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94화 (393/925)

61. 라이벌 (5)

서돌이 에너미를 쓰러뜨린 이후, 산발적으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경고, 에너미가 접근 중입니다.〉

서돌 주변뿐만 아니라 내 쪽으로도 에너미가 접근 중인 듯했다.

미니맵 정보를 확인하니, 이계에서 미니맵을 켰을 때 뜨는 특유의 이펙트가 보였다.

안개가 낀 듯 흐릿한 지도에 찍힌 붉은 점들.

에너미를 가리키는 표식들이었다.

‘서돌의 말 대로 이 성이 포모르 마족의 가든이 된 건가……!’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가든이란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 이계를 의미한다.

가든의 주인은 이계와 에너미를 복종시키는데, 방금 서돌이 처리한 에너미를 보니 뭔가가 걸렸다.

흑마와 서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이상하네. 침입자를 찾아내는 중이라기보다는 생체 반응을 감지하고 반응했다는 느낌이었어.”

“그렇죠. 보통 가든 안에 있는 에너미는 가든의 주인이 된 자의 명을 따르는 법. ‘길을 잃은 초대객’을 습격하는 건 이상하죠.”

“그래, 적어도 경고하거나 확인은 했겠지.”

이계에 등장하는 에너미들은 이계가 부르는 거대한 이능파의 격류와 함께 등장하는 부산물 같은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지배된 이계라 해도 가든 안에 에너미가 발생하는 것 자체는 통제하기 어렵다.

그래도 가든의 주인은 에너미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었다.

다짜고짜 서돌을 노린 것은 이상했다.

에너미의 행동도, 이계의 진입 과정도 전부 마음에 걸렸다.

‘플마고에서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는데…….’

주수혁과 안다인이 3학년이 된 시점에 잠입한 사월세음이 사망한 나비령의 가든.

그곳에서 있었던 일과 비슷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비령의 가든 안이었지.’

나비령의 광림은 만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계 진입 과정에 불명확한 점이 있었으나 나비령의 능력과 관계가 있으리라 결론짓고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나비령은 지금 흑막의 명을 수행하느라 바쁠 테니 영국에 있을 리가 없어. 설령 여기에 있다고 해도 이 시점에서 제힘을 드러낼 리가 없지.’

나비령이 진정한 힘을 드러낸 건 흑막의 손에 죽기 직전에 있던 일이다.

나비령의 플마고에서의 행보는 지나치게 의뭉스러워 그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이 세계에 와서 알게 되었다.

―미물에 불과한 나의 날갯짓이 ‘그분’이 부를 폭풍을 막을 수 있는지 궁금해. 한번 막아 보고 싶어.

석촌 호수에서 ‘동결형 이계’를 발견했을 당시, 나비령은 그렇게 말했다.

나비령은 플마고 엔딩에서 흑막이 불렀던 그 거대한 폭풍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있을 희생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

‘나비령이 본연의 힘을 드러내면 견제받을 게 뻔한데, 힘을 드러낼 리가 없지. 수족 노릇을 충실히 하며 신뢰를 얻는 중일 거야.’

거기까지 생각하니, 나비령이 이 건에 개입하지 않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비령 탓이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과 나비령의 가든에 있던 일과의 유사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흑막이 선보인 이능.

마족(魔族)의 마도 연구.

둘을 엮어 생각해 보니 결론이 나왔다.

‘플마고에서 주수혁 일행이 가든으로 끌려 들어간 건 나비령의 광림 탓이 아니라 어쩌면…….’

‘이계 부르기’나 ‘동결형 이계’처럼 이것도 일종의 이능 연구의 결정체일 가능성이 있다.

