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라이벌 (4)
“말하기 싫은 주제에 그런 걸 물어? 필요한 정보만 빼내고 입을 다물 생각이었어?”
“네,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됐네요.”
12지 동맹의 두 수장은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매우 곤란해졌다.
문새론의 ‘집중 취재’와 전무영이 입수한 정보를 통해 확보한 이동 루트는 그리 많지 않다.
저 둘은 노린 것처럼 그 루트 위에 서 있다.
‘지나가고 싶은데, 어쩌지.’
전무영의 ‘그림자 없는 시간’은 황지호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광림이니, 저 능력을 사용하면 저 둘을 지나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에서 이능파와 광림 사용 가능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대놓고 지나갈까?’
저 둘은 엄밀히 따지면 적대하는 대상은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엮이면 성가신 존재일 뿐, 딱히 마주친다고 해서 크게 해가 될 일은 없었다.
서돌은 됨됨이나 말하는 게 저 모양이긴 했지만, 어쨌든 내게 가호를 주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다.
물론, 흑마와는 홍천에서 마주친 걸 빼면 직접적으로 엮인 것은 없다.
그래도 흑마는 호족과 동맹을 맺었으니 은광고 소속 학생을 건드리진 않을 거다.
또, 흑마의 은인인 맹효돈과 친분이 있는 내게 해를 끼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앞에 나서는 건 좀 그런데.’
내가 망설이는 사이, 흑마와 서돌 사이의 신경전이 계속되었다.
대체로 서돌이 속을 긁는 소리를 먼저 던지면 흑마는 거기에 낚이지 않고 받아치는 게 주 내용이었다.
“내가 꾀돌이의 말장난에 안 속는 게 아쉬운 거구나. 당신한테 아쉬울 일이 생겨서 기뻐.”
“사실 그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아요.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에 흥미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보다 더 흥미 있는 게 있거든요.”
“내가 당신이 흥미 있다는 그 일에 엮일 가능성이 줄어들어서 다행이다. 아, 난 바쁘니까 가 볼게.”
“기다려 봐요.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맞추고 싶으니까요.”
“고작 그딴 이유를 위해 기다리란 말이야? 싫어.”
아쉽지 않다던 서돌은 싫다는 흑마를 붙잡고 자신이 추측한 이유에 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주변을 경계하는 기색 없이 두 수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국어를 써 댔다.
서돌은 꼬박꼬박 말을 높였는데, 흑마는 서돌이 존댓말을 쓸 때마다 경멸 어린 시선을 던졌다.
“이곳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선 평소 마족(魔族)과의 교류가 있거나, 대대적인 정보 수집을 했거나, 인맥이 넓어야 해요. 하지만 당신은 셋 다 아니죠.”
“마족(魔族)과의 교류는 없는 건 맞는 말이지만 남은 두 개가 걸리는데. 무슨 근거로?”
“이계 충돌 이후 마족(魔族)의 습격으로 공사다망해져 인맥 관리에 소홀해지지 않았습니까? 한반도에서 마족(魔族)과 대항하기 바빠 여력이 없을 당신이 영국에서의 정보 수집이라니요.”
흑마는 서돌을 죽음과 삶의 경계에 던져 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로 쳐다봤지만, 서돌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뭐, 지금은 여유가 있어 보이네요. 수장이 자리를 비울 만큼요. 마족(魔族)의 습격이 계속되고 있을 테니 여유와 더불어 중요한 이유가 있는 거겠죠? 한반도에서 점점 영향력을 키워 가고 있는데, 이름이 겹치는 당신의 일족을 내버려 둘 리가 없을 테니까요.”
서돌은 흑마의 얼굴을 가린 검은 말의 갈기 가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마치 다른 진족의 기운이라도 찾는 것 같은 집요한 시선이었다.
“혹시 다른 진족의 손이라도 빌린 건가요? 누굴까요, 그게. 아마 마족(魔族)과 사이가 좋지 않은 진족 중 하나겠지요?”
서돌의 추측은 정확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흑마와 황지호는 동맹을 맺었으니까.
