획서를 대조하며 더욱 신중하게 이동했다.
기척을 억누르며 몇 개의 복도와 계단을 지나쳤을 때였다.
‘……강력한 이능파다! 웬만한 진족을 압도할 만한 수준이야!’
나는 이동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숨을 죽인 후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리니 복도 저편에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였다.
“당신을 이런 곳에서 뵙다니. 최근 바쁘지 않았습니까?”
“……그리 반갑지는 않은데. 존댓말은 왜 쓰는 거야, 불길하게.”
“그야 반가워서 그렇지요. 기껏 동맹을 맺었는데 뵐 일이 없었잖아요? 마족의 침입에 대처하느라 두문불출하셨으니까요.”
“알았으니까 존댓말은 그만 쓰면 안 될까. 꾀돌이 당신이 그런 말투를 쓰면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돌과 흑마였다.
서돌은 가면을 벗은 건지 멀리에서 쥐 모양 가면을 손에 든 게 보였다.
흑마가 검은 말의 갈기 가면을 쓴 것도 그렇고, 둘 다 자신의 정체를 감출 생각이 없나 보다.
‘흑마가 이 자리에 와 있는 건 알았지만, 서돌까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왜 서돌이 여기에 있는 건가.
가끔 디바이스 메시지를 날려서 묻지도 않은 본인의 근황을 밝혔기에 영국에 있다는 건 알고 있긴 했다.
문득, 서돌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
―[꾀돌이] 제가 귀국 기념으로 뭘 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하나는 조의신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르겠고, 다른 하나는 조의신이 싫어할 것 같아요.
설마 귀국을 앞두고 하려는 무슨 짓에 지금 이 상황이 관련되어 있는 걸까?
아니, 관련이 있다고밖에 생각이 안 됐다.
“여기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아, 말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알아내고 싶으니까요.”
“그 점은 걱정하지 마. 누가 말해 준대? 아, 난 네가 왜 여기 와 있는지 궁금한데. 이유를 말해 봐.”
“말하기 싫어요.”
12지 동맹이 저강렵 같은 배신자가 섞이며 개판이 되긴 했지만, 표면적으로 유지가 된 건 기적이 아닐까?
흑마나 서돌이나 제멋대로인 건 여전한 것 같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