흑막이 오랜 시간을 들여 ‘이계 부르기’ 능력을 얻었다는 묘사가 있었고, 동결형 이계는 마족(魔族)의 마도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어쩌면 이계로 끌어들이는 능력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흑막은 차후 포모르 마족들과 거래해서 이 능력을 손에 얻은 게 아닐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지만, 나비령이 개입했다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나비령의 능력을 모를 12지의 수장은 그냥 단순히 이 상황을 마도 연구의 결과물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마족(魔族)들은 눈도 그렇고, 쓸데없는 걸 잘 만들죠. 우리도 당한 것 같네요.”

“초대객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능력을 써? 누가 죽기라도 하면 수습하기 귀찮을 텐데,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수단을 썼을지도 모르겠네요.”

기척을 숨긴 나와 달리,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흑마와 서돌을 향해 에너미가 접근했다.

둘은 에너미의 접근을 눈치챘으나 평온해 보였다.

응전할 생각인지 서돌에 이어 흑마도 무기를 꺼냈다.

흑마의 무기는 검은 마편(馬鞭)이었는데, 권레나가 쓰는 불휩(bullwhip) 종류 같은 긴 채찍에 비해 훨씬 짧은 승마용 라이딩 크롭(riding crop) 형태였다.

“내기할래요? 누가 더 에너미를 많이 잡는지.”

“이겼을 때 한 대 때리게 해 주면 생각해 볼게.”

“말발굽에 차이는 건 아프다기보다는 불쾌해서 싫습니다만…… 아니, 그렇다고 채찍질 당하고 싶다는 건 아닌데요. 뭐, 좋아요. 그럼 제가 이기면 질문 하나에 답해 줄래요?”

서돌을 향해 검은 마편을 휘두르려던 흑마가 움직임을 멈추고 답했다.

흑마는 내기에 응할 생각인 듯했다.

“생각해 보고. 방금 당신이 잡은 건 머릿수에 넣지 마.”

“그럼 셋을 세고 출발하죠. 셋, 둘, 하나……!”

서돌의 카운트가 끝나자 둘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둘의 모습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그들이 향한 쪽의 미니맵에서 붉은 점들이 빠르게 소멸되었다.

발견하는 즉시 곧바로 에너미를 토벌하는 것 같았다.

‘흑마와 서돌이 나선다면 에너미들에게 일반인들이 당할 위험이 적겠지.’

포모르 마족이 지정한 구역을 벗어날 간 큰 일반인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관광지에서 안전 수칙을 어겼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는 어디에나 있지 않은가.

나는 있을지 없을지 모를 철없는 일반인들과 한반도를 벗어나도 충분히 강한 12지의 수장들 대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걱정하기로 했다.

‘이 정도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당할 리가 없겠지만, 변수가 생겼으니 서포트할 필요가 있겠지.’

흑마와 서돌이 사라진 복도를 지나쳐 신중하게 이동을 계속했다.

*    *    *

드루이디스 구슬비.

구슬비는 비록 단 한 번도 등교하지 않았으나 은광고 1학년 0반 소속의 고등학생이자 멀린의 제자이기도 했다.

구슬비는 문명의 이기를 접하기 어려울 만큼 시궁창 같은 환경에서 자랐으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꿈을 키웠다.

그 믿음은 구슬비를 배신하지 않았다.

어느 날 구슬비의 꿈에 등장한 멀린은 그녀를 제자로 삼았으니까.

멀린은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진다는 드루이드와 드루이디스의 비전(祕典)과 지식을 아낌없이 전했다.

꿈을 통해 구슬비를 가르치고 과제를 내곤 했다.

괴상하고 이해하기 힘든 과제가 많긴 했으나 구슬비는 스승을 믿고 과제를 수행했다.

‘멀린 스승님은 이상한 분이지만 천재야!’

구슬비가 제대로 된 지식을 얻는 곳이라곤 동네 도서관 정도였는데, 예산이 적어 전문 서적보다는 주민들의 구매 신청을 넣은 동화책이 많은 작은 도서관이었다.

동화책에서 보통 멀린은 종잡을 수 없는 미친 마법사, 예언자로 묘사되곤 했고 실제로 구슬비가 꿈에서 만나는 멀린은 괴상했다.