마족(馬族)과 호족이 아닌 외부인 중 이 사실을 아는 건 나 정도일 거다.
‘흑마가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호족과의 동맹 덕이 클 거야. 황지호가 파견한 호족이 제 역할을 하고 있나 보네.’
서돌은 그 동맹의 주체가 호족인 건 눈치채지 못했으나 사실에 근접한 추측을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한편 서돌에게 핵심을 찔렸으나 흑마는 동요한 기색이 없었다.
“꾀돌이 당신,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라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아. 난 당신에게 내가 여기 온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어.”
“네, 그래서 지금 제가 추측하고 있잖아요.”
“남의 일에 관심이 많네. 그렇게 한가해?”
“사실 그렇게 한가한 건 아니에요. 당신보다 더 관심 가는 대상이 여기에 있기도 하고요.”
별로 관심이 없는데 흑마를 붙들고 이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나.
“그래? 시비를 걸고 있는 거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시비를 거는 건 아닌데요? 그래서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 말인데요, 상위 존재가 계시를 내렸죠?”
서돌도 나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흑마가 처음 여기에 온 걸 봤을 때, 나도 상위 존재의 개입을 생각했으니까.
“생각하고 있는 후보는 둘이에요.”
나는 말의 여신으로 꼽히는 에포나 하나만을 생각했는데, 서돌은 다른가 보다.
서돌은 제 추리에 관해 설명했다.
“첫째는, 투어허 데 다넌의 모리안이에요. 전쟁의 여신들을 일컫는 모리안의 어원에는 ‘mare’라는 설이 있고, 이 단어에는 암말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잖아요? 당신과 연관이 있죠.”
모리안도 말과 관계가 있긴 하지만, 까마귀 여신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 이곳엔 까마귀 마왕이 보낸 계약자가 있으니 모리안이 이번 경매에 개입하려 했다면 시델렌티움과 접촉했을 것이다.
서돌은 시델렌티움의 개입까지는 모르기에 후보로 모리안을 든 듯했다.
“둘째는 에포나죠. 여신이 남긴 신화나 성격을 고려하면 모리안 쪽이 가능성이 크지만, 신보의 종류에 따라선 에포나도 개입할 테니까요.”
흑마는 서돌의 말을 듣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흑마는 여태까지 서돌을 제대로 상대할 마음이 없어 보였는데, 이제 내버려 둘 생각이 사라진 듯했다.
“꾀돌이 씨, 그럼 나도 추측해 볼까.”
“저에 관해 추측하는 건가요? 저는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그럼 꼭 해야겠네. 꾀돌이 당신이 이곳에서 관심 있다는 대상은 파티의 불청객을 말하는 거겠지.”
서돌의 손에 힘이 들어간 건지 손에 쥔 쥐 모양의 가면 끝이 조금 일그러졌다.
가면의 색은 쥐색.
서돌이 입은 새하얀 의상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 칙칙한 색이었다.
“불청객은 둘이지만, 당신이 관심이 있다는 쪽은 백조 가면, 화려한 예고장을 보낸 괴도 네온일 거야. 멀린의 제자 쪽은 옷차림이 말끔하지 못했거든. 당신은 겉치장을 중요시하잖아. 그래서 직접 디자이너가 되어 마음에 드는 인간들에게 옷을 보내는 거고.”
생각해 보니 서돌이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이들뿐이었다.
야근에 시달리면서도 코트 자락에 주름 하나 남기지 않는 홍규빈.
영원의 호수 팀 멤버들이 준비한 드레스를 무난히 소화하는 권제인.
인테리어, 패션에서 늘 계절감을 살리는 황지호.
다들 단정한 외모와 옷차림의 이들뿐이었다.
저들이나 괴도 네온에 비한다면 구슬비는 옷차림새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편이었다.
“그건 그렇죠. 아, 참고로 전 당신이 입고 다니는 정장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색이 어두운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흑마다운 색이라 당신의 개성을 잘 살렸다고 생각해요. 그래서요?”
흑마한테 저렇게 구는 것도 일단은 겉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가 보다.