그래도 구슬비는 스승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구슬비가 은광고 입학시험을 치른 날, 멀린이 갑자기 말을 바꾸었을 때까지는.

―새로운 별이 나타났어! 신성(新星)의 등장으로 별의 흐름이 바뀌었단다!

별의 움직임을 통해 미래를 읽는 예언자 멀린.

그는 자신이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가끔은 자신이 봤다는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예언에 관해 읊을 때는 늘 초연해 보이는 얼굴로 구슬비를 보곤 했다.

스승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구슬비는 어렴풋이 자신의 미래에 관해 짐작했다.

‘그리 좋지 않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멀린은 자신에게 예언을 바꿀 힘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멀린은 늘 미안해했고, 구슬비는 보통은 그가 무슨 의도로 사과하는지 모르는 척하거나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아무리 비참한 미래가 기다린다고 해도 멀린을 만나기 전의 삶보다 나쁘진 않을 것이다.

아직 전기와 가스가 끊긴 집에서 탈출하진 못했고, 그녀의 부모의 심성은 여전했다.

그래도 구슬비는 멀린으로부터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를 재우거나 그들의 시야로부터 몸을 감추는 법을 배웠다.

‘정식 플레이어가 되면, 드루이디스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쉽게 떠날 수 있어. 그러니까 미래가 어떻든 일단 숨통은 트일 거라 믿었지. 그래서 버틸 수 있었어.’

구슬비는 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을 꽃피워 고등학생이 되는 즉시 집을 떠날 예정이었다.

구슬비는 꿈에서 위대한 드루이디스가 되었고, 곧 현실에서도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뭐 어때. 멀린 스승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더 빨리 죽었거나 더 힘든 일을 겪었을 텐데. ’

멀린이 본 미래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미안해하는 건지 궁금하고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구슬비는 멀린의 말을 따랐다.

미래가 닥치는 순간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구슬비의 다짐과 결의를 두고 멀린은 몹시 흥분한 상태로 말했다.

―여태까지 내가 했던 예언은 다 잊는 게 좋겠구나!

구슬비는 처음으로 하극상을 일으키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멀린이 그 미래 운운하는 소리에 구슬비가 얼마나 초조하고 속을 끓였는데 다 잊으라고?

구슬비는 부탄가스 버너 위에 올려 둔 특제 시약을 멀린에게 뿌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시약은 꿈이 아닌 현실에 있었다.

욕을 하는 대신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물었다.

―어떤 미래를 보셨기에 그렇게 신나셨어요?

다소 비꼬는 말이 나왔는데도 멀린은 아주 기분이 좋게 답했다.

―미래가 보이지 않게 되었단다!

―아, 진짜! 장난해!

구슬비는 속이 상해서 처음으로 스승에게 큰소리를 냈는데, 멀린은 뭐가 좋은지 껄껄하며 웃어 댔다.

한참을 웃은 멀린이 다소 진지한 말을 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제자의 죽음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 스승은 제자의 죽음을 두고 장난을 치지 않는단다.

역시 멀린은 자신의 죽음을 봤나 보다.

멀린은 그 신성(新星)의 등장으로 별의 흐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몹시 기뻐했다.

멀린의 말에 의하면, 고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미래에 가능성이 생겼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멀린은 예언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지금처럼 정체불명의 과제를 내긴 했지만.

“여긴 이계 같은데…… 뭐야. 언제 이계에 들어온 거지?”

멀린의 명을 따라 잠입한 포모르 마족의 고성.

지금 구슬비는 미아가 되어 있었다.

미아가 된 건 참을 수 있었지만, 견디기 어려운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지금 구슬비의 앞에서 과장된 몸짓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존재였다.

“큰일 났군. 이계 공략에는 그에 걸맞은 차림을 해야 하는데, 지금의 나는 괴도 네온으로서 괴도의 옷을 벗을 수가 없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5)

4