모처럼 서돌이 칭찬해 줬지만 흑마는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서돌에게 평가받는 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리고 백조하면 떠오르는 상위 존재가 있지.”
“동서양의 신화 속에서 백조와 연관된 상위 존재는 두 자리가 넘을걸요?”
“이 경매를 생각하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백조 가면은 ‘미처르’의 계시를 받지 않았어?”
켈트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 미처르.
그는 연인을 되찾기 위해 백조의 모습으로 성에 잠입했다는 일화가 있다.
긴 시련과 모험 끝에 백조의 모습으로 변해 연인과 함께했다는 설도 있고, 끝내 맺어지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미처르 하면 백조를 연상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나는 다른 것을 떠올렸다.
미처르는 피드헬(Fidchell)의 귀재로 알려져 있는데, 피드헬은 체스와 매우 유사한 게임으로 ‘켈틱 체스’라고도 한다.
미처르는 신화 속에서 연인을 두고 체스 대결을 하여 승리를 거둔 상위 존재로 유명했다.
체스 기사를 하던 시절, 머리를 식힐 겸 체스와 연관된 이야기를 읽어 보다가 그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던 신이었는데, 이런 곳에서 이름을 듣게 되다니.’
괴도 네온과 미처르.
두 이름을 나란히 놓고 생각하니 뭔가 어색했다.
그러나 백조 가면을 쓰고, 체스판 무늬의 커프 링크스를 착용했던 게 문득 떠올라 마음에 걸렸다.
또 에포나의 계시를 받고 이 자리에 왔을 흑마의 발언이니 믿을 만하기도 했다.
플마고 속에서 괴도 네온이 상위 존재와 엮이는 일은 없었는데, 이 세계의 괴도 네온은 미처르와 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답하는 속도가 느려졌네. 내 추측이 맞나 봐.”
“딱히 당신의 말 때문에 그런 건 아니야.”
서돌의 말투가 바뀌었다.
어느 사이엔가 다시 쥐 가면을 착용한 서돌의 손에 쥐색의 구슬이 들려 있었다.
‘저건 중국에서 황지호의 결계를 부수었던 서돌의 무기잖아……!’
쥐색의 구슬이 황금빛 결계의 표면에 닿자, 결계가 빛을 잃고 먼지처럼 흩어졌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걸 지금 꺼낸다는 건 흑마와 여기서 싸울 생각인 건가?
말려야 할까, 이 틈을 타서 도망쳐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서돌이 먼저 움직였다.
파아아앗!
서돌의 손에 들린 쥐색의 구슬이 허공에 떠올랐다.
구슬은 수십 개로 분열해 서돌과 흑마를 향해 날아오는 그림자로 돌진했다.
언뜻 보기엔 회색의 잔영이 더 어둡고 커다란 그림자에 삼켜지는 모양새였지만, 구슬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는 형체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모처럼 동맹의 일원과 대화 중인데, 감히 끼어들다니.”
서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림자를 내려다봤다.
제 모습을 감추는 이능파를 유지할 힘이 상실된 건지 그림자가 사라지고 조각조각 난 에너미의 사체가 드러났다.
에너미의 접근을 알고 있던 건지 흑마는 그리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왜 이런 게 돌아다니는 거지? 권속은 그 장갑들뿐이었던 것 같은데.”
“이 공간과 관계가 있겠죠?”
서돌은 구슬을 쥐지 않은 손을 뻗어 벽에 올렸다.
벽을 만지는 손에 이능파가 실려 있었다.
공간의 정체를 먼저 파악한 건 흑마 쪽이었는지, 벽을 더듬다가 먼저 감탄사를 뱉었다.
“아까부터 공간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 같긴 했는데, 공간의 질이 완전히 바뀌었어……!”
“네, 굉장하네요. 포모르 마족은 어디에서 이런 기술을 얻은 걸까요.”
서돌이 어느 사이엔가 다시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네요. 여긴 지금 이계가 됐어요. 지금 여기는 포모르 마족의 ‘가든’이 되